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에 안압지와 인근한 월성 동쪽문 유적지를 발굴하다가 하부에 석축으로 된 해자의 유구가 드러났고 198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거쳐 최근엔 일부분이나마 복원된 월성해자. 암수막새 등 기와류 2,000여점. 토기류 1,400여점, 쇠도끼 등 금속유물 180여점, 목간 등 목재유물 30여점과 우물터와 수많은 동물뼈 그리고 5구의 인골 등 소중한 고고학 보물들도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과연 ‘월성해자’의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사전에서 ‘해자(垓字)’라는 용어를 찾아보면 ‘능원 묘 따위의 경계 혹은 성 둘레 도랑처럼 판 못’이라고 적혀있으며, 호(濠), 호참(濠塹), 황(隍; 주로 물이 없는 해자를 의미한다), 중호(重壕), 지(池), 성하(城河), 성호(城壕), 성지(城池), 성구(城溝), 성참(城塹), 호구(濠溝) 등이 모두 비슷한 뜻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해자는 중국 앙소기(기원전 3,000년경) 반파촌 주거유적지 주변의 원형으로 둘러진 해자인데 상부폭이 6-8m, 하부폭이 1-3m, 깊이가 5-6m로써 구의 단면은 ‘V자형’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 1세기를 전후한 중국 한나라의 묘제건축지를 발굴한 결과 직경 370여m의 원형 수구(水溝)가 둘러져 있었다 한다. 문헌에 의하면 중국 고대 황제의 명당에도 물이 둘러져 담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아울러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고분 주변에 큰 해자가 있고, 우리나라 백제 한성시대 적성총인 석촌동 3호고분의 주변에서도 깊이 60cm, 폭 80cm의 주황(周隍)또는 주구(周溝)가 발견되었다. 이를 볼 때 해자의 기능은 다양하였다고 본다. 첫째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기능으로 중국 반파유적지 같이 처음엔 주거지 주변에 해자를 만들어 동물이나 적의 침입에 방비하다가 나중엔 중국의 장안성, 일본의 오사카성, 고구려 국내성, 신라 월성, 조선의 서산 해미읍성 등의 큰 해자로 발전되었다. 둘째, 신성구역의 경계 기능이다.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형고분, 서울 석촌동 고분,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 그리고 중국 한대묘제건축 및 명당 주변의 크고 작은 해자시설은 방어목적보다는 정치적 종교적 신성구역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성을 쌓는 흙을 제공하는 채토지 역할도 하였다. 옛날에 성을 쌓으려면 그 많은 흙을 운반하기가 쉽지는 않아서 성 주변에 땅을 파서 성을 쌓되 가능한 일정한 폭과 깊이로 파서 해자도 만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넷째, 비상시에 용수(用水)를 공급하는 수원지 역할도 하였으며, 홍수 시 성을 보호하기 위한 성 주변 배수시설로도 이용되었다. 월성뿐만이 아니라 안압지(임해전)도 신라의 궁궐구역이라고 가정할 때, 지금까지 발굴되고 알려진 월성해자(月城垓字)의 시설규모로 짐작컨대 방어시설의 기능도 일부 있지만 어쩌면 신성구역을 의미하는 해자(垓字)의 역할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사견을 던져 본다. 월성해자(月城垓字)!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흙이 매몰되어 논밭이 되고 잡초 속에 파묻혀 천 년의 긴 잠을 자다가 막 깨어나 아직은 어리둥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에게 숨겨진 신라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