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경 복원의 중요한 비밀열쇠 전랑지(殿廊址) = 전당지(殿堂址) + 장랑지(長廊址) 찬란한 통일신라의 문화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주.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신라시대 임금이 살았던 왕궁의 위치를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신라 초기에는 월성과 안압지 부근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관복은 물론이요 도성제도 또한 당나라의 도시계획을 받아들였으므로 새로운 궁궐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까지 고고학 관련 논문들을 종합해보면 서라벌의 새로운 궁궐터로 성동동 17번지 현 경주고등학교 서편 북천의 남쪽 강둑에 인접한 전랑지(殿廊址)가 통일신라시대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1937년 일제 말기에 북천의 호안공사를 할 때 폐사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어 약 2,000평에 달하는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는데 사찰 건물로는 보기 힘든 구조 즉 궁궐터에 가까운 유적이 발견되어 1940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당시 발굴에서는 건물터인 전당지(殿堂址)가 6개소, 긴회랑터인 장랑지(長廊址)가 6개소, 문터(門址)가 2개소, 담장터가 3개소, 우물이 1개소, 배수구시설이 2개소가 나왔으며 원형주좌인 통일신라시대 초석들이 많이 출토되었고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기와편 등 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었다. 1993년에 양정로 연장개설계획으로 전랑지 서편부근을 재 발굴 조사하여 도로계획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전랑지 발굴에 참여하였고 신라왕경 복원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인 후지시마 씨를 비롯한 최근 국내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랑지 중심에서 정남쪽으로 월성까지 넓은 주작대가(朱雀大街) 도로를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 당시 국제관계를 보면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은 당나라 장안성의 도시계획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나 임금이 사는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넓은 주작로가 건설되고 좌(동) 우(서)로 대칭되게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와 집들을 지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행히 일제시대 발굴조사 기록에 의하면 전랑지는 좌우대칭으로 거의 정남쪽에 가까운 방향으로 동서로 건축물이 대칭으로 되어 배열되어 있고, 지적도상 정 남쪽으로 선을 그으면 초기 신라궁궐이 있었던 월성의 중앙부근에 다다르므로 향후 신라시대의 주작대로에 대한 정? ?발굴 또한 시급하리라 본다. 그런데 그동안 일반인들은 ‘전랑지’라는 용어에 대해 솔직히 난감해하고 있다. 아마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편의상 붙여놓은 이름이므로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시대 조사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1937년 유적조사 발굴당시 궁궐인지 절인지는 정의하기 힘든 요상한 건물터가 6개 나와 일본사람들이 전당지(殿堂址)라고 표시하였고, 긴회랑(長廊)의 유적이 6곳이나 나왔으므로 ‘전장지의 전(殿)’ 글자와 ‘장랑지의 랑(廊)’ 글자를 합하여 ‘전랑지(殿廊址)’라고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경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인 신라왕경도 복원의 중요한 비밀열쇠 중의 하나인 경주시 성동동 전랑지에 대한 문화재 산책인들의 발걸음이 더 바빠지기를 기대하며 전랑지 유적 배치도를 기름종이를 대고 다시 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