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평 한강물 물안개 피워 물 위에 유로하다가 바람 일깨워 아파트 건물 모퉁이 휘돌아 간다 검은 구두짝 덜거덕거리며 헤매고 있는데 한쪽 금간 안경 쓴 이 우산 없는 거리에서 연거푸 이마의 땀 훔치며 서 있다 바람은 가던길 멈추어 서서 황혼을 붙잡고 제 갈길을 재촉한다 이끼낀 덕수궁 돌담길 검푸른 바닥에 어제 내린 빗물은 괴었는데 이겨진 담배꽁초, 신문조각 범벅 되어 스쳐간 사람들 아우성 들려준다 깨진 안경 쓴 이 황혼에 등 밀며 한 손엔 봉지 하나 들고 검은 그림자 밟으며 어제처럼 오늘도 아파트 건물 모퉁이 돌고 돌아간다 *본명: 김외식. <순수문학> 시인상 수상. <해설> - 왜 하필이면 `깨진 안경`을 쓴 남자일까. 멋있는 검은 선그라스도 많은데. 이 시가 보여주는 사실적인 세계는 도심의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의 애환이다. 아주 실감나는 공간적 배경이 이 시의 품위를 한껏 높여주고 있는데, 다름아닌 `한강`, `아파트 건물 모퉁이`, `덕수궁 돌담길`이 그것이다. 거기다가 `어제 내린 빗물`이 의미를 더하고 있으며, `이겨진 담배꽁초`와 `신문조각`이 `스쳐간 사람들`인 행인들의 실태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깨진 안경 쓴 이`가 바로 낮은 데로 임하며 살아가는 서민인 것을! 아, 아주 괜찮은 시인의 시를 만났음이 가히 감명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