사적 제26호 괘릉 즉 원성왕릉은 경주의 수많은 신라고분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왕릉인데도 막상 찾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최근에 괘릉의 석상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실은 국보급 문화재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소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졌다. 마침 내가 자란 고향동네와 가깝기 때문에 괘릉은 초등학교 시절 단골 소풍장소였다. 그 때 기억에 왕릉 주변이 높은 산도 아니고 큰 계곡도 없는데 왕릉 앞 20-30미터 앞부분 땅에는 늘 축축한 물기가 베어있곤 하여 신기해 하곤 하였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원래는 연못이었는데 땅을 메우고 왕릉을 만들다보니 현실에 물이 고여 널을 천정에 매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걸어놓고 보는 학습용 지도를 ‘괘도’라 하고 그려서 걸어놓은 불교그림을 ‘괘불’이라고 부르듯이 널을 천정에 걸었다하는 뜻으로 ‘괘릉’이라고 불리어져 왔으며 주위의 마을 이름도 괘릉리이다. 이 괘릉은 한 때는 문무왕릉으로도 추정되곤 하였다. 문무왕 수중릉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7호 국도변에 서 있던 표시석의 글자가 원성왕릉으로 바뀌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성왕릉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으매 유언에 따라 관채로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을 했다’고 되어 있다. 화장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괘릉을 원성왕릉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괘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지 유적과 비록 부러진 비편조각 뿐이지만 그 원문내용이 남아있는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 비문에 의하면 원성왕이 돌아간 뒤에 분명히 왕릉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숭복사 비문에 의하면 원성왕은 돌아가시는 해(798년)에 신하들에게 미리 풍수지리상 좋은 묘 터를 구해보라고 명하였고, 원성왕의 모친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숙정왕후의 외조부인 김원랑이 지은 곡사(鵠寺)라는 절터가 명당이라서 이 절터를 인근 말방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방리로 옮겨진 곡사는 경문왕대에 가서 재중건하고 그 명칭도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어졌다고 한다. 곡사(鵠寺)라는 절 이름은 근처에 기러기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서 ‘기러기 곡(鵠)’ 자를 본 따 곡사라 지었다 한다. 기러기는 흰 색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주위의 두 줄로 늘어 선 사라수 나무들이 흰색으로 변했다는 전설과 온 몸이 흰색인 기러기가 인도까지 혹은 도리천까지 오가는 영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곡사라는 이름을 지은 것으로 숭복사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문에 원성왕릉 조성과정이 너무나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또 현재의 숭복사 터와 괘릉은 거리도 가까우므로 원성왕릉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지금도 원성왕릉 가는 소나무 길 주위에는 크고 잘 생긴 바위들이 많다. 최근에 수 차례 원성왕릉을 답사하면서 소나무 숲에 숨어있는 많은 바위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원성왕릉을 만들기 전에 있었던 전설의 ‘곡사’를 증명해 줄 기러기 형상의 바위를 찾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십이지신상 호석, 혼유석, 네 마리 사자,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 등 완벽한 형태의 왕릉인 원성왕릉! 하지만 ‘곡사’라는 전설 속의 ‘기러기 모양의 바위’를 찾을 때 까지 나의 괘릉 문화재 산책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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