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중심으로 ‘SMR(소형모듈원자로) 특화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와 주목된다. SMR 중심의 혁신 생태계 구축과 활성화를 통해 국내 원자력산업의 제조 및 시공 분야 중소·중견기업을 경주로 모으고, 기술개발과 해외진출을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은행 포항본부는 지난 6일 포항시의 배터리 소재와 재활용산업 및 경주시의 SMR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산업 육성방안을 모색하는 조사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형 SMR이 개발에 성공하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산재한 산학연 기술개발 역량을 SMR 혁신 산업단지로 결집하고,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국가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또 연구개발 및 경쟁력 강화 로드맵을 세우고 개발 초기 단계부터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설계, 제작, 시공, 플랜트, 중공업, 계측제어 분야 민간기업과 전문기관이 개발에 참여해 긴밀한 상호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협조를 기반으로 SMR 개발 선진국이나 향후 도입을 고려중인 국가와 네크워크를 구축하고,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해외 협력방안 수립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은행 포항본부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경주지역에 SMR의 연구개발과 공급망을 중심으로 핵심산업 육성을 위한 중장기 방향과 세부 전략을 제시했다. 세부 추진 전략으로 먼저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전력기술, 한국원자력연료,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관련 기관을 연계한 플랫폼 구축과 연구개발 빛 실증, 상용화 과정을 지원할 앵커기관의 설립 또는 유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원자력 안전문제의 현장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원자력안전위원회나 원자력안전재단의 경주유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2025년 완공예정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를 SMR 연구개발 거점화하고, 앵커기관은 산학연의 유기적인 협력 네트워크 구축, 정책수립 지원, 실증 및 인허가, 상용화 등을 지원하는 전담기관이 돼야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세부전략으로는 중소규모 SMR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과 전문인력 양성을 꼽았다. SMR 관련 기업에 투자하고, 향후 상용화 시 신규 건설 지원을 위한 장기적인 자금조달 방안 수립이 필요한만큼 SMR혁신펀드 조성 및 투자방안도 제시했다. 임팩트 투자, 사회성과연계채권, 지역개발금융 등 사회적 금융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안한 것. 한은 포항본부는 경주 SMR 특화 혁신클러스터의 청사진도 제시했다. 경주 SMR 특화 클러스터가 향후 SMR 등을 활용해 생산된 전기로 수전해 방식의 그린수소를 생산하고, 생산된 수소는 포항 수소연료전지발전 클러스터, 울산 수소산업과 연계돼 차세대 에너지 광역 클러스터로 확대 발전된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특히 경주지역은 향후 SMR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을 육성해 지역 신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및 성장 거점으로의 역할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편 경주시는 정부 국정과제이자 윤석열 정부의 지역공약사업인 SMR 국가산업단지 유치에 행정력을 쏟고 있다. 경주시 감포읍에 조성하고 있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 배후 국가 산업단지인 ‘SMR(소형모듈원자로) 산업단지’는 3046억원을 투입해 150만㎡ 규모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24일 SMR 국가산단 지정을 위한 실사를 벌였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경주에서는 감포읍 일원에 국내 SMR 연구개발의 전초기지가 될 문무대왕과학연구소 건립사업이 지난해 7월 착공해 2025년 준공 예정에 있다. 또 월성원전 4기, 신월성 원전 2기 등 총 6기의 원전과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고준위 임시저장소, 한전KPS 등 원전 설계부터 해체까지 전주기 사이클을 보유하고 있어 SMR 개발 및 육성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특히 시는 국내 SMR 독자모델 개발을 위한 혁신형 SMR 기술 개발 사업이 정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해 내년부터 2028년까지 설계, 인허가를 비롯한 개발 등이 가능하도록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선친의 뜻을 따라 은행나무숲을 가꾸어 왔습니다. 덕분에 이곳이 전국적인 명소가 됐고 지역 주민들도 조금의 혜택을 받고 있죠. 하지만 저는 주민들의 조망권(일조권), 토지 매입 등 피해보상 요구로 많이 지쳤습니다. 오로지 마을에 도움이 되고자 매년 수익도 없이 사비로 은행나무숲을 가꾸어 왔는데 주민들에게 피해보상 등 비난까지 받으니 자괴감까지 듭니다” 도리마을 은행나무숲을 가꿔 온 소유주 김 모 씨는 수년간 주민들의 민원으로 속앓이하고 있다. 그는 민원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가꿔온 은행나무숲을 모두 베어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을철 단풍 명소로 주목 받는 도리마을 은행나무숲이 주민 민원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도리마을 은행나무숲 주변 주민들은 은행나무로 일조량 부족으로 작물 피해가 있다며 소유주에게 은행나무 벌목 등 민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또한 민원 제기와 함께 인근 농지에 대한 수년간의 보상액을 지불하라며 현 시세보다 높은 토지 매입을 요구해왔다. 소유주 김 씨는 지속된 민원으로 올해 초 은행나무숲 일부를 베어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은행나무숲 중 주변 농지와 가까운 500평 등에서 은행나무 1000여 그루가 잘려나간 것. 그는 “잘려나간 나무는 수령이 50년 가까이 된 나무가 많았다. 특히 숲이 곡선을 이뤄 포토존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던 숲이었다”면서 “아름다운 숲이 사라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원으로 어쩔 수 없었지만 심고 가꾸고 벌목하는 것 모두가 비용이다. 은행나무숲 조성으로 수익은 하나도 없지만 비용에 민원까지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숲 사라지면 공영주차장, 둘레길 등 조성 ‘무용지물’ 우려 민원이 지속되자 소유주는 은행나무숲 전체 벌목까지 고민하고 있다. 도리마을 은행나무숲 조성으로 주민에게는 소득 창출의 기회로 이어지고 있다. 7000여평에 8개 군락지로 이뤄진 은행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면서 지역 주민들은 농산물 직거래와 먹거리 장터 운영 등을 통해 수익에 보탬이 되고 있다. 또한 지역 땅값도 덩달아 오르면서 은행나무숲이 지역 중요 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소유주는 아무런 소득 없이 수십 년을 관리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민원까지 제기되자 은행나무 벌목을 고심하고 있다. 소유주 김 씨는 “민원으로 매년 벌목하는 곳이 늘어난다면 결국 은행나무숲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보상금 등 민원이 지속된다면 차라리 숲을 모두 없애고 수익 사업으로 전환하겠다”고 말했다. 은행나무숲이 사라지면 시가 조성한 은행나무숲 연계 사업도 타격을 받게 된다. 시는 도로마을 은행나무숲에 관광객이 몰리자 관광객 편의 등을 목적으로 도리1리 공영주차장을 2020년 완공했다. 토지 보상비와 공사비 등 5억2000만원을 들여 만들었지만 은행나무숲이 사라지면 공영주차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된다. 지역 주민은 “주차장은 주말 관광객이 아니면 텅 빈 곳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은행나무숲이 사라지면 경주시장의 민선 7기 주요 공약사업인 심곡지 둘레길 조성도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심곡지 둘레길 조성사업은 예산 55억원을 들여 길이 2.5km의 둘레길과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과 연계해 명품 둘레길로 만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지자체, 사유재산 지원 사례 검토 중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되자 소유주 김 씨는 지난해부터 이러한 사실을 경주시에 알리며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시는 피해를 제기한 주민 농지를 매입하는 등 민원 해결을 약속했지만 결국 아무런 대책이 없어 결국 은행나무 벌목으로 이어졌다. 최근 도리마을 은행나무숲 민원 요구가 커지자 시는 소유주와 면담을 통해 민원 해결에 나서고 있다. 시는 7000여평에 50년생 은행나무숲 조성으로 유명 명소로 부상했으나 마을 주민들의 보상금 요구로 관리 어려움을 겪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소유주가 제초와 가꾸기 사업 등 관리비용 증가와 함께 민원 증가로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커져 숲 위탁관리 등을 요청해 왔다”면서 “사유재산을 공적 관광자원으로 매입한 사례가 있는지 사례를 검토하는 등 민원발생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경주학포럼이 6일 하이코에서 ‘경주·포항 형산강 경제권 구성과 활용방안’을 주제로 추계 학술발표회를 연다. 행사는 ‘지방도시 상생협력 비전과 과제’와 ‘경주‧포항 형산강 경제권 구상과 활용방안’이라는 주제발표 후 종합토론 등이 진행된다.주제발표는 신상구 경주학포럼 회장의 기조발표를 시작으로, 장..
‘동학기념관 및 교육수련관’이 지난 2일 개관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동학기념관은 경주시가 동학발상지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경주시는 수운 최제우 선생 생가 복원을 비롯해 근대사상의 뿌리인 동학을 재조명하고, 동학발상지 경주를 한국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상 정립을 위해 추진했다. 133억원 예산을..
단청현대미술작가 김서한 저의 작품은 단청에서 사용되는 색을 사용하여 어울림 또는 대비 등 색상의 재배치로 재해석을 하고 전통적인 색상을 현대적 시공간으로 끌어내어 전통의 색깔과 현대적인 건물의 어울림을 한 시간 속에 표현하는 작업입니다. 강한 농묵의 먹선은 정돈된 도시적 표현과 각각의 색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원색의 색상은 보색대비 채색하여 색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각적인 기운을 표현하였습니다. 채색과 먹선의 사이에 흰 경계를 두어 명암표현 대신 공간과 거리감이 느껴지게 표현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표현하여 관람객의 시선에서 높이 있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현재 작품들은 계획도시, 붉은지붕의 마을, 태양을품은도시, 하얀벽과 붉은지붕, 따듯한저녁 등의 시리즈 작품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강한 원색의 채색으로 인해 화사하고 밝게 감상하기도 하고 현대의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짙은 먹선의 강한 정신과 색상에서 주는 따듯하고 평온함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야말로 화수분처럼 새로운 가수들이 매스컴을 통해 등장한다. 전문 소속사가 연습생을 육성해 신인 가수를 데뷔시키는 일도 있지만 근래에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가수들이 배출된다. 십여 년 전부터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아이돌을 뽑는 프로그램에서부터 특정 장르인 힙합, 남성 사중창, 트로트, 합창까지 장르도 다양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들이 몇 년 혹은 십여 년 동안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오디션에서 일등을 한 가수 중에는 처음에는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잊혀져가는 이도 있고, 어떤 가수는 순위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여러 장의 앨범을 내고, 성공 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어떤 가수는 금세 잊혀지고, 또 어떤 가수는 오래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걸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후자는 다른 누군가를 쫓기보다 자신만의 개성을 가졌고 그 고유한 매력을 계속해서 발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가사와 독특한 목소리로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며 롱런하는 가수로 악동뮤지션, 장범준, 볼빨간사춘기 등이 떠오른다. 이처럼 자기 색을 갖고 꾸준히 노래하는 가수들의 모습은 침체기에 빠진 서예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시각예술 장르 중 가장 보수적인 서예는 현재에도 옛 대가들의 글씨를 그저 따라 쓰거나 작품의 내용 역시 현재와는 무관하게 중국 당나라 시(唐詩)나 부(賦), 시조, 한글 가사 등 전통의 것을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전신인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에 시작되었다. 약 100년 전에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중 서예 파트를 살펴보면 현재 인사동 등지에서 열리는 서예 전시의 도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흡사하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서예는 형식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봤을 때도 우리나라의 서예는 재료와 매체, 내용 등에서 전통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글씨를 쓴다고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서양화나 조각 등 다른 예술 장르는 치열한 시도 속에서 상당한 변화와 혁신을 이루었다. 서예가 옛 것을 규범으로 삼은 예술이라고 하지만, 그 전통을 너무 좁게 해석하여 자신의 선생만을 답습하고 있지 않을까? 자문해본다.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은 어려운 한문을 내용으로 담은 서예 작품을 현대인들이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변화된 시대에 맞게 서예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예를 기초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현대작가로 중국의 쉬빙(徐冰, 1955〜)이 있다. 그는 한자 조형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어 알파벳을 만들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을 대형화했다. 예술계의 원로들은 아무도 읽지 못하는 문자의 탄생과 그의 대형 작품을 혹평했으나, 의미를 뺀 그의 문자 작업은 형상만으로 작품의 아름다움을 전달했으며 감상자는 글씨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국의 서예가 현대 미술계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작가는 전통을 충분히 숙고하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담은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 쉬빙은 전통을 존중하되, 그것을 분해해 이전에는 없던 조합을 꾀했고 이러한 그의 제작 방식과 개성적인 작품은 현대 미술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개성을 찾고 구축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주변의 비난과 혹평 속에서도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서예에서 글자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글자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색을 찾는 것은 서예에만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각자가 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고, 경주라는 도시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경주는 옛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된 독특한 공간이다. 경주를 개발할 때 우리나라의 다른 도시나 외국의 관광도시에서 진행된 사업을 무분별하게 벤치마킹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경주는 경주다워야 한다. 경주가 자신만의 색이 선명해져 그것을 오롯하게 보여주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진우 님이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이번 호를 끝으로 칼럼을 그만둡니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밝혀 주셔서 고맙습니다.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는 경주 봉황대(125호분) 남쪽의 지름 16m정도 되는 소규모 원형 고분을 발굴했다. 금관의 드리개에 방울이 달려 있어서 무덤의 이름을 금령총(金鈴塚, 127호분)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약 1500년 전인 5세기 말~6세기 초에 살았던 왕자(?)로 여겨지는 5~6살 ‘알라(童)’로 추정되었다. 그것은 나무관의 크기, 금관의 크기, 금허리띠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작아 잠든 주인공의 키는 90~100㎝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고분에서는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토기)도 2구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는 2023년 4월 중순까지 어린 영혼의 길동무란 수식어를 달고 ‘딸랑딸랑 금령총 이야기’ 특별전을 열고 있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부지를 발굴할 때 10m 깊이의 통일신라시대 우물 속에서 동물 뼈, 과일 씨 등과 함께 10살 전후의 ‘알라(童)’ 뼈도 수습되었다. 문득 트로트(trot) 제목처럼 ‘니가 왜 거기서 나와’가 머릿속에 맴돌기 충분했다. 1000년이 지났어도 유골의 모습은 완전하였지만 왜 우물 속에 있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풀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제물로 희생되었다거나 실수로 빠져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갈리었다. 설마 신라인들이 ‘알라’를 제사의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목이 말라 허리를 구부리고 두레박을 올리다가 그만 곤두박질쳤을까? 발굴을 통해 드러난 신라시대 두 ‘알라’는 짧디짧은 생을 살고 요절하였기에 가슴 아프다. ‘알라(童)’라는 말은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에서 쓰는 토속어로 어린아이를 일컫는다. 한반도 북쪽으로 갈수록 ‘얼라’에 가깝게 발음한다. 반면에 ‘알라(Allah)’는 이슬람교의 유일신이다. ‘알라(童)’는 곧 ‘아동(兒童)’이다. 나이로는 유치원에 다닐 나이인 6세 정도에서 12~13살까지의 어린아이이며, 신체적이나 지적으로는 미숙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법률적으로는 아동복지법에서 18세 미만의 사람을 이르고 있다. 같은 뜻의 ‘어린이’가 있지만 최근 들어 어른이나 성인에 대비된 낮춤말이라 하여 ‘아동’으로 바꾸어 부르는 경향이 있다. 저출산 시대를 맞아 경주도 이미 인구소멸도시에 포함된 암울한 시기에 ‘알라(童)’를 ‘알라(Allah)’신처럼 받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경주는 지난 5월 유엔아동기금 즉, 유니세프(unicef)로부터 ‘아동친화도시’(CFC:Child Friendly City)로 인증받았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CFC인증을 받은 도시의 수가 지금까지 80개이며, 인증을 받기 위해 추진 중인 지자체가 36개나 되니 인증받기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경상북도 내에서 현재 인증받은 지자체가 경주시와 더불어 구미시, 영주시, 칠곡군 등 4개 시·군에 불과할 정도로 이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의 의미는 크다. ‘아동친화도시’는 유니세프가 지방자치단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시 또는 지역 거버넌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그램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비차별원칙(제2조), 아동 최선의 이익(제3조), 생존과 발달의 권리(제6조), 아동의견 존중(제12조) 등 4가지 일반 원칙을 기반으로 아동권리 보장에 필수적인 10가지 구성요소를 갖춘 지역사회를 아동친화도시로 인증하고 있다. 또한 정기적인 영향평가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의 성과를 파악하고 아동권리 증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도록 촉구한다. 경주시에서도 전담 부서를 두고 ‘아동’이 우대받도록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널리 자랑할 만하다. 그동안 시민, 아동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시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11월 중순에는 경주시청에서 ‘경주시 아동정책 토론회’도 열었다. 당사자인 아동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의 원탁회의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이를 반영하여 아동친화도시 경주로 더욱 우뚝 서고자 하는 도약이었다. 여기서는 아동을 위한 정책수립이나 시설물 설치시의 의사결정에 아동의 참정권을 달라거나 어른의 생각으로 아동을 위한다는 명목의 결정을 하지 말아 달라는 의견도 있었다. 경주시 주민등록 인구통계로 올 10월말 현재 인구가 25만명 아래로 떨어졌다.(249,928명) 법률적으로 아동에 해당하는 0∼18세까지의 인구 비율은 13%(32,466명)이며,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4.6%(61,478명)이어서 UN 분류기준으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20%)에 접어들었다. 노인에게 집중되다시피 한 복지정책의 일례는 경로당 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청에서 관리하는 공영 경로당이 633개에 이르고 미등록 경로당도 70개소나 되며, 이들 시설은 모두 실내 공간을 둔 건축물로 쉼터나 운동·놀이시설은 제외된 숫자다. 반면 어린이 놀이터는 자체 관리하는 아파트 구내 놀이터를 제외한 공영 놀이터 수가 65개소에 그치고 있을뿐더러 모두 실외 노천공간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경주시 직영으로 공동육아 나눔터를 6개소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취학 아동으로부터 2세까지의 아동과 보호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실내시설로 참여형 체험 프로그램과 성장 단계에 따른 놀이 프로그램, 부모교육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구소멸도시이자 초고령도시 경주는 이제 아동친화도시에 걸맞게 아동을 신처럼 받드는 정책을 펼쳤으면 한다. 우선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해 마음껏 놀 수 있는 안전한 실내 놀이터를 확충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주시가 2023년도 본예산 1조8450억원을 편성해 제출한 가운데, 경주시의회 예산안 심사가 시작됐다. 경주시가 제출한 내년도 본예산은 올해 1조5650억원보다 2800억원(17.9%) 증가한 규모다. 지난 2020년 1조4150억원, 2021년 1조4895억원, 2020년 1조5650억원으로 증가해온 것을 감안하면 역대 최대 증가 규모다. 경주시의 당초예산이 1조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 2015년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8년만인 2024년엔 본예산 2조원 시대를 열 전망이다. 경주시는 내년도 예산안이 17.9% 늘어난 것은 재정분석과 보통교부세 및 국·도비가 크게 증가한 결과라고 했다. 시는 내년도 예산은 민생경제 회복, 코로나19로 나빠진 지역경제 활성화와 위기극복을 위한 핵심정책 전략 T/F 사업 등에 중점을 두고 편성했다고 한다. 시가 편성한 예산안을 각 분야별로 보면 사회복지·보건 분야가 31%로 가장 중점적으로 편성됐다. 이어 국토지역개발·교통물류 15%, 농림해양수산 13%, 문화·관광 10%, 공공질서 및 안전·환경 8% 순으로 예산을 배정했다. 중점 사업별로는 핵심정책 전략 T/F 사업에 998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세부 사업으로는 서라벌 도심활성화 전략사업 194억원, 신라달밤 황금조명 갤러리 90억원, 서라벌 황금정원 프로젝트 34억원 등이다. 경주혁신농어업 전략사업으로 귀농귀촌웰컴팜하우스 70억원, 어촌뉴딜사업에 58억원 등 모두 193억원을 편성했다. 또 어르신 무료택시 운영지원 30억원, 중소기업 청년일자리 및 청년 창업 지원 41억원 등온가족 행복경주 전략사업에 255억원을 배정했다. 스마트시티 혁신 전략사업에는 경주페이 130억원, 버스정보시스템 확대구축 15억원 등 168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시의 예산안을 살펴보면 올해 본예산이 전년 대비 5.1% 늘어난데 비해 내년엔 17.9%로 크게 증가했다. 국·도비 증가에 따른 시비 부담 증가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특히 사회복지·보건 분야의 예산이 31%에 달할 만큼 전체 예산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국·도비 증가에 따라 시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자체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이 많지 않다는 의미도 포함돼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따라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등이 동시에 나타나는 3고(高) 현상으로 지역경제의 침체는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밥상물가가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삶이 녹록치 않고, 지역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도 위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경제의 위기로 경주지역 경제·산업분야도 예외 없이 고통 받고 있다. 경주시가 스스로 이 같은 위기를 벗어나기엔 한계가 있지만 경주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고, 지역 실정에 맞는 구체적인 비전과 사업을 추진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예산안을 상정하면서 내년 시정목표를 ‘더 큰 경주, 더 나은 미래’로 결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분야별 5개 추진 방향도 제시했다.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 도시 조성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첨단 신성장산업과 좋은 일자리 육성, 그리고 민생경제 활력에 역량을 집중한다고 밝혔다. 온 가족이 행복하고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살고 싶은 도시 조성, 젊은이가 돌아오는 부자 농어촌을 만들어 살맛나는 경주 만들기에 집중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또 쾌적하고 아름다운 친환경 도시를 조성하고, 편리한 교통망을 확충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열린 시정을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맞춰 무엇보다 민생안전, 지역경제 회복을 우선으로 균형, 혁신, 기회라는 시정가치를 실현하는데 예산을 적극적으로 편성했다고 밝혔다. 경주시의 계획대로 예산 집행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시민들이 삶의 질이 향상됐다고 체감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예산 편성과 집행의 효율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산안을 살펴봐야 할 경주시의회와 시의원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예산안을 꼼꼼히 살펴보고 낭비되는 부분은 없는지,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고 지적하고, 고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집행부가 선심성 예산을 편성한 것은 없는지, 불요불급한 곳에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는지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특히 경주시의 핵심가치에 부합되는지,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예산인지를 철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예산안 심사·의결은 경주시민을 대변하는 경주시의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자 책무다. 민선 8기 경주시의 성공이 경주시와 경주시민의 발전과 함께할 수 있도록 지금은 경주시의회와 시의원들의 활약이 필요할 때다.
경주최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은 경기 포천현 출신으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이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해 현감․직강․승정원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으며, 특히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등 시책을 비판하고, 민씨 일족을 비난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의병을 모집해 항일(抗日)운동을 하는 등 강직함을 종종 드러냈다. 게다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을 실천한 인물로 관직에 있을 때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물러나서는 노구(老軀)의 몸으로 의병활동을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진위대(鎭衛隊)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주로 재인․정읍․순창 등 호남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한 그는 68세 경자년(1900) 4월에 경기 포천에서 서호(西湖)의 정산(定山) 장구동(藏龜洞)으로 이사하였고, 5월에는 경주(慶州) 등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가족을 멀리 이사 보내고 고향에 혼자 남은 무료함을 달래고 겸사겸사 동쪽 지방의 벗을 만날 마음에 포천-가평-춘천[신재(信齋) 유중식(柳重植,1828~1905), 항와(恒窩) 유중악(柳重岳,1843~1909)]-홍천[이승조(李承祖)]-지평[양경환(梁景煥)]-거산[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1840~1918)]-원주[처가집]-제천-단계[인곡(寅谷) 강준회(姜晙會,1828~?)]-장담[유의석(柳毅錫)]-죽령-영주-안동[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1872~1951)]-영천-경주 먼 거리의 여정을 떠났다. 특히 유람에서 만난 인물들은 항일과 위정척사의 인물들로 춘천의 유중식은 명필로 이름났고, 종인들 가운데 의병장이 많았다. 항와 유중악 역시 위정척사를 실천한 인물이며, 홍천의 이승조는 이항로의 증손자, 지평의 양경환은 쇄국정책에 큰 공을 세운 양헌수(梁憲洙,1816~1888) 장군의 손자, 금계의 이근원은 이항복의 제자로 의병을 지지하였고, 강준회 역시 화서학파의 일원이고, 장담의 유의석은 삼종형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 가계를 잇고 의병과 항일에 가담하였으며, 안동의 이충호는 퇴계의 13대손이다. 아마도 최익현은 경유지에서 만난 인물과 유람의 목적 및 앞으로 의병과 구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면암집』의 연보(年譜)를 보면, “1900년 5월. 경주는 선생의 관향(貫鄕)으로, 항상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동도의 벗들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타향에 가족을 모두 보내고 더욱 다시 무료하여 마침내 포천에서 여정을 시작하였는데 문인 이장우(李章宇)가 따랐다.… 경주에 도착해 교촌의 종인(宗人) 둔차(鈍次) 최현식(崔鉉軾)을 방문하였다. 낭산서당(狼山書堂)에 올라 문창후 최치원 선생의 상서대(上書臺)를 살펴보고 여러 벗과 모여 강론하였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을 봉심(奉審)하고, 포회(浦會:갯모듬)에 가서 용산서원(龍山書院) 옛터를 찾았다. 문산서당(汶山書堂)에 가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양좌동(良佐洞)에 가서 침랑(寢郞) 이석희(李錫禧)를 방문하고,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또 옥산에 이르러 서원에 배알하고, 이병유(李秉裕)를 방문해 인종(仁宗)의 어필(御筆)을 봉심하고, 여러 현인의 옛 자취를 열람하였다. 한 달 남짓 고을 안 여러 명승을 유람하고 돌아오면서 대구를 경유해 종인 최정한(崔廷翰)을 방문하고, 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圭)을 방문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8월에 충청도 정산(定山)의 집에 이르렀다” 최익현은 대구를 거쳐 안동 도산서원에 들러 퇴계의 후손을 만나고 영천 신녕(新寧)을 거쳐 경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먼저 교촌마을의 독립운동가 최준(崔浚,1884~1970)의 부친인 최현식을 만났다. 경주최씨족보와 대동보 서문 및 충의당 기문 등을 적은 그는 낭산에서 자신의 뿌리인 최치원 선조의 자취를 찾았다. 옥산과 양동을 찾아 회재 선생의 후손과 유물을 직접 보았고, 경주의 도학(道學)에 대해 살펴보았다. 게다가 1725년 계림사화에서 사라진 우암의 영정이 모셔진 문산서당에서 우암을 배알한 일은 옛적 인산서원의 존폐에 관한 중요한 기록자료가 된다. 또한 경주 등지의 여정 이후 구동정사(龜洞精舍)에서 항일의 다짐과 도학에 대해 깊이 논의하였고, 말년에도 항일과 무능한 정부를 향한 성토는 계속되었으니, 유람이 비단 승경지를 둘러보는 여행의 목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물의 깊은 연관성이 있는 매개체로 인식된다.
인생 경험이 좀 쌓이고, 재테크 좀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 즈음부터 주변인들이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요청했다. 그때마다 아줌마는 같은 레퍼토리를 주절거린다. “그 분야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라”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지인이나 교육에 관심이 많은 엄마들, 동종업계 관련된 일을 하는 지인들에게 나는 언제나 책을 권유한다. 그 분야에 관한 좋은 책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다. 책을 읽고 오면 나와 대화가 좀 될 것이고 그러면 같이 의논을 하고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시간의 통계였다. 애쓰게 내 의견을 말해봤자, 지인들은 배경지식이 없어서 내 의견을 못 알아먹거나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요즘엔 유튜브 동영상에 검색만 해보면 여러 분야에 관하여 웬만한 배경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예전부터 말하지만, 동영상은 순간 기억력에 도움이 될 뿐, 배경지식이 없는 내 안에 지식을 넣어주지 못한다. 시간 대비 효율성은 동영상이 뛰어나다. 그러나 장기적인 기억으로 남아, 내 것이 되어야 하는 배경지식을 만들기 위해 정보를 내 안에 쌓아야 할 때는 동영상이 유일한 방법으로는 안 좋다는 이야기다. 재테크의 경우,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려고 하는데,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 거시경제의 흐름과 금리는 기본으로 알아야 하고,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예측해야 한다. 이런 정보를 매번 결정해야 할 때마다 유튜브 동영상을 일일이 검색해서 찾아야 할까? 아니다. 거시경제의 흐름과 글로벌 경제 상황은 그 흐름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익힌 사람은 매번 자신의 본 유튜버의 의견을 따라갈 확률이 높다. 그러나 책으로 이 규칙을 익힌 사람은 더이상 누군가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흐름을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학원이나 과외와 비교한다면 동영상은 족집게 과외나 답안지인 빠른 방법이고, 책은 개념을 익히고 원리를 파악하는 느린 방법이다. 순간의 효과만 생각한다면 동영상 교육이 좋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기초를 닦지 않은 첫 번째 빠른 방법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유형을 조금만 바꿔버리면 개념이나 원리를 모르는 첫 번째 방법은 무용지물이 돼버리고 만다. 입 아프게 아줌마가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책 좀 읽으라는 소리다!!! 금수저는 아닌데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책 좀 읽어라! 경제 도서 한두 권 읽고 재테크 책 한두 권 읽으면 재테크 동영상 봐도 경험이 쌓이며 스스로 판단이 가능할 수준이 될 것이다. 교육, 인문, 언어,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석학이 말했다. “어떤 분야든 책 세 권을 읽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이 말도 아줌마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처음에 이 말을 읽었을 때, 아줌마도 반신반의했으나 내 지나온 경험이 답이다. 내가 읽은 분야의 대해서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삼십 대 초반 대학 지도교수님 파티에서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과 대화할 일이 있었는데, 쭈뼛하는 동문 선후배들 사이에서 나는 그 분야에 대해 질문을 해가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제주도 섬에서, 그것도 여자인(그 분야에 종사하는 여자도 드물고 관심을 갖는 여자는 더더욱 드물었기에) 나의 배경지식에 놀라워하셨다. 은사님은 전공도 안 살리고 연극을 하는 여자아이 정도로만 날 보셨기에 더욱 놀라워하시더니, 나중에는 네 덕에 면이 섰다고 어깨를 툭툭 쳐주셨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단 한 번의 경험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은 한 번뿐인 인생의 경험을 수십, 수백 배로 넓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책을 통해 수학자가 되기도 했고, 재테크 고수가 되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경제 석학, 하버드대 인문 강좌 교수, 역사학자, 작가는 물론 어느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각자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험과 결정의 순간이 있었고 그때마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 그들의 결정, 그 결정을 하게 된 배경과 결과. 책을 통해 무수한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값진 순간들이었다. 아줌마 잔소리 좀 한다! 책 좀 읽읍시다, 특히 엄마들!!!
리스트와 다구부인과의 관계는 리스토마니아가 절정을 이루던 1844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건 다구 부인이 리스트와의 일화를 소재로 쓴 소설 <넬리다>(1846)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귀족부인과 청년 화가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누가 봐도 다구와 리스트의 이야기인 줄 안다. 리스트는 1847년 러시아의 키예프에서 열린 자선공연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1819-1887) 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귀족 가문 출신인 비트겐슈타인은 자선공연에 거액의 기부를 했다. 다구 부인이 도도하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데 비해,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 리스트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스트는 순회공연을 중단하라는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조언을 수용하고 바이마르에 정착(1847)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듬해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취임(1848)한다. 바이마르 시절은 리스트에게는 황금기였다. 연주 말고 작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리스트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장르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만드는 걸 즐겨했다. 그가 무척이나 존경한 베토벤의 교향곡 9개를 모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절친형 베를리오즈의 걸작품 환상교향곡도 피아노곡으로 만들었다. 또한 동시대의 오페라(아리아)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이를 ‘패러프레이즈’라고 한다)하기도 했다. 당시엔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의 집에 피아노가 한창 보급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어야 하는 교향곡 또는 오페라 아리아를 피아노곡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탁월한 시도였다. 리스트가 단악장의 관현악곡인 교향시(symphonic poem)를 창시한 것도 이때다. 리스트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가톨릭이 이혼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남편과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청을 상대로 탄원도 하고, 로비도 했다. 결국 그녀는 1860년 혼인무효를 이끌어냈고, 이듬해 리스트의 50세 생일날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그러나 청천병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부인 남편의 역로비로 교황청이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리스트는 나이 50에 또 다시 크나큰 실연의 슬픔에 빠져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아들 다니엘(1859)과 장녀 블랑댕(1862)이 죽고, 차녀 코지마는 결혼 6년 만에 바그너와 불륜(1863)을 저지른다. 이때 리스트는 어릴 적부터 힘들 때마다 꿈꿔왔던 일을 드디어 실행한다. 수도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1863). 리스트는 동료에서 사위가 된 바그너와 결국 화해한다. 바그너 필생의 과업이었던 바이로이트 극장의 성공적인 건립(1876 개막공연)을 지켜보고, 그의 죽음(1883)도 목도한다. 3년 후 리스트는 유일한 혈육인 코지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다. 코지마는 아버지를 바이로이트 시립묘지에 모셨다.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그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8개월 후 사망한다.
며칠 동안 고민했다. 나에게 큰 영향이나 감동을 준 책이나 영화? 처음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책과 영화 둘 다 매우 좋아해 바로 여러 가지 책과 영화들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고등학교 때 내 용돈을 모아서 산 ‘와처스’, 전쟁 영화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흘렀던 ‘흐르는 강물처럼’, 고등학교 때 처음 단체 관람을 통해 본 ‘정무문’, 대학 입학 후 하숙집 친구들과 함께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불초자 열혈남아’, 아내와 처음 함께 본 영화 ‘선생 김봉두’, 모두 감명 깊었고 의미 있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무엇을 골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한 며칠 작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문득 거실 책꽂이에 있는 책들이 보였다. 그때 생각난 책 이름 ‘데미안’. “아 그래 ‘데미안’이 있었구나!” 그리 많진 않지만 내가 지금껏 읽은 책 중에 ‘데미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데미안’이 우리 집 거실에 있었고, ‘데미안’을 산 이유도 분명 있었다. ‘아! 이거 분명히 고등학생 때 읽었었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성장소설이었는데...’ 우연히 책방에서 사서 읽고는 지금도 우리 집 거실 책꽂이에 있는 소설 ‘데미안’이다. 그럼 이 책이 다른 책이나 영화에 비해 나에게 무슨 큰 영향을 주었는가? 그건 아니다. 읽는 내내 오히려 지루하고 왜 이렇게 표현들이 진부하지?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데미안이라는 책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곤 ‘역시 고전은 따분해’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데미안’을 선택했는가? 이유는 바로 나의 큰아들 때문이다. 올해 고2로 내년이면 벌써 고3이다. 이젠 정말 성인이다. 하지만 그런 큰아들에게서 아직도 너무나 많은 허점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 부족함 중에는 큰아들이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읽고 싶은 책은 없느냐? 독서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독서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별 흥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큰아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데미안’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책을 큰아들에게 권한 이유는 이 책이 성장기 소설이라는 것은 알기에 큰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이 책만큼은 큰아들이 꾸준히 잘 읽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말도 생각난다. 책의 내용 중에 무엇인가 자기와 비슷한 게 있다고, 그래서 무심결에 내가 한 말도 기억난다. “너도 데미안처럼 되면 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금 ‘데미안’이라는 책을 떠올려보니 내가 했던 이 말은 잘못된 것이었다. ‘데미안처럼 되면 된다’가 아니라 ‘너도 데미안이야’라고 했었어야 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동경했으나 결국엔 그 자신이 곧 데미안인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큰아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무슨 큰 변화나 깨달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로서 나는 기대해본다. 언젠가는 큰아들도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처럼 알을 깨고 나오리라고, 비록 알을 깨는 과정은 큰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아직도 여러모로 껍질을 못 깨고 있는 것 같다. 큰아들이 아니라 나부터 데미안을 정독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수환 씨 : 경주가 고향으로 경남 양산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극본을 직접 쓰고 배우로 활약하기도 하는 열혈 선생님이다.
천지천황의 후손들은 천무와 지통천황에게 빼앗긴 황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향가의 힘을 빌어 황위를 찾고자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지천황 측 인사들은 향가를 만들어 천무천황 후손들간 골육상쟁을 벌이기를 빌었다. 마침내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천무와 지통의 후손들은 골육상쟁 끝에 이리저리 갈라져 황위를 이을 후손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천지천황의 친손자인 광인(光仁)천황이 마침내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231번가> “고원산으로 가는 들가에 / 가을 능금 나무 열매가 열렸다가 흩어진다. / 바라보니 황위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고원산(高圓山)은 높고도 원만해야 하는 자리, 천황의 자리를 은유하고 있다. 고도의 암시법이 사용되어 있다. 그만큼 천지천황의 후손들은 감시 속에 살았을 것이다. 작품 속 ‘아(芽)’는 파자법으로 풀어야 한다. 芽=十十 + 牙으로 파자가 된다. 이십번을 어금니로 씹어 먹는 과일, 즉 능금을 말하고 있다. 추자(秋子)는 지통 후손들을 암시하고 있다. 늦가을 들판에 붉게 익은 능금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다. 언듯보아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러나 내용은 냉혹하다. 지통천황(=秋)의 후손들(芽子 능금 열매)이 골육상쟁을 벌여 서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황위를 지켜야 할 사람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232번가> “황자께서 삿갓쓰고 산으로 가네. / 들가로 난 길에 큰 구름이 끼어 있다. / 거칠어 오래 걸리는 나라 찾는 길” <233번가> “고원산 들가에 가을 능금나무 열매가 흩어지네. / 너희들이 흩어지니 황자님의 모습이 눈앞에 밟히고 또 밟힌다. / 슬픔에 눈물을 뿌린다” 천무와 지통의 후손들이 서로 싸워 황위를 지킬 사람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이제 천지의 후손인 지귀(志貴)황자가 나서 황위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여 이러한 때 그가 죽고 말아 슬프기 그지없다는 작품이다. <234번가> “삼립산(三笠山) 들가 따라 떠도는 머나먼 길. / 매우 멀고 거칠다. / 멀기로 소문난 곳” ‘매우 멀고 거칠기로 소문난 곳’이라는 구절 역시 황위를 되찾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한다. 삼립산(三笠山)은 ‘삿갓 쓴 세 사람이 갔던 산’이다. 세 사람은 천지천황 가족관계 표에서 찾아보면 천지의 아들 지귀(志貴)황자, 손자 광인(光仁)천황, 증손자 환무(桓武)천황으로 볼 수 있다. 이들 후손 세 사람은 부끄러워 하늘의 해(천무, 지통 천황 등)를 차마 바라 볼 수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뜻이 될 것이다. 황위를 잃은 천지후손들의 고난을 그린 수작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만엽집 권제2가 끝이 난다. 황위를 되찾기까지의 천신만고의 여정을 그린 작품들이 만엽집 권제2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향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우리의 향가는 그곳에서 일본 황실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경주 동궁원을 앞으로는 3D 가상세계 메타버스에서도 만날 수 있다. 동궁원은 주요 랜드마크인 식물원 외부와 음악분수를 실제처럼 구현한 가상공간 속에서 사계절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메타버스 제작을 완료했다. 메타버스는 가상·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아바타를 활용해 경제·문화·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가상세계를 뜻한다. 이용은 휴대폰 플레이 스토어에서 ‘제페토’ 검색해 어플 다운로드 후 제페토 어플에서 동궁원을 검색해 활용하면 된다. 글로벌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서는 유저들이 직접 아이템과 맵을 제작할 수 있고 셀카나 다른 아바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팔로우할 수 있는 기능도 있다. 동궁원 관계자는 “동궁원은 메타버스 외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으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지속 발굴해 방문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희망과 화합의 불빛 ‘2022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밝혔다. <사진> 경주시는 지난달 26일 구 경주역 광장에서 ‘2022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을 열었다. 점등식은 오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자 열렸으며, 종교적 의미를 떠나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뜻을 나누기 위해 마련됐다. 경주시기독교연합회(회장 김창식 목사) 주관으로 진행된 점등식에는 주낙영 시장을 비롯해 지역 기독교 관계자와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해 희망을 염원했다. 이날 점등식을 가진 트리 불빛은 내년 1월 초까지 역 광장을 환하게 밝혀 줄 예정이다. 주낙영 시장은 축사를 통해 “트리 불빛은 코로나19와 태풍 힌남노 피해로 힘들었던 올 한해의 어려움을 무사히 극복하고 이겨낸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불빛임 동시에 다가오는 새해를 맞은 소망을 담은 염원의 불빛이다”고 전했다. 이어 “내달 29일까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데 보탬이 되고자 외국인 이웃들에게 겨울 외투 나눔 운동을 펼치고 있다”며 “혹시 집에서 입지 않은 패딩, 점퍼 등이 있다면 기간 내 읍면동 행정복지센터로 많은 접수를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시는 구 경주역 일부를 활용해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조성한 ‘경주문화관1918’ 개관식을 2일 개최한다.
오늘날의 지구상에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인간이외에 인간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동물이 있다. 예전에는 애완동물이라 하였고, 오늘날에는 사람의 동반자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이 된 개와 고양이다. 이제 개와 고양이는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 깊숙이 들어와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급기야 사람이 사는 공간, 가장 안락한 공간의 주인이 되었고, 사람은 그 공간에서 밀려나 있다. 집안의 최고 존재가 되었다. 혼자 가정에서는 반려동물이 아들과 딸이 되어 있다. 아예 호칭도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누나, 언니로 되어 있다. 애견인에게는 혈연이 된지 오래 됐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님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에 빠지게 되면 백성을 돌보는데 소홀해질 수 있다하여 직접 키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임금님들이 완물상지(玩物喪志:애완동물 사랑에 집착하면 소중한 본심을 잃어버린다)의 의미를 망각하고 애완동물을 키운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세조는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으로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문종이 사망하자 어린 단종을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법당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대산에 위치한 상원사를 찾았는데, 이때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고양이가 막았다고 한다. 옷자락을 물고 늘어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세조는 곧바로 내부를 확인해 보라고 명을 내리고 그 결과 잠복해 있던 자객들이 발각되었고, 목숨을 구한 세조는 고양이에게 3품의 직을 내리고 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인 전홍대를 하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조 숙종(재위 1674~1720)에게는 퍼스트캣이 있었다. 고양이의 이름이 ‘김손(金孫)’ 혹은 ‘김묘(金猫)’라 하였다. 숙종대의 인물인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의 시문집 東圃集에는 숙종의 고양이 김묘를 읊은 글이 실려 있다. “궁중에 황금색 고양이가 있었으니 숙종 임금께서 사랑하여 김묘라는 이름을 내렸다. 김묘야! 하고 부르면 곧 달려오고, 사람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 김묘는 숙종 임금님과 함께 밥을 먹었고, 차가운 밤에는 임금님 곁에서 잠들었고, 비빈(妃嬪)들도 감히 고양이를 길들이지 못하였고, 임금님은 고양이를 지극히 사랑하셨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김묘는 식음을 전패하고 20일 동안 곡만 하다가 결국 죽었다 한다. 자신을 사랑한 숙종을 따라 간 김묘의 충성심에 감동한 인원왕후의 지시에 따라 김묘에게 비단 옷을 지어 입히고 수레에 실어,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 가는 길 옆에 묻었다 한다. 또 성종(재위 1469~1494)임금님의 동물사랑은 유별났다. 콩 400석에 해당되는 흑마포 60필 가격으로 낙타를 수입해서 키우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기도 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골매를 길렀고, 원숭이도 키웠고, 원숭이에게 흙집과 옷을 만들어줬다. 원숭이가 얼어 죽자 애달파 했다. 성종의 아들 연산군도 애완동물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궁궐 안에 매와 개(犬)를 키웠다. 이밖에도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1574~1609)도 “개와 닭, 오리, 앵무새 키우기를 좋아했다고『대동야승』에 기록되어 있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1735~1762)도 궁중에서 개를 키운 것 같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개 그림 중에는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김영삼 대통령을 제외하고 모두 반려동물을 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코커스파니엘, 박정희 대통령은 진돗개, 스피츠, 치와와, 전두환 대통령은 진돗개인 설이와 송이, 노태우 대통령은 요크셔테리아, 김대중 대통령은 풍산개인 우리와 두리, 그리고 진돗개, 삽살이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할 때 삼성동 주민들이 선물한 진돗개 두 마리 새롬이, 희망이와 진돗개 사랑이, 스피츠 방울이, 노무현 대통령은 진돗개, 보더콜리, 이명박 대통령은 진돗개, 문재인 대통령은 유기견 토리와 풍산개(토리, 마루, 곰이)와 고양이 찡찡이 등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키운 반려동물이다. 이제 반려동물은 21세기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고, 반려동물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직장인들은 연말정산에 관심이 많다. 연말정산은 급여소득에서 원천징수한 세액의 과부족을 연말에 정산하는 일을 말하며, 국세청에서 1년 동안 간이세액표에 따라 거둬들인 근로소득세를 연말에 다시 따져보고 실소득보다 많은 세금을 냈으면 그만큼을 돌려주고 적게 거뒀으면 더 징수하는 절차다. 경정청구제도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경정청구란 법인세와 소득세를 납부한 사업자가 과거 5년간 조세특례제한법에 규정된 각종 공제혜택을 놓쳐서 더 납부한 세금이 있는지를 검증해서 과납부한 세금이 있다면 돌려주는 정당한 제도이다. 이 경정청구는 국세기본법 제45조의2에 의거, 법인세, 소득세 등의 국세를 신고 납부 당시 자료의 불비, 세제혜택의 미적용 등으로 내야 할 세금보다 더 냈거나 잘못 낸 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제도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ㅇㅇ산업ㅇㅇ㈜은 요즘 주위에서 경졍청구를 해서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까지 세금을 환급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경정청구전문 세무법인의 의뢰를 받아 진단 받아본 결과 221만 원의 법인세를 환급받을 수 있었다. 이 회사 대표는 최근 갑작스런 원자재가격 금리상승 등의 영향으로 국내외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고 회사의 경영이 갈수록 힘든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목돈을 돌려받아서 회사경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좋아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국세청이 지난 5년 동안 세금을 과하게 부과했거나, 납세자가 잘못해서 세금을 중복해서 납부해 돌려준 세금이 30조 원이 넘었다고 한다. 연간으로 따지면 약 6조원 정도를 납세자가 더 납부한 셈이다. 5년간 환급받은 내역 중 경정청구로 16조 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만약 납세자가 청구하지 않았다면 돌려받을 수 없었던 셈이다. 이 경정청구는 납세자가 5년 동안 신청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청구권이 소멸되고 추가 납부한 세금은 국고로 귀속된다. 따라서 올 12월 말까지 경정청구를 신청하지 않는다면 5년이 경괴되는 2017년도의 과다납부한 법인세는 제척기간 만료로 더 이상 환급을 받을 수 없다. 한마디로 경정청구 권리도 영원히 소멸되기 때문에 연말이 가기 전에 진단을 받아보고 과다납부한 세금이 있다면 서둘러 경정청구신청을 하는 것이 좋다. 2017년 이후 문재인 정부시절 정규직 고용창출 지원제도와 전세계적인 경기호황으로 많은 회사들이 고용증대와 신규투자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요인이 경정청구를 해 보아야 할 요인들이다. 왜냐하면 경정청구 환급의 주요인은 고용증대세액공제와 사회보험료세액공제, 창업중소기업세액감면, 투자세액공제 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5년간 회사를 창업하거나 성장이 큰 회사일수록 경정청구를 통하여 세금을 환급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금리인상과 최근 부동산시장의 하락 등 국내외 경기침체가 길어짐에 따라 건설경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고 여기저기서 사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앞으로 전반적인 경기는 수년간 회복이 쉽지 않을 거란 전망도 많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지난 5년간 회사가 잘 나갈 때 많이 납부한 세금이 있다면 내가 낸 세금이 진짜 제대로 낸 것이 맞는지 이번 기회에 경정청구진단을 받아보고 더 납부한 세금이 있다면 정당하게 돌려받길 추천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반적인 경정청구사유는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소멸되므로, 특히 2017년도에 큰 성장을 한 사업자일수록 올해 안에 꼭 경정청구제도를 활용해 보길 바란다.
-슬로베니아 국경 시골 식당에서 8월 9일 오스트리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도중, 슬로베니아 국경쪽을 지날 때입니다. 애들이 배가 고프다고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일찍 출발한다고 아침을 설친 때문이며, 점심때가 가까워가고 간식꺼리가 변변치 않기도 했습니다. 본 도로에서 사이길로 빠져 어느 시골 마을에 들렀어요. 시골 구경도 하고 마을 식당에서 점심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슬로베니아(slovenia)는 발칸 반도 북서쪽 끝자락에 있으며, 우리나라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에, 인구 200만명쯤 됩니다. 사방으로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에 둘러 있으며, 나라 전체 모양이 닭의 형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유럽의 치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시골시장 옆에 있는 조촐한 식당에 들렀어요. 희끗한 머리에 텁텁한 식당 주인이 동양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 ‘사우스 코리아’라고 하니, ‘어디 있는 나라냐?’고 재차 묻습니다, 큰 손주가 지도를 내보이며, 우리나라를 가르켜 주어서야, ‘와! 멀리서 왔네’라고 하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한국인이 자기 식당에 온 것 감사한 일 한 가족이 유럽여행을 한다고 하니 부러운 듯 여기면서, 우선 배고파하는 애들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부지런히 요리를 만듭니다. 여섯 명의 식탁이 푸짐합니다. 맛도 있거니와 양도 많아요. 아무래도 식당 아저씨의 후덕한 선심이 많이 보태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여행인데 ‘제대로 먹고 다니겠어?’하는 표정으로 아저씨는 음식 접시를 부지런히 애들 앞으로 갖다 나릅니다. 음식값보다 애들 생각을 먼저 한 것입니다. 푸짐하게 잘 먹었으나, 은근히 걱정이 앞섰어요. 얼마나 나올까? 그러나 결제 시에 주문 가격 외에 추가분은 애들을 위한 서비스로 더 받지 않았습니다.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한국인이 우리 식당에 온 것만이라도 감사한 일인데, 오히려 자기가 더 고맙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로 가는 본 도로로 나와 신나게 달렸어요, ‘세상에는 착하고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있구나, 그래서 세상은 좋게 잘 돌아가는 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식후 잠든 평온한 두 손주의 얼굴을 보며, 그 식당 주인의 후한 대접에 또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스위스(베른)의 어느 카 정비센터 직원의 서비스 (1)레만호 시옹성 주차장에서 차량유리창 파손 7월 25일 레만호에 있는 시옹성 주차장에서, 집시족으로부터 차량 파손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후속 조치는 경찰의 현지출동에 이어 해결이 되었지만 유리파손은 내가 알아서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여행 지속은 물론, 차내 보안상 빨리 수리하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차 속의 짐이나 취사도구, 기타 식자재 등의 보안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베른시 카 정비회사를 찾아 갔지만 사이즈가 맞는 유리가 없어 다른 업체에 연락을 해보더니, 이틀 후에야 수급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창문없이 다니기로하고 그냥 돌아오려는데, 카센터 아저씨가 “그때까지 유리 대용으로 두꺼운 비닐 가림막을 설치해 주겠다”고 조언을 합니다. (2)차유리 대신에 뚜꺼운 비닐로 커버 두꺼운 비닐로 임시 갈아 끼우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간단한 일이니 돈은 안 받겠다고 해요. 2일 후에야 유리창을 새로 끼었지만, 베른시내 몇 군데 업체를 알아보며 신경을 써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복구비용도 차를 빌린 폴투칼 렌트회사에서, 이곳 스위스 정비업체로 결제를 한다고 합니다. 면식 없는 타국에서, 유리 교체와 비용부담의 편의를 도와준, 그 스위스 카 서비스 센터 직원의 수고와 친절에 대하여 생각날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근거로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역 안쪽까지 민가가 들어서고 곳곳에 잡풀이 무성했던 사천왕사 터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910년대 경주-울산 간 철도 개설에 따른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시작이었다. 이 조사를 통해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과 다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사천왕사 터가 확인됐으나, 동해남부선 철도가 절터를 가로질러 놓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1922년엔 조선총독부가 ‘고적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사찰과 함께 다시 조사를 벌였고, 1928년과 1929년엔 동경제국대 교수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절터 규모와 범위, 가람의 배치, 주요 유물의 정밀 실측 및 측량 조사가 이뤄졌다. 반면, 광복 이후 60여년 동안은 사지 주변에 대한 간단한 조사 외에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낸 것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진행한 정밀발굴을 통해서다. 모두 7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목탑지, 강당지, 부속건물지, 단랑의 회랑지와 익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 유물로는 각종 기와 조각과 금동불상, 비편, 이수편 등이 있다. 특히,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당의 위치 및 크기의 변천, 익랑의 존재, 목탑 기단부 면석에 배치된 녹유신장상의 위치를 확인한 것은 주요 성과였다. 또, 중문 남쪽 귀부 중앙으로 석교가 발견돼 고대건축연구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라 대표예술가 양지와 녹유신장상 녹유신장상은 국내 고대 조각품 가운데 첫손에 꼽는 걸작 중 하나다.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녹유전) 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꿈틀거리듯 생생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불국토를 지키는 자태가 생동감 넘치게 다가온다. 신라 지배층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불안해하는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을 누르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천왕사 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터에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어 다시 땅에 묻었다. 이후 1918년과 1922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견된 유물조각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이름의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첫 발견 이후 90년이 지난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200여점의 파편을 수습했다. 그 결과 수십 년 풀리지 않았던 이 조각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국내 미술사학계에선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녹유신장상이 절 들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四天王, 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네 명의 수호신)의 일종이란 설과, 사천왕의 부하신 팔부중(八部衆,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상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그런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 목탑의 기단구조와 녹유신장상의 봉안모습이 확인되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됐고, 지금껏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상 같은 네 가지 상도, 팔부중의 여덟 신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으로만 복원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 등 세 종류가 전부였다. 녹유신장상으로 사천왕사지 금당 앞 왼쪽과 오른쪽에 세워진 목탑 2기의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동탑 발굴에서는 이들 녹유신장상 4기가 탑 기단부에 온전히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고, 상세히 몰랐던 C상의 전모도 알 수 있게 됐다. 발굴 조각들을 모아보니 A상과 B상은 각 6구씩, C상은 9구나 복원이 가능했다. 기단 벽면 장식 방식은 녹유신장상 세 종류를 한 묶음으로 한 면마다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였다. 다시 말해 탑 기단부 한 면에 6개의 녹유신장상이 A-B-C, A-B-C 식으로 배치된 모양이었던 것이다. 추론해보면, 탑 기단부 4면에 붙은 신장상은 24개로, 동탑과 서탑 2기를 장식하기 위해 모두 48점이 제작됐다는 결론이다. 녹유신장상은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이런 이유로 녹유신장상은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으로 불리기도 한다. 녹유신장상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상’이라는 뜻이고,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이 새겨진 벽면 장식용 흙벽돌’이란 의미다. 전자는 예술작품이란 점에, 후자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름이다.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사천왕사지에서 7번 국도 건너 남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절터 하나가 보인다. 사천왕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망덕사 터다. 논으로 둘러싸인 절터엔 보물 제69호인 망덕사지 당간지주와 몇몇 건물지와 초석이 남아 있다. 망덕사(望德寺)란 이름을 풀어보면 ‘(당 황제의) 덕을 우러러보는 절’이라는 의미다. 자칫 대국에 굽실거리는 힘없는 나라 백성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망덕사 창건 경위다. 문무왕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명랑법사를 시켜 문두루비법을 시행하게 하자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은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다 몰살한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은 옥에 갇혀있던 신라 한림랑 박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비법을 쓰기에, 당에서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박문준이 답했다. “저희는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 본국의 사정은 잘 모르나,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지어 황제의 장수를 비는 법석(法席)을 오래 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사천왕사를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바로 망덕사다. 그러나 당의 사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사천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사신은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은 뇌물로 금 1천 냥을 주며 그를 달랬고, 그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전했다. 그 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절의 이름을 망덕사로 불렀다. 망덕사는 이처럼 나당전쟁 당시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세운 절이다. ‘당나라에 대한 보여주기식 충성’을 통한 신라의 ‘실리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주목할 점은, 부처의 힘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지의 중심엔 문무왕이 있었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북도의 ‘무한상상! New경북!’ 제안 공모전 수상작이 가려졌다. 도는 지난달 24일 수상작을 선정해 발표했다. 경북 발전을 위한 창의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굴해 도정에 반영하기 위한 이번 공모전은 지난 7월 18일부터 8월 31일까지 진행했다. 민선8기를 맞이해 ‘지방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경북 발전 정책 아이디어 제안’을 주제로 열렸다. 짧은 기간임에도 전국에서 557건의 정책이 제안됐다. 접수된 제안들은 각 분야별 해당부서 및 실무심사위원회에서 심사하고 민간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제안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종 8건(장려상 2건, 노력상 1건, 입선 5건)을 선정했다. 영예의 입상자들에게는 부상금과 함께 상장이 수여된다. 먼저, 장려상에는 지역 공동주택(아파트) 관리비 연체요율을 코로나19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경상북도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하자는 제안이 선정됐다. 도는 올해 해당 내용을 반영해 경상북도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할 계획이다. 또 가정위탁아동에게 지급되는 대학진학자금의 용도를 교재구입비, 기숙사비 등으로 범위를 확대하자는 제안도 장려상에 선정됐다. 도는 대학에 진학하는 보호아동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위해 관련 사업지침을 검토할 계획이다. 이외에 노력상에는 비콘 신호가 발신되는 구명조끼 제안이 선정됐다. 입선에는 △인공지능(AI) 의료자원정보 안내 시스템 구축 △my interest 경북 유튜브 채널 개설 △경상북도 광역 통합 행정망 구축 △경북도청 천년숲 내 도화인 백일홍 식재 △수소연료전지를 활용한 시설원예분야탄소 저감이 선정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이번에 선정된 제안들이 정책에 반영돼 도정 행정서비스의 품질이 높아지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도민이 참여하는 행정을 위해 도민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정책에 반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도는 도정에 관심을 가진 국민의 생각을 정책으로 구현하기 위해 매년 제안 공모전을 추진하고 있다. 제안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도 홈페이지 및 국민신문고를 통해 상시적으로 국민 제안을 접수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