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WISE캠퍼스 학생회관이 리모델링을 거쳐 ‘스페이스 위콤버’로 9일부터 시범운영을 시작한다. ‘스페이스 위콤버(Wicomvor)’는 동국대학교 교훈인 지혜, 자비, 정진의 영문 단어(Wisdom, Compassion, Endeavor)의 조합한 이름으로,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의미를 담았다. 스페이스 위콤버는 대학교육혁신지원사업으로 학생들의 복지증진과 교육인프라 개선에 중점 을 두고 기존 학생회관의 노후된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선했다. 오픈에 앞서 시범운영을 통해 학생들이 사용해 보면서 느끼는 의견을 수렴하여, 학생을 위한 체험활동 공간으로 만든다. 스페이스 위콤버는 학생회관 각 층을 동국대학교의 교훈인 지혜, 자비, 정진을 재해석한 테마로 공간을 조성했다. 3층 자비의 공간은 휴식과 긍정을 컨셉으로 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치유, 휴식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실외 데크에서는 야외 명상, 요가, 필라테스 등을 할 수 있어서 학생 힐링, 휴식, 야외전망이 함께하는 포토존으로 활용된다. 4층 지혜의 공간은 공유와 공감을 컨셉으로 한 창의형 학습공간으로, 가변형 세미나실과 무용실, 음악실 등이 있다. 5층 정진의 공간은 지속, 노력, 개발을 컨셉으로 아이디어팩토리 개념을 도입한 창의 학습 공간이다. 자유창작실과 공유주방, 체험공간을 조성하여 체험형 비교과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학생들의 문화/예술/체육 활동/만들기 등의 체험 활동을 통해 ‘만들면서 노는’ 창작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경주시가 제11호 태풍 ‘힌남노’ 피해 복구 TF팀을 지난 7일부터 본격 가동했다. 경주시에 따르면 지난 9월 26일 NDMS(국가재난관리시스템)입력 기준 태풍피해는 총 1만1659건이다. 이중 공공시설 753건에 피해액 1115억원, 사유시설은 1만906건에 94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복구 예상액은 2110억원으로 파악됐다. 이에 따라 시는 먼저 공공시설의 빠른 회복을 위해 토목 전담직원 9명으로 태풍피해 복구 TF팀을 구성해 7일부터 사업 완료 시까지 운영하기로 했다. TF팀은 지방하천 및 소하천과 소규모 및 수리시설, 도로 등 시설물 총 610건에 1374억원을 투입해 피해 복구를 전담한다. 특히 인사사고 및 주택침수, 소하천 매몰 등 문제가 심각했던 진현 소하천 개선복구는 86억원을 투입해 실시설계와 복구협의를 내년 12월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이어 2024년 3월까지 토지보상을 마무리하고 6월 착공, 2025년 7월에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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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 현상이 국내 곳곳에서 관측됐다. 개기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을 뜻한다. 이날 개기월식과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달이 다시 천왕성<좌측 흰 점>을 가리는 ‘천왕성 엄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사진제공 : 한국천문연구원 박영식 책임연구원 촬영>
경주시가 민선 8기 첫 조직개편을 단행한다.핵심 공약과 주요 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다. 경주시에 따르면, 본청은 현행 5국·41과·179팀에서 5국·41과·180팀으로 5개팀을 신설하고, 기존 8개팀을 4개팀으로 통합한다. 또 사업본부와 사업소 2개팀을 신설하고, 기존 4개팀을 2개팀으로 통합한다. 신설되는 팀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전통시장팀’ △학교급식 관리 ‘공공급식팀’ △고향사랑기부제 시행에 따른 ‘고향사랑팀’ △스마트관광사업 담당 ‘스마트도시팀’ △사업본부의 계약업무를 전담할 ‘계약2팀’ 등이다. 또 △맑은물사업본부 에코물센터 내 수질환경분야 특허출원 등 연구개발을 전담할 ‘수질연구팀’ 신설 △화랑마을 내 동학기념관을 유기적으로 운영할 ‘동학홍보팀’ 신설 등 사업소와 사업본부 등에 대한 조직개편도 단행한다. 이외에도 국·과·팀 명칭 변경안도 윤곽이 드러났다. 일자리경제국은 경제와 미래사업의 중요성을 반영해 ‘경제산업국’으로 변경한다. 또 시장직속기관인 공보관은 변화된 언론 홍보의 중요성을 반영해 ‘홍보담당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이어 △미래사업추진단은 미래전략실 △관광컨벤션과는 관광정책과 △투자유치과는 투자정책과 △일자리창출과는 일자리청년정책과 △시정새마을과는 총무새마을과로 총 6개 과의 명칭이 변경된다. 또 △미래전략팀은 총괄전략팀 △청년일자리팀은 청년정책팀 △노사지원팀은 노사협력팀 △원전사업팀은 원전지원팀으로 총 29팀의 명칭이 변경된다. 앞서 시는 지난 7일자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행정기구 설치 조례와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오는 15일 열릴 조례규칙심의위원회와 28일 개회하는 경주시의회 제272회 2차 정례회에서 이들 안건을 심의할 예정이다. 조직개편안은 모든 심의를 통과하게 되면 내년 1월 정기인사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경주대와 서라벌대 통합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있지만 통합 선결과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교육부가 내년 2월까지 대학 활용 가능 자산 매각과 체불임금 해결 등 통합 선결과제 해결을 요구했지만 원석학원은 이를 뒤로한 채 총장 인선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다. 원석학원은 지난 8일 서라벌대 정두환 총장을 경주대 총장(직무대리)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원석학원에 따르면 올해 이사회 출범 이후 통폐합 논의를 이어왔지만 최근 교육부의 대학설립심사위원회에서 최종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원석학원은 승인 부결 이유로 양 대학의 구성원 화학적 결합, 경주대 재정문제 등이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원석학원은 통폐합 완성을 위해 정 총장을 선임했다며 경주대와 서라벌대 가교 역할과 리더십을 발휘해 통폐합을 완성할 것이라 밝혔다. -미활용 자산 매각 등 임금 해결 ‘NO’ 원석학원이 통폐합 완성을 외치며 총장 선임에 나섰지만 정작 교육부가 제시한 선결과제 해결은 미온적이다. 학교법인 원석학원은 지난 4월 교육부에 경주대와 서라벌대의 통합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교육부는 통폐합 신청한 원석학원에 대학 활용 가능 미활용 자산과 차명 토지를 매각해 밀린 임금 해결 등 통폐합 선제조건을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기한은 내년 2월까지. 원석학원이 임금체불 해결을 위해서는 미활용 교육용 토지와 차명으로 관리되고 있는 토지를 매각 방안이 유일하다. 이러한 토지를 팔기 위해서는 이사회 승인 절차를 비롯해 매각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교육부가 정한 기한까지 해결하기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다. 대학 관계자는 “아직까지 매각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 것은 통폐합 선제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면서 “아마도 통폐합 기한 막바지에 자산 매각하겠다며 구성원들의 동의서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결코 선제조건 해결없이는 동의서 작성은 안된다”고 강조했다. 대학 정상화를 위한 방안으로 통폐합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크다. 통폐합 신청당시 경주대 교직원 노동조합은 설립자 일가 사익을 위한 통합은 실패한다며 ▷교육부에 제출한 대학 통폐합(안)과 노조 동의서 공개 ▷원석학원 산하 양 대학 통폐합 가능 여부 확인 ▷대학 활용 가능 자산 미활용과 체불임금 해결 미이행에도 통합 강행 이유 공개 등을 요구했다. 학교 관계자는 “통합 추진에 진정성이 의심됐지만 학교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서 “교육부가 내년 2월까지 명시한 기한 안에 통합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통합은 사실상 물 건너 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결과제 해결은 고사하고 대학 통합의 비전도 없이 원석학원이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통합을 추진 중인 경주대는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10년 동안 제한대학으로 지정돼 전국 최장 대학의 불명예를 얻고 있다. 경주대는 2012년 처음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후 2013년과 2014년 3년 연속으로 제한대학에 선정됐다. 2015년부터 대학구조개혁평가로 이름을 바꾼 평가에서 D등급(정원 평균 이상 감축, 정부재정지원사업 참여 제한)을 받았으며 2016년과 2017년 정부재정지원제한 평가에서 일부 제한 등급을 받는다. 2018년부터 대학기본역량진단으로 명칭을 변경한 평가에서 대구·경북에서 유일한 재정지원제한대학 유형Ⅱ를 받았으며 2019년에는 학자금대출 100%제한 7개교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2020년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도 재정지원제한대학 유형Ⅱ, 2021년에도 학자금 대출 및 국자장학금 전면 제한 대학으로 선정됐으며 올해도 학자금 100% 제한 대학에 선정된 상황이다. 경주대는 평가가 시행된 2011년 이후 2012년부터 시작해 2015년을 제외한 매년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면서 올해 최종 확정되면 전국 최장인 10년간 선정되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경주시가 하수처리효율을 자체적으로 대폭 개선한 신기술이 정부 인증을 받았다.경주시는 금호건설과 공동 연구·개발한 ‘GK-SBR공법’이 환경신기술 인증(제615호) 및 검증(제269호)을 환경부로부터 취득했다고 지난 2일 밝혔다.GK-SBR공법(G: Gyeongju, K: Kumho, SBR: Sequencing Batch Reactor)은 하천이나 호수 내 존..
지난 2007년 5월 22일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엎어졌지만 원형을 보존한 채 발견된 마애불상은 세간에 화제가 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열암곡 석불좌상 보수정비 중 엎어진 채로 발견된 이 마애불은 오뚝한 콧날과 아래쪽 바위 사이의 간격이 5㎝에 불과해 ‘5㎝의 기적’으로 불렸다. 마애불은 경주시가 2017년 7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의뢰한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상 주변정비 방안 및 실시설계 용역’ 결과 축조시기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분석됐다. 쓰러진 시기는 1430년 조선 세종 때 지진이 발생해 넘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지난달 31일 남산 열암곡 마애불 앞에서 불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의지를 밝히는 고불식을 가졌다. 조계종은 진우 총무원장을 비롯해 새 집행부가 들어선 뒤 최우선 과제로 열암곡 마애불 바로 세우기에 나서기로 했고, 이날 그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마애불 바로 세우기를 위한 논의 과정을 보면 녹록치만은 않다. 이 마애불을 발견한 초기부터 문화재청은 불상 바로 세우기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길이 5.6m, 무게 80t에 이를 정도로 육중하고 산비탈 중턱에 엎어진 상태여서, 자칫 불상을 세우는 과정에서 미끄러진다면 파손 우려가 있고 장비 반입도 어렵다. 그간 숱한 논의와 용역이 진행됐지만, 현재 주변정비만 완료한 채 입불 방안은 큰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경주시는 지난 2015년 3월부터 2016년 9월 5일까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입불방안 연구 용역을 의뢰해 결과를 구했다. 그러나 2017년 4월 문화재위원들은 지반이 연약해 작업 시 파손위험이 예상되므로 모의실험 뒤 입불작업을 할 것을 제시하면서 흐지부지됐다. 당시 위원들은 현재 마애불 주변 지반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중량 80t의 암석을 설치하고 장비를 이용해 세우는 모의실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모의실험을 위해서는 약 24억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추산되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현재까지도 입불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용역이 다시 진행되는 등 제자리걸음만 걸으며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는 즈음, 조계종은 고불식을 통해 마애불 바로세우기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웠다. 문화재당국은 다시 피어 오른 조계종의 불상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에 부응해 주길 바란다. 마애불 바로 세우기는 종교를 뛰어 넘어 경주시민과 국민들의 요구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4년여 넘게 공사로 출입이 통제됐던 경북산림환경연구원 동쪽 영역이 지난 1일부터 임시 개장해 일반에 공개됐다. 실개천 사이 외나무다리와 단풍이 든 메타세콰이어가 어우러지는 등 힐링명소로 떠오른 이곳을 임시 개장 형태라도 개방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정식 개장은 내년 4월경 이뤄질 전망이다. 명칭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에서 경상북도 지방정원 ‘경북천년숲정원’으로 바꿔 문을 열었다. ‘경북천년숲정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숲 속 풍경이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품어내며 시민들의 힐링명소로 떠올랐다. 하지만 경북도 산하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이 지난 2018년 10월부터 지방정원 조성공사에 들어가면서 방문객 출입이 통제됐다. 공사기간도 몇 차례 연기됐다. 당초 2020년 하반기 완공 예정이었지만, 2021년 초, 다시 2022년 5월로 몇 차례 늦어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관광객들과 지역주민들의 개방을 요구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4년 동안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경주시민들은 ‘지역 내 관광명소를 잃어버렸다’, 관광객들은 ‘입구를 막아선 출입금지 안내판을 보며 헛걸음했다’는 등 각종 불만들이 겹쳐졌다. 이 같은 시민과 관광객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이번에 임시 개장을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경북천년숲정원에는 입구에 있는 가든센터를 비롯해 거울숲, 서라벌정원, 버들못정원, 천연기념물원 등이 조성돼 볼거리가 풍부하다고 한다. 다만, 분재원, 무궁화동산, 늘솔광장, 숲그늘 등은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파손돼 완전복구 후 개방될 예정이다. ‘경북천년숲정원’이 임시 개장한 만큼 이제부터는 방문객들의 시간이다. 공식 개장까지 남은 시간 동안 방문객들과 소통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 빚어졌던 주말 교통체증 등과 같은 난제도 경주시와 함께 풀어내주길 기대해본다.
지난주 ‘도시재생’이 ‘도시혁신’으로 명칭이 바뀐 ‘도시혁신산업박람회’가 경기도 용인에서 개최되었다. 쇠퇴하는 우리 도시의 활력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공유하고 그 성과를 홍보하기 위한 자리로 정부기관을 비롯한 공공기관, 기업, 그리고 전국의 많은 지자체가 참가하였다. 우리 경주시도 이번 행사에서 도시재생사업과 주민 활성화 프로그램 추진 등 ‘도시 경제·일자리 창출’ 부문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수 지자체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진행해온 도시재생 그리고 혁신 노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부족한 점들을 뒤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올해 도시혁신사업박람회를 통해 본 타 도시의 정책추진사례를 바탕으로 진정한 도시혁신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정책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도시재생의 테두리를 한정하지 말아야 한다. 사업구역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재정투입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업의 효과는 대상지 밖으로 확산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도시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고려한 사업추진이 필요하다. 지금 성동동과 황오동의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주민의 삶의 질 수준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접한 지역의 여건 또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 도시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업구역이 섬처럼 외부와 단절되어 운영되는 게 아니고 인접 지역과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둘째, 내부적으로 협력의 시정이 필요하다. 도시혁신산업박람회를 둘러본 느낌을 정리해보면 대부분의 지자체가 도시재생을 담당하는 특정 부서와 조직에서 유사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도시재생이라는 사업 분야가 정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정부 지원 사업의 경우 요구되는 성과가 유사한 특성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혁신을 위해서는 업무영역을 뛰어넘는 부서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도시재생을 담당하는 부서와 스마트시티를 담당하는 부서가 협력하고, 환경을 담당하는 부서도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부서와 같이 일할 필요가 있다. 물리적 환경개선과 주민공동체 프로그램 중심으로 구성된 도시재생사업에 스마트시티 기술과 서비스가 접목되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최근 ‘타실라’라는 공유자전거 서비스가 경주시에서 운영되고 있다. 스마트시티의 큰 가치 중 하나가 공유경제다. 스마트시티에서는 모두가 차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마다 공유차나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도시재생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도시재생에 첨단 기술이 적용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어떠한 방법이든 혁신적인 도시공간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으면 된다. 셋째, 과감한 아이디어가 절실하다. 이대로 가면 경주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일부 구역을 활성화한다고 해도 그 효과를 전 도시로 확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간판을 바꾸고 보행로를 정비하고, 오래된 건물을 수리해주는 것과 같은 잽을 날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큰 한 방을 노리는 것이 중요하다. 현 추세로는 인구는 줄고, 젊은이는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도심 내부 전체를 차 없는 곳으로 설정하고 보행과 자전거, 스마트모빌리티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지금 시내 중심상가 지역 일부를 주거지역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물론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이다. 여느 지자체에서도 시도되지 못했던 것을 경주시가 전국 최초, 세계 최초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 기고에서 자세한 방안을 설명할 예정이다.) 경주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걱정이 있다. 원도심에 살던 이들은 대부분 시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빈 가게는 늘어나고 외지인만 넘쳐난다. 자꾸만 비어가는 과거의 번성했던 곳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느낌이다. 뭔가 혁신적인 것이 필요해 보인다. 내년도 도시혁신박람회에서는 도시재생에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분야가 힘을 합친 성과로 전국을 놀라게 할 혁신적인 사례가 소개되는 순간을 개인적으로 상상해본다.
이태원 참사를 듣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착잡하다. 안타까운 현장이 반복되어 보도되는 만큼 그 현장에 있었거나, 혹은 변을 당한 이들의 부모나 형제, 친척의 마음들이 사무치게 다가와서 며칠 복잡하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에 대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동질감을 느끼는 대한민국으로 더더구나 남의 일이 아니다. 사후 약방문이라고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고, 사고 책임자를 색출하려는 시도 또한 만만찮다. 필자는 이 논의에서 좀 벗어나 핼러윈데이가 우리 문화로 정착되어 가는 듯한 분위기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생소한 듯하면서 생소하지 않은 핼러윈데이, 도대체 어떤 날이기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며 기쁨에 넘쳐 거리로 달려 나가게 했다는 말인가? 한 나라의 문화가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생각과 몸에까지 스며들어 무의식중에 그 문화 속에서 집단 혹은 자신만의 창조물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 문화 속에서 하나하나를 보면 매우 개성적이고 남과 다른 특별함을 느끼겠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공통분모를 이루며 거의 일치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문화다. 우리의 명절은 아름다운 문화로 기억되기보다는 어느 순간 제사, 노동, 시댁이라는 단단한 부정적인 키워드로 무장된 변화되지 못할 폐단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런 사고의 고착은 부부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부부 즉 남녀 간의 존중과 평등이 아닌 한쪽의 희생으로 몰아갔던 구시대의 잘못된 사고가 결국 명절을 기점으로 갈등이 폭발되고, 급기야 기성세대를 비롯하여 MZ 세대들까지 긴 휴가로 변질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핼러윈데이는 북유럽 켈트족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넘어간 켈트족 거주지역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미국 이민자들이 벌였던 소규모 축제가 점차 미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청소년과 MZ세대들이 핼러윈데이를 축제로 여기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Z세대들은 유아기의 교육기관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교육받고 자란 세대이다. 게다가 조기 학습 열풍은 영유아기에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도입하게 했고, 그 언어에 묻어 영어권 문화가 유입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는 10월 31일, 핼러윈데이가 공식 축젯날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퍼포먼스에 핼러윈데이의 가면은 매우 적합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 짐작된다. 거의 13~4년 동안 핼러윈 문화에 노출되고 즐기도록 교육기관에서 공식적인 날로 만들었다. 또한 사설학원에서의 핼러윈 축제 분위기는 더욱 화려하다. 사설학원의 의존율이 높은 우리나라로 볼 때 우리 아이들이 핼러윈데이가 우리의 축제처럼 여기는 것은 매우 당연해졌다. 생각해보자. 전국이 같은 날에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는 날, 흥분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된 주제가 되어 이야깃거리도 풍성하다. 재미도 있다. 이는 축제로 정착되는 요소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 존중과 함께 참여하기는 힘들지도 모르는 노동조차 행복한 축제의 시간으로 만들어 준다. 세계의 많은 축제는 많은 인원이 참여하고, 행사의 준비와 마무리, 그리고 많은 양의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므로 노동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축제들은 왜 없어졌을까? 흥이 많아 일 년에 24절기를 만들고 명절을 만들어 마을 단위, 가족 단위로 함께 하는 축제를 즐겼던 우리의 문화는 거의 사라지고 지자체에서 보여주기로 이루어지는 행사로만 남아 있다. 축제와 행사는 다르다. 축제는 같이 준비하고, 같이 참여하고, 같이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행사는 어떤 주관업체가 행사를 위해 대행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는 관객으로 동원되어야 하는 ‘사람들’ 일뿐이다. 우리의 축제가 사라지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기다려지고, 준비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는 축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슈만(R.A.Schumann/1810-1856)의 아버지는 출판업자였다. 그래서 슈만은 어릴 적부터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음악적 재능도 출중했다. 하지만 음악을 전공할 순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1826)하자, 어머니는 보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다.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수소문 끝에 비크(Wieck/1785-1873) 교수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맹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또래였던 쇼팽이나 리스트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른손에 마비가 왔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리한 피아노 연습이 그만 화를 부른 것이다. 슈만은 아쉽게도 20대 초반에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리고 작곡과 평론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슈만은 낭만주의 작곡가일 수밖에 없다. 그의 문학적 내공과 음악창작능력의 결합은 최고의 낭만주의 작품을 잉태해냈다. 그의 부친 덕분이다. 그리고 슈만은 음악신보를 창간(1834)한다(이 잡지는 현재도 발간되고 있다). 그는 이 평론지를 통해 신예음악가 발굴에 큰 공을 세웠다. 베를리오즈, 쇼팽, 브람스 같은 쟁쟁한 음악가들이 슈만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집경전(集慶殿)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을 뜻하며, 임금의 초상을 모신 공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용전(御容殿)․쉬용전(晬容殿)․태조진전(太祖眞殿)․집경전(集慶殿) 등으로 불렸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태조의 어진을 모두 5개 장소에 봉안하였으니, 송경(松京)의 목청전(穆淸殿), 서경(西京)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동경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이다. 사가 서거정(1420~1488)의「경주부객관중신기(慶州府客館重新記)」를 보면, 세종 때에 태조의 영정을 집경전(集慶殿)에 안치하였다고 전한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경주읍성 내 경주여자중학교 자리에는 집경전 터와 비석 그리고 하마비 및 여러 석물이 산재하였다. 비석에는 [崇禎紀元後三戊午四月日立]이라 각석되어 1798년 4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하마비(下馬碑)에는 [대소인원하마(大小人員下馬)]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경주읍성전도] 그리고 [집경전구기도]를 통해 그 위치와 규모를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 세종년간의 집경전 원형은 알 길이 없는 실정이며, 경주에 집경전이 설립된 배경은 아마도 역대 왕조의 도읍이었던 평양․개성․경주 등의 이점이 작용한 듯 보인다. 집경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동경통지]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하지만 조선후기의 기록이 지배적이며, 경주읍성의 객관 북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이 정론이다. 태조 7년(1398) 3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1341~1399)를 보내어 임금의 진영(眞影)을 계림부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유후사(留後司)에서 형조전서 이귀령(李貴齡,1346~1439) 등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태종 12년(1412) 11월에 계림의 어용전을 태조진전이라 고쳐 불렀다. 세종 24년(1442) 6월에 경주의 영전에 집경전 칭호를 내리고 각기 전직 2인을 두게 하고, 세종 25년(1443) 11월에 의성군(誼城君) 용(容)을 보내 태조의 수용(晬容:초상)을 경주 집경전에 봉안하게 하였다. 성종 25년(1494) 3월에 집경전 전사청(典祀廳)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임금의 초상을 관리하는 방식을 궁리하였으며, 이후 임진왜란에 강릉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전한다. 청허재(淸虛齋) 손엽(孫曄,1544~1600)의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보면, 8월 2일 참봉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1545~1607)과 함께 집경전에 모신 강헌대왕의 수용[초상]을 수운전에 임시로 봉안하였다(同參奉鄭士誠 權奉集慶殿康獻大王晬容于水雲亭). 8월 4일 수용을 모시고 예안으로 향하였다(陪晬容 向禮安). 8월 5일 죽장에서 묵었다(宿竹長). 8월 7일 봉사 이영도(자 성여) 서당에 도착해 오른쪽 방에 봉안하였다(到李奉事聖與詠道 書堂 奉安于西室). 이후 8월 14일 다시 수운정으로 돌아와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전한다. 왜놈이 쳐들어와 경주부가 위태해지고 태조의 수용 역시 화를 당할 지경에 처하자 참봉과 부윤 등은 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강릉의 집경전도 화재가 발생해 영흥의 준원전으로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강릉에 봉안하였고, 임란 이후 경주를 떠난 태조의 수용 역시 고초를 겪는다. 이때 이후부터 경주의 집경전은 건물이 소실되고 기능이 상실되어 공허한 적막감을 안고 경주읍성의 한 곳에서 지금도 쓸쓸히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정조 20년(1796) 11월에 집경전의 옛터에 문소전(文昭殿)의 예대로 비석을 세워 기록하라고 명하고, 1798년 4월에 집경전의 비각 건립을 감독한 경주부윤 류강(柳焵.재임기간 1797.07~1798.06)에게 표피(豹皮)를 내려주고, 장교와 공장(工匠) 등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라고 명하였으며, 11월에 비각을 완성하였다. 미뤄보면 집경전은 태조년간에 임금의 초상[어진(御眞)]을 모셨고, 세종년간에 집경전이 개수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양좌동 수운정과 예안을 거쳐 강릉으로 옮겨진 역사적 사실은 경주시민들도 알아야 할 문화상식으로 판단된다. 황량(荒涼)히 돌구조물만 남은 지금의 집경전 터에는 근거 없는 이야기만 무성할 뿐 태조의 초상화는 여전히 경주에 남아 있지 않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엄마들을 만났다. 나 역시 아이들 교육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고, 고민을 거듭하고 생각했다. 조카들을 키울 때부터 시작된 고민은 엄마가 되면서 점차 깊어졌고 절박해졌다. 많은 책과 강연, 자료들을 찾아다니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내린 나의 결론은 잘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줌마의 결론이 생뚱맞은가? 미래사회에 꼭 필요한 창의성과 융합, 공감 능력은 사람(친구)들과 만나고 놀면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람들과 밖에서 자유롭게 뛰놀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스마트 게임도 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놀이의 개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아줌마는 생각한다. ‘혼자 노는 게 노는 건가?’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할로윈의 기쁨을 만끽하려 이태원을 방문했던 많은 젊은 친구들이 어이없게도 생을 마감한 일이었다. 십대의 젊음을 오롯이 책상 위에서만 보내는 것을 추구하던 삶에서 20대가 되었을 때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래전, 나 역시 대입을 마쳤더니 어느 날 갑자기 20대가 되어버린 나이에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대학 신입생 때 즐겁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놀 줄도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이태원의 젊은 친구들 역시 그 놀거리의 목마름으로 갔던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맞벌이 부부라서 돌봄 공백으로 인해 학원으로 시간 돌려막기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엄마의 불안감으로 인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학원을 몇 개씩 다니고, 놀 시간은커녕 잘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도 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놀이는 창의적이다. 아이들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놀이기도 하다. 어른은 최소한의 안전지킴이로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간혹 놀이터에서도 스마트폰을 갖고 게임을 하며 미끄럼틀을 장악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면 아줌마는 한소리한다. ‘놀이터에서는 몸을 쓰고 놀자, 하고 싶지 않으면 의자에 앉아서 하면 좋겠다. 이곳은 다른 친구들이 놀아야 하는 곳이니까’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다른 집 아이에게 말하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줌마는 믿는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같이, 어른들이 같이 키워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한소리하는 아줌마로 살아간다. 또 그렇게 살다보니 쭈뼛쭈뼛하던 아이들도 선뜻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네고, 미끄럼틀 터널 위를 위험하게 올라갔던 아이들도 아줌마가 나타나면 슬그머니 내려온다. 자전거를 위험하게 타는 아이들을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보던 다른 어른들도 이제는 아이들을 불러 조용히 타이르신다. 처음에는 남의 집 아이에게 괜히 한소리했다가 얼굴 붉히는 일이 있을까 주저하셨지만 아줌마의 오지랖이 여기저기 생긴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놀이터에 나타나면 아이들은 위험한 행동을 주저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처음에는 기구를 이용해서 단순히 놀다가 아이들이 모이면 서로가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낸다. 한 어린아이가 울면서 소동이 일어나면 그 아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고, 어린아이들이 있을 때는 아이들이 같이 놀 수 있는 게임을 한다든가, 돌아가면서 동생들을 따로 놀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맡는 아이를 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것뿐만 아니라 창의적으로 두뇌를 쓰며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점을 모색하고 약한 아이를 배려하는 것까지, 결코 책상 위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발전시켜나간다.
쉬웠다, “고품격 서평처럼 쓰지 마시고요. 좀 쉽게 써주세요”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근데 어려운 숙제였다. 쉽고 재미있게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처음부터 책을 읽는 일이 즐거웠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본격적인 시작은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나보다. 여름 방학이라 공부는 뒷전이고 마을 개울가에서 노느라 얼굴 색깔은 까마귀와 비슷한 시절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멱감을 요량으로 보리밥을 미어터지게 넣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아침 먹었거든 같이 나가자며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학교로 갔다. 국민학교에서 근무하셨던지라 학교 도서관에 나를 내려주시며 집에 갈 때까지 책 한 권이라도 읽고 그 내용을 들려줘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고 고른 책이 앙드레 모로아의 ‘뚱보 나라 키다리 나라’였다.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같은 어린이 잡지, 그것도 만화로 된 별책 부록밖에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뚱보 나라 키다리 나라’는 거의 글뿐인 책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재미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소풍을 갔다가 우연히 바위 구멍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세계인 뚱보 나라와 키다리 나라를 방문하게 되며 겪는 뚱뚱한 형 에드몽과 날씬한 동생 체리의 모험담이 ‘뚱보 나라 키다리 나라’의 주요 내용이었다. 나이가 들고나서야 이 책에는 타인을 보는 시선, 외모에 대한 집착, 자존감, 전쟁에 대해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이해관계 등 많은 풍자와 위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작가도 같은 문고집에 단편이 실렸던 아나톨 프랑스로 오해하고 있었을 만큼 에드몽과 체리에만 푹 빠져 있었다. 비슷한 재미를 찾아 도서관의 독서 카드 뒷면을 메워가던 나의 독서 습관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책에 도통 취미가 없다는 아이들을 만나면 지금도 이 책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불행히도 절판되어 운 좋아야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책이 되어버렸다. 사람에게는 몇 개의 필터가 있는 듯하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불리하고 나쁜 것은 걸러버리는 필터, 걸러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세월의 필터 등등. 신영복 선생님은 ‘마지막 강의 담론’에서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므로, 남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고 설령 설득한다 치더라도 그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강의의 상한은 공감이라고 한 것 같다. 선생님이 담론에서 언급했던 노인 목수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분 성함이 문도득입니다. 길 도자, 얻을 득자입니다. 이름 때문에 도둑이 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왕년 목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집을 그렸습니다.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집 그리는 순서 때문이었습니다. 주춧돌부터 그렸습니다. 노인 목수 문도득은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키워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편견에 사로잡혀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는 순서가 지붕이 먼저건, 주춧돌이 먼저건 그리는 순서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나도 모르게 지붕부터 그리면서 다른 이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지붕부터 그려야 한다고 압력 아닌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지. 오늘 내 인생에서 생각나는 한 권의 책을 이야기하면서 “고품격 서평처럼 쓰지 마시고요” 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책을 아주 논리적으로 써보리라는 나의 엄큼함을 기자는 알고 있었던 걸까? 처음으로 돌아가 봤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게 된 계기는 그저 재미였다. 감동도 지식도 무엇도 아닌 그저 재미,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긴 결과물이었다. 내 인생에서의 한 권의 책 모르겠다. 그저 시작은 ‘뚱보와 마른보’였다. 변성희 한국관광정보정책연구원 원장
황실에 막중한 영향력을 가졌던 지통천황이 건설한 등원경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 평성경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성경(平城京) 천도를 둘러싸고 주의 깊은 배려가 있었다. 등원경(藤原京)을 폐기하지 않도록 했고, 또다른 조치로 새로운 도읍인 평성경(平城京)과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샤머니즘적 방안까지 강구되었다. 이것은 저승에 가 있는 지통천황의 노여움을 방지하는 일방, 그녀의 정통성을 대대로 승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80번가> 青丹 吉 寧樂 乃 家 尒 者 / 萬代 尒 / 吾 母 將 通忘 / 跡念 勿 “푸르고 붉게 화톳불이 켜진 평성경, 남녀노소 편안하리라. /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 등원경과 평성경을 왕래하는 수고로움을 생각지 않으리라. / 지통천황의 공적을 잊지않으리라”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작품 속 이 구절이 당시 천황가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도읍으로 옮겨 가며 그들이 행했던 주도면밀한 조치를 살펴본다. 천도를 하지만 등원경과 평성경 두 곳은 매우 가까운 곳임을 강조하고, 두 곳 중간중간에 수많은 집을 지어 마치 두 도시가 이어지는 것처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남녀를 선발하여 두 도시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토록 조치하였다. 이것은 두 도시가 한 도시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새로운 도읍 평성겸(平城京)에는 붉은 깃발을 매달아 놓도록 했다. 붉은 색은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이 임신의 난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군사들로 하여금 사용하게 했던 색깔이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이 붉은 색은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의 상징색이 되었다. 단절을 막고, 정통성을 잇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샤마니즘적 조치가 뒤를 이었다. 이로써 본 작품을 지은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통천황의 공적을 잊지않으리라.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지통의 후손들은 향가의 힘을 동원해 자신들만이 독점적으로 만대를 이어 황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 향가는 자신들의 염원을 이루어지는 마력의 힘을 가진 주술가였고, 황위를 보장했던 도구였던 것이다. 지통천황의 후예들은 향가의 힘에 의해 자신들이 황통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향가집이었던 만엽집을 만들고, 향가집의 힘으로 소원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고대인들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의 노래였던 향가는 한편의 작품으로도 천지귀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여러 편의 향가를 한 곳에 묶어 놓으면 향가가 가진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향가에서 8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80은 무한대를 말하는 숫자다. 만엽집의 만은 1만이 아니었다. 무량의 숫자였다.
-스위스 베른대학교 종합병원 할머니 의사 이야기 여행 중 자동차 파손 및 짐 분실 사고, 여권 재발급 등의 악재로, 우리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집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팠습니다. 7월 29일 스위스 베른시 주변에 있는 베른 야영장에서 몸이 아프다는 집사람을 데리고 베른대 종합병원을 찾았습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여행국(스위스)에서의 병원 진료라, 이리저리 물어 이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사위와 애들은 텐트에 남겨두고 딸과 내가 집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요. 어떻게 아픈지? 어떤 처방이 내릴지? 여행 중에 혹시 귀국까지(?). 갖가지 걱정이 앞섭니다. 병원 주차장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병원 하얀 선 구역에 차를 세우고, 부랴부랴 진료 수속을 밟았습니다. 여행 중 통역은 딸이 맡아 하고 있지만, 전문의료 용어에 대해서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우리가 외국인 관광객임을 알고, 친절한 언행에 쉬운 말로 우리를 편하게 해주었어요. -머리가 하얀 노인 의사와 간호사 팀 무엇보다 의사가 머리가 하얀 65세 이상 보이는 할머니임에 놀랐고, 더욱 놀란 것은 그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는 간호사 역시 의사와 비슷한 나이로, 의사와 간호사가 동 연배쯤 서로 화이트 칼라 머리여서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진료실 분위기도 좋고, 서로 소통도 잘되며, 우리에게도 할머님처럼 편했습니다. 초음파, 피검사, 기타 증상 등을 종합하여 결과 판단은 ‘뇨도감염’이라고 하며, 5일분 약을 처방해주었습니다. 여행 중 밥 짓고, 빨래하며 애들 돌보느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하며 의사가 딸을 대하듯, 주의사항과 약 복용에 대해 조곤조곤 친절하게 말해주었어요. 가벼운 증상이라 우리 마음에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진료실의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어요. 혈압, 조음파 검사, 피검사 등 검사 기능도 한국 같으면, 전문 검사실을 환자가 직접 찾아가서, 체크를 받지만 여기서는 담당 진료실에 전문기사가 관련 의료기구를 가지고 직접 와서 확인하는 게 특이했어요. 즉, 환자는 진료실 한 곳에 편히 두고 전문기사들이 움직입니다. 환자 편의주의 원칙을 잘 실천하는 것 같았어요. 3시간 진료에 900프랑(120만원) 정도였습니다. 진료비는 엄청 비싸지만 친절한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어요. 치료비도 500프랑은 현지 결제하고, 400프랑은 귀국 후 송금했으니, 친절한 할머니 의료진의 고마운 마음씨 덕분이었습니다. -스위스 한국대사관의 친절한 젊은 여직원 스위스 몽테르시 시옹성 관광에서 여권을 도난당해, 베른시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았습니다. 이틀 전 전화로 여권도난과 관련 재발급신청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관은 1963년 2월 설립되었습니다. 마침 베른시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문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뜰에는 무궁화가 피어 마치 한국 땅에 온 것처럼 가슴이 뭉클, 심란한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한국 여직원이 우리 여권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오전 한나절 동안 우리들의 신분 조회, 사진입수, 및 관계자료를 검토하고, 그것도 점심시간이 초과했는데도 여권 발급업무를 잘 끝내주었습니다. 공직자로서 자기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훌륭하거니와 동포의 어려움을 친절과 미소로서 감싸주는 그녀의 배려에서 순간 한국인임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여권 4개를 받아 나올 때, 창공에 펄럭이는 태극기는 당당하게 힘차 보였고, 정원에 핀 무궁화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설화는 구비문학으로 민중들의 일상적인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 내려온 서민들의 이야기이다. 설화는 민족의 전통사상과 가치관, 정서와 문화가 담겨있고, 전설과 민담도 설화에 포함된다. 또 설화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학으로 발전하여 민족의 스토리텔링의 자원이 된다. 우리나라 개에 관한 설화는 구전민담에서 시작하여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개에 관한 설화를 유형으로 구분하면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방독구주형(防毒救主型)·폐관보주형(吠官報主型)·수사부고형(守死訃告型)·수주해난형(守主解難型)·원로전서형(遠路傳書型)·산로개척형(山路開拓型)·폐적보국형(吠賊報國型)·변신제거형(變身除去型)·보은순사형(報恩殉死型)·환생축복형(還生祝福型)·수유구아형(授乳救兒型)·명당점지형(明堂點指型) 등이 있다. 경주지역의 개에 관한 설화는 내남이조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와 삼효각의 개 이야기 등이 있다. 최부자집 개 이야기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 유형에 속하고, 얼마 전에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다. 이번에는 경주 삼효각의 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삼효각의 개 이야기는 수시부고형(守屍訃告型)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경주 삼효각은 현재 오릉 왼쪽 편에 있다. 본래 나정 남쪽에 있었던 금광제(金光提,현재는 메워서 논이 됨) 위쪽에 1561년(명종 16년) 윤5월 21일에 효자정려(孝子旌閭) 받은 사실을 현창(顯彰)하기 위해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하였고, 1942년에 오릉 남쪽의 귀호 들녘으로 옮겼다가 1970년대 중반 오릉 확장 정비공사로 주차장 부지 내에 들어가면서 탑동 400-4번지인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겼다. 삼효각은 김응벽(金應璧, 참봉, 정려), 김응규(金應奎, 좌통례, 정려), 김응정(金應井, 인의, 정려) 삼형제의 효 행위를 알리는 문화재다. 삼형제의 효는 조선시대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경주(慶州) 효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삼강행실도』, 『동경잡기』, 『금오승람』, 『경주시사』, 『왕도경주』 등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삼형제과 키웠던 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 『동경통지』에 “김응벽(金應壁), 응규(應奎), 응정(應井) 세 형제는 우애가 돈독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세 형제는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시묘(侍墓)를 살면서 큰 비바람이 몰아쳐도 떠나지 않고 항상 단에 올라 곡(哭)하였는데 세 형제가 다녔던 길이 깊게 파일 정도였다. 하루 저녁에는 엄청난 비가 내리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려 세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 음성이라 놀라서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잠시 후 또 그 소리가 들려 괴이하게 여기고 신주(神主)를 안고 함께 나와 주위를 살피는 찰나에 여막 북쪽 산 좌우가 붕괴하여 여막을 덥쳤다”한다. 시묘살이 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이 개는 시묘살이는 하는 삼형제의 집안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였다. 개의 목에 삼형제의 편지를 매달아 집으로 보내면 개가 알아듣고 삼형제의 집을 오고 가면서 시묘살이 사정을 전달하였고, 집에서도 역시 개의 목에 편지를 매달아서 시묘살이를 하는 삼형제에게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달하였다 한다. 이 개를 동네에서 신춘(神春)이라 불렀다. 삼형제는 시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침과 저녁으로 반드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건하게 한평생 가묘(家廟)에 참배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전하며 이 사실을 나라에서 전해 듣고 명종 16년(1561)에 정려(旌閭)하였다. 이 기록은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 윤5월 21일 경술 2번째 기사 1561년 명 가정(嘉靖) 40년 유학 김응벽(金應璧)을 포장하다는 기록이 있다. 幼學金應璧 【慶州人。 性本純厚, 兄弟友愛, 相與和樂, 以養父母。 其遭喪, 一遵古制, 應璧親負土石以葬。居廬之日, 霖雨浹旬, 一夕有聲, 自父墳呼應璧者三。 應璧聞聲驚動, 上墓彷徨之際, 北山崩,壓廬舍。】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남산 서편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과 신라 첫 궁궐터인 창림사지,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 이곳 서남산 자락이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시작한다. 월성 서쪽 끄트머리 서문 터를 빠져나와 월정교를 건너면 도당산을 마주하게 된다. 도당산은 남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끄트머리에 나지막히 솟은 산이다. 1976년 경주 IC와 도심을 잇는 서라벌대로가 개설되면서 한때 남산과 단절되기도 했으나, 2016년 경주시가 끊어진 구간에 길이 80m, 폭 30m 규모의 생태터널(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계단 길을 따라 도당산 전망대에 이르면 화백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만난다. 경주시가 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신라 왕과 왕비가 남산으로 가던 도중 휴식을 한 곳이라는 전설을 담아 정자를 세웠다. 화백정과 도당산터널을 차례로 지나 산을 내려서면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남간마을이다. 월정교를 건너 도당산으로 오르지 않고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쳐 남간마을로 갈 수도 있다. 도당산 앞 이정표가 안내하는 ‘삼릉 가는 길’ 방향을 따르면 된다. 월정교 남단에서 700m 정도 떨어져 있는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로 널리 알려진 절터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회자되던 이야기를 설화 형식으로 엮어낸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1152~1220년)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천관신’(天官神)이 언급되고 ‘삼국유사’에도 ‘천관사’가 등장하는데다, 오늘날까지 천관사지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라 때 천관사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설화처럼 천관녀가 살던 집터에 ‘천관사’란 절이 세워진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과 천관사지까지는 거리가 500m 정도란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큰 인물 키운 땅…남간마을과 나정 남간마을엔 남간사지 석정(돌우물)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엔 보물 제909호인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는 남산이 배경처럼 솟아 있다. 이 근처 어딘가 있었을 남간사는 신라의 승려 혜통의 집이 있었던 터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남간사 외에도 이 마을은 불교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남간마을 일대엔 남간사를 포함해 예닐곱 곳 정도의 절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남간마을은 전체가 절터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덮개돌이나 석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자장율사(590~658년)의 집안도 이곳 남간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도록 건의했고, 울산의 태화강 입구에 태화사라는 절을 세워 신라의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양산 영축산 밑에 통도사를 건립해 국가적으로 승려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문무왕 재위 시절,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인 ‘문두루비법’으로 서해를 건너던 당나라 설방의 50만 대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고 전해지는 명랑법사도 이곳과 관련이 있다. 명랑은 앞서 언급한 자장율사의 조카다. 다시 말해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법승랑으로도 불린다)의 남동생이 자장율사다. 명랑의 두 형 또한 ‘대덕’ 칭호를 받은 덕망 높은 승려였다. ‘삼국유사’엔 명랑법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명랑이 당나라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천냥을 시주받은 뒤 땅 속으로 몰래 들어가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후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짓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다. 유난히 광채가 빛나 절 이름을 금광사라고 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남간사지 석정이 명랑법사가 솟아나온 우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동네가 남간부인과 연관돼 ‘남간’이란 마을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고, 몇 가지 석조유물이 나온 인근 한 연못(금강못, 또는 금강저수지) 부근이 명랑법사의 출생지이자 금광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 ‘나정’이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엔 창림사지가 있다. 신라의 첫 궁궐 자리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물 제1867호인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이 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신라 탑의 주요 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탑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 조각이 유명하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 등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국내 석탑 팔부신중 조각으로 인정받는다.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가 1976년 사라진 부재를 일부 보강해 복원됐다. -길에서 만나는 신라 말 비운의 왕들 창림사지에서 남쪽으로 600m쯤 가면 포석정을 만난다. 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곳에 남아있다. 927년 후백제가 경주로 쳐들어왔을 때에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다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삼릉 가는 길’ 위에 모두 있는 셈이다. 인근엔 보물 제63호인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다. 신라시대 가장 오래된 불상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세 부처는 얼마나 복스럽게 생겼는지 보는 사람의 입을 자연스레 미소 짓게 만든다. 가까이에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달을 바라보는 절’이란 이름이 인상적이다. 절 안에 세워진 작은 육각형 대명전 건물 안에 선덕여왕 위패를 모신 점이 특이하다. 망월사를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한 숲에 접어들면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삼릉을 만나게 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다. 인근엔 경애왕의 무덤이 있다. 아달라왕을 제외하고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모두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절의 통치자들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신덕왕 통치 시절엔 천재지변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봄이 한창인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잦은 해일과 떼로 몰려든 까치와 까마귀 탓에 백성들이 힘들어했다고 전한다.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왕은 기울대로 기운 나라를 어렵사리 떠받치고 있던 왕이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지고 외세의 침입 앞에 망해가던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허울뿐인 군주였다.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던 경애왕 또한 아버지와 형처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왕건에게 굴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후백제의 실력자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함께 있던 왕비와 후궁들은 후백제군에게 능욕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 김운 역사여행가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달 31일 도의회 의장, 도교육감, 도의원, 공공기관장, 소속 간부 등과 함께 도청 동락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경북도는 이태원 사고 발생 상황을 접하고 곧바로 도청 동락관 1층에 합동분향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이철우 도지사는 “사고 소식에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참담했다”며 “이번 참사에 깊은 애도와 위로를 표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철우 도지사는 30일 사고 소식을 접하고 이태원 사고와 같은 사례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각종 축제 행사 등에 대한 특별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애도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합동분향소 설치를 지시했다. 분향을 마치고 이 지사는 이번 이태원 압사 사고 및 봉화 광산 매몰사고와 관련해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지역 축제와 민간 행사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고, 봉화 광산과 같은 다른 사업장도 특별점검 실시하라”며 “더 이상 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히 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경북도는 11월 6일까지를 특별안전점검 주간으로 정하고, 현장 중심 민관합동 안전점검반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장소를 중심으로 시설안전 점검 등을 펼친다. 또 이 기간에는 기관장(지자체장, 공공기관장)이 직접 현장 점검에 나서도록 했다. 또 도민분향소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 운영한다. 이 기간 도민 누구나 분향소에서 헌화·분향이 가능하다. 아울러 국가애도기간(11.5) 중에는 전 공공기관에서 조기를 게양하고, 전 공직자에 대해 검은 리본을 패용케 하고 복무관리도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 회의를 마친 이철우 도지사는 곧바로 봉화 광산 매몰사고 현장을 찾았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철우 도지사는 소방본부로부터 사고와 관련해 브리핑을 받고 매몰자 수색 상황을 점검했다. 이철우 도지사는 수 일째 구조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격려하며 “도민의 생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달라.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매몰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모든 장비와 인력, 행정력을 동원해 구조에 임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지난달 26일 봉화 아연광산 제1수직갱도에서 매몰 사고가 발생하면서 조장 A씨와 보조작업자 B씨가 고립된 상황이다. 1일 현재까지 기존 구조 작업과 별도로 고립된 광부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있으나, 갱도 안에 크고 작은 암석들이 쌓여 진입로 확보가 어려워 매몰 광부들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