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앞두고 경주교도소 수용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다. 먼저 불국사 자원봉사단의 기형스님은 설 명절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아쉬운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됐으면 희망한다며 지난 18일 빵과 음료수 400세트를 전달했다. <사진> 20일에는 교정협의회 최병오 회장과 회원들이 경주교도소를 방문해 수용자들을 위로하며 빵과 음료 각 400개를 전달했다. 경주교도소 최재우 소장은 “항상 수용자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물심양면으로 기부를 아끼지 않는 불국사 자원봉사단과 교정협의회 위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면서 “이러한 관심과 위로가 수용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경주교도소는 설을 맞아 교도소가 위치한 내남면 용장4리 마을회관 및 다문화가정, 독거노인, 소년가장 등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직원들이 마련한 성금과 격려품을 전달했다
농협중앙회 우리농업지키기운동본부 경북지역본부는 지난달 19일 경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과 장애인단체협의회를 찾아 취약계층을 위한 400만원 상당의 ‘사랑의 떡국떡’ 2kg 270상자를 지원했다. <사진> 이번 지원사업은 우리농업지키기운동본부가 주관하고 농협중앙회와 NH농협은행에서 후원한 것으로 평소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많은 배진석 경북도의원과 함께 민족의 명절 설을 맞아 어려운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우리농산물 소비 촉진을 위해 마련됐다. 김종필 본부장은 “취약계층들이 행복하고 따뜻한 설 명절을 보내길 희망한다”며 “앞으로도 농촌 활성화사업 등 취약계층을 위한 아름다운 기부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농업지키기운동본부는 범농협 임직원들이 매일 1000원 이상의 자발적인 후원금을 통해 조성된 기금으로 운영되는 사회공헌단체이며, 무료 장수사진 촬영과 도시락 지원, 동화책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청년이 직접 지역사회 내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청년사회서비스사업단’공모가 오는 15일까지 진행된다. 청년사회서비스사업은 청년들이 직접 참여해 지역 특성에 맞는 사회서비스를 개발하고 보급해 청년에게 사회참여 및 역량 강화 기회제공과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올해는 기존 제공해 오던 청년마음건강지원, 청년신체건강증진서비스 외에도 초등학생 돌봄 서비스가 추가 됐다. 신규 서비스인 초등학생 돌봄 서비스의 경우, 이용 대상 제한을 없애 지역사회서비스가 보다 보편적 서비스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소득 기준에 따라 본인 부담금을 차등 지불하면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사업단 구성은 대학이나 사회복지법인,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등이 서비스 제공 인력의 70%이상을 만 19세~34세로 해야 하며, 초등 돌봄 서비스에는 초등교육 등을 전공한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다. 학업과 취업준비 등을 병행하는 청년 특성을 감안해 주 40시간 근로의무 기준을 완화하고, 기존 인건비 지원 외에 초기 설치비를 추가 지원하는 등 청년사업단 활성화를 위해 다각도로 지원한다. 참여를 희망하는 기관은 사업계획을 수립해 이달 15일까지 신청서와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지역은 경북도청 사회복지과(054-880-2114)로 세부 구성요건, 지원사항, 신청 서류 및 일정 등 공모와 관련된 사항을 문의하면 된다.
경주시가 올해 경로당을 더욱 행복하고 활기찬 복지공간으로 조성한다. <사진> 시는 올 한해 등록경로당 633곳에 70억원 예산을 투입해 운영비 지원, 시설 환경개선, 행복도우미 지원 등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실시한다. 이는 지난해 예산 58억원 보다 20% 늘어난 수치다. 특히 올해는 노인복지의 핵심인 경로당 환경개선에 주안점을 두고 추진한다. 먼저 △건천 송선 2리 △내남 이조 2리·노곡 2리 △천북 오야리 △안강 대동리 △현곡 오류 1리 등 경로당 6곳을 신축한다. 또 시는 노인들의 여가활동이 가장 많이 이뤄지는 마을 경로당을 집중 지원해 건강 100세 시대를 맞아 행복한 인생2막이 되도록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조성에 나설 방침이다. 이를 위한 사업으로는 △운영비, 냉·난방비, 양곡비 등 운영비 지원 35억원 △손해배상책임보험, 전기·소방안전점검 등 안전관리사업 1억원 △신·증축, 보일러 교체 등 환경개선사업 18억원 △경로당 행복도우미 지원 16억원 △스마트폰 사용법, 유튜브 활용 건강체조 등 여가선용 프로그램(비예산) 등이다. 시는 경로당 내 각종 안전사고와 재산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위해 전 경로당에 대해 손해배상책임공제보험에 가입했다. 또 역량 있는 행복도우미가 경로당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여가활동 촉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경로당행복도우미는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복지 코디네이터, 생활방역을 포함한 경로당 코디네이터의 3중 역할을 수행한다. 이 사업은 행복도우미 45명을 채용해 각 경로당별로 전담하게 되며, (사)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에 민간위탁으로 실시된다. 주낙영 시장은 “지역 노인인구가 매년 증가함에 따라 생활복지공간으로서 경로당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며 “지역발전을 이끌어 오신 어르신들이 활력 넘치는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한 단계 높은 복지시책을 지속 발굴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시는 올 2월부터 12월까지 135억원의 예산을 들여 공익활동형, 사회서비스형, 시장형 등 3개 분야로 나눠 3588개의 노인일자리를 제공한다.
경북도는 고용노동부에서 실시한 2023년 청년도전 지원사업공모에 선정돼 국비 10억원을 확보했다. 도는 이 공모에 2년 연속 선정됐다. 이 사업은 최근 청년 비경제활동 인구 증가에 따른 청년고용 활성화 대책으로 2021년부터 자지단체를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다. 구직단념청년을 발굴하고 구직의욕 고취 및 자신감 강화를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해 청년들의 노동시장 참여 및 취업 촉진을 지원한다. 경북도는 위덕대 산학협력단과 협약을 맺고 도내 구직단념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 구상 및 기존 사업들과 연계 지원방안을 검토하는 등 해당 공모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협조해왔다. 이번 공모선정으로 국비 10억원을 포함한 총 사업비 약 11억원을 구직단념청년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도내 구직 단념 청년 200명을 대상으로 밀착상담, 사례관리, 자신감회복, 진로탐색, 취업역량강화, 지역맞춤형 교육 등 40시간의 공통프로그램을 실시한다. 특히 올해는 공통 프로그램에 더해 외부 연계활동 및 자율 활동이 포함된 특화 프로그램이 신설됐다. 청년들은 단기 또는 중장기 프로그램을 선택 이수할 수 있고, 교육을 이수한 청년들은 50만원에서 최대 300만원의 인센티브 및 국민취업지원제도 등과 연계한 취·창업 지원을 받게 된다. 경북도는 참여자 모집 및 도내 시행중인 취업지원사업과 연계 지원하는 등 모든 행정적 지원을 할 계획이다. 또 운영기관인 위덕대 산학협력단은 2021년, 2022년 청년도전사업을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맞춤형 프로그램을 시행할 방침이다. 이 사업은 2월말부터 참여자를 모집한다. 도내 만18세 이상 만34세 이하의 구직단념 청년이면 누구나 참여 신청이 가능하다. 3월 1기를 시작으로 시즌제 운영을 통해 단기 75명, 중·장기 125명 등 총 200명에 대해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참여자 모집은 위덕대학교 산학협력단(경주시청년센터)에서 진행한다. 한편, 경북도는 지난해에도 구직단념청년 165명의 프로그램 이수를 이끌어냈으며, 2022 고용노동부 청년도전 지원 사업 성과평가 결과 ‘우수’기관으로 선정된바 있다. 차순애 경북도 청년정책과장은 “코로나19 장기화 등으로 구직의욕을 상실한 청년들이 이 사업을 계기로 취업의지를 다지고 성공적인 사회진입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북도는 정부의 저소득층 난방비 지원 확대 대책과 더불어 도내 난방 취약계층이 빈틈없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에너지 사각지대 발굴에 나선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급등한 난방비 지원을 위해 겨울철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특별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을 당초 15만4000원에서 30만7000원으로 인상하고, 가스요금 감면 폭을 당초 9000원~3만6000원에서 1만8000원~7만2000원으로 인상했다. 이 같은 다양한 난방비 지원 시책이 있지만 노인, 장애인 등 관련 제도를 알지 못해 신청하지 못하는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난달 30일 시·군 복지부서 국·과장 영상회의를 긴급 개최하고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이를 위해 도에서는 1월 30일부터 2월 10일까지를 ‘에너지 취약계층 집중 발굴 기간’으로 설정했다. 시·군별 읍면동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에너지바우처, 도시가스, 전기요금 할인 미신청 가구를 전수 조사해 신청 안내문을 재발송하고, 가구별 전화·방문조사 등을 통해 신청을 독려해 지원 대상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또 정부 할인 대책과 별도로 기초생활보장(생계·의료·주거·교육) 수급권자 10만5000가구를 대상으로 가구당 10만원씩 긴급난방비 105억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이를 통해 유례없는 한파와 난방비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에너지 취약계층이 난방비 부담을 덜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경북도는 윤석열 정부가 지역주력산업 경쟁력 제고 및 산업거점 조성을 위해 추진하는 신규 국가산업단지 후보지 발표가 임박해짐에 따라 막바지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도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과제 및 지역정책공약에 반영된 사업 중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지역의 주력산업은 원자력과 수소, 백신산업으로 판단했다. 도는 지난해 10월 차세대 SMR 산업생태계 구축과 원전최강국 건설을 위한 경주SMR국가산단, 세계 1등 수소산업 육성을 위한 울진원자력수소 국가산단, 바이오 백신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안동바이오생명 국가산단을 후보지로 제출했었다. 이들 신규 국가산업단지 유치에는 전국 10개 시·도에서 19개소가 신청했다. 모두 지역의 강점을 내세우며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국토교통부의 전문가 평가와 심의를 거쳐 2월 중순 이후 최종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경북도의 후보지들은 지역의 산업특징과 연관기업, 공공기관 집적도, 인근지역과의 연계성이 높고 토지개발에 따른 규제지역이 없어 어느 때 보다도 최종선정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한편 경북도내 국가산업단지는 9개가 지정돼있다. 현재 2605개사가 입주, 고용인원 10만 명에 이르는 등 지역의 생산거점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철우 도지사는 “원자력, 수소, 백신산업은 모두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산업인 만큼 경북이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산업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헌화가 신라 제33대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이 명주(강릉) 태수로 부임하며, 바닷가에 행차하여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마치 병풍이 바다에 둘려있는 듯한 석장(石嶂)이 있었는데, 높이가 천장으로 척촉화(躑躅花)가 무성히 피어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 바칠 사람이 누구인가?” 시종이 말하길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고 하니, 모두 할 수 없다고 했다. 옆에서 어떤 노인이 암소를 끌고 지나가며,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가사를 지어 바쳤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수로부인」 독자님들께 꽃 한 송이를 바치옵니다. 2023년 계묘년에는 당신의 이야기가 멋진 노랫말로 만들어지길 기원합니다. 천 년 후 당신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나는 책을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책이 인테리어처럼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그 버리지 못하는 책들은 내 인생의 추억이 닮긴 책들이다.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담긴 책은 ‘상실의 시대’와 ‘살아남의 자의 슬픔’이다. 오랜만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고 다시 한번 추억을 돌아보았으며 또 다른 감정을 가졌다. 역시 책이라는 것은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와 시점과 환경에 따라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 예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에 더 많이 공감했다면 이제의 나는 ‘살아남은’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기운다. 이 책의 주인공은 20대의 ‘나’다. 격동기의 20대였고 고민과 반항의 20대였던 주인공과 또 다른 두 명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대한 증오와 반항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했던 ‘라라’. 결국 그녀는 꿈꾸던 유토피아에 다가가지 못한 채 자살을 통해 자신과 타협한다. 이러한 ‘라라’와는 달리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디디’. 그녀 역시 세상과 타협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임으로써 세상과 대립한다. 라라와는 다르지만 디디 역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본인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척 증오하고 반항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청춘기를 겪는다. 나 역시 격동의 20대였고 학생운동을 하였으며 염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읽었던 이 책이 내게는 위로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었겠지만 라라처럼 열정적으로 살아가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20대는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며 기득권 세력에 대해 불만이었고 불안이었다. 그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나서야 나는 세상에 진입했다. 이 책에서 말하듯 나는 세상과 타협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배웠다. 브레히트는 본인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강한자가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슬퍼졌다” 물론 브레히트의 시대에는 이념을 지키느냐, 사회와 타협하느냐 라는 고민으로 삶과 죽음이 달라졌을 수 있다. 우리 시대에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것이다. 과도기 혹은 청년기의 나는 강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그냥 살아있으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더 애착을 갖는다. 슬픔보다는 행복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할 때다. 이제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래서 내가 갖는 스트레스와 불안한 조건들을 최대한 단순화시킨다. 이 세상은 웃고 즐기다가 혹은 행복하게 살다 가기에도 짧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슬픔에 집중하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즐겁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렇게 나를 바꾼 건 성철스님의 ‘산시산수시수’라는 짧은 6글자였다. 산을 산으로 보면 된다. 물은 물로 보면 된다. 40대의 나는 이제 이 책의 ‘살아남은’에 집중한다.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면서 살아남아서 행복함을 그려본다. 어쩌면 나의 40대는 나의 20대가 증오하고 혐오했던 그 기득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의 20대는 결국 40대가 되었고 치열했던 20대를 생각하며 남은 행복을 그려보게 된다. “광대한 우주, 무한한 시간, 이 태양계에 내려와서 지구라는 행성도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 간다는 것을 억울한 일이잖아요” 디디의 말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앤드오브타임’에서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여자 주인공 디디의 말처럼 광활한 우주, 무한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무슨 큰 의미를 담을 것인가? 내일의 나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을 더욱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간다. 누구나 죽는다. 물론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 중 죽음을 또는 죽는다는 것을 아는 존재는 인간 뿐이기도 하다. 이젠 살아남아서가 아니라 살아있어서, 슬픈 게 아니라 행복해야 한다. 이재훈 씨 : 경주고와 홍익대학교를 나와 서울에 살고 있다. 신세계센터럴시티에 근무하는 직장인.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는 따듯한 가슴을 가졌다. 경주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 간사로 오랜 기간 봉사하며 고향과 고향사람 사랑에도 힘쓰고 있다.
경주시평생학습가족관은 ‘2023년 상반기 평생학습 강좌’ 수강생을 모집한다. 직업능력교육 19개, 문화예술교육 45개, 인문교양교육 17개, 외국어교육 18개 등 총 99개 강좌에 1646명을 모집한다. 교육대상은 만 19세 이상 경주시민이다. 먼저 2월 6일엔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 가족 △보훈대상자 △장애인 △18세 이하 자녀 2명 이상 가정 △경북도 자원봉사증 소지자 등 우선 대상자들의 방문 및 인터넷 접수가 시작된다.이어 8일 10시부터는 일반인들의 인터넷 접수가 시작되며, 모든 강좌의 최종 신청기간은 3월 10일 오후 5시까지다. 강좌 운영은 3월 2일부터 6월 21일까지 강좌별 16주로, 경주시평생학습가족관에서 진행된다. 수강신청은 인터넷(www.gyeongju.go.kr/gjlll/main)에서 선착순 접수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주시청 또는 평생학습 가족관 홈페이지를 참고하거나 평생학습가족관으로 문의하면 된다. 경주시 관계자는 “지난해 평생학습에 참여한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올해 다양한 강좌를 개설했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이 원하는 강좌를 제공해 평생학습 기회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간 100만명 이상이 찾는 대릉원이 이르면 오는 5월부터 무료 개방된다. 경주시는 동부사적지, 황리단길 등 주요 관광지와 도심을 잇는 대릉원을 무료로 개방하기 위한 행정절차를 밟고 있다. 대릉원은 코로나19 확산세가 정점이었던 2021년에도 108만1410명이 입장할 만큼 경주를 대표하는 사적지다. 무료 개방으로 황리단길과 동부사적지를 찾는 관광객들이 대릉원을 통해 도심권역으로 보다 쉽게 유입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시는 지난 2021년부터 대릉원 무료 개방을 위해 문화재청과 협의를 진행해왔다. 그러면서 대릉원 정문과 북문 등 2개 출입문 외 대릉원 동편에 출입문을 추가로 설치를 완료했다. 경주쪽샘 방향 돌담길에 출입문인 삼문을 지난해 9월 착공해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대릉원 무료 개방의 일환으로 천마총 매표소 설치를 오는 3월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이어 대릉원 관람료 무료를 골자로 한 ‘경주시 사적지관람료 징수 및 업무위탁 관리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추진 중이다. 개정안은 오는 3월 경주시의회 소관 상임위에 상정될 예정으로 본회의를 거쳐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현행 성인 3000원, 12세 이하 어린이 1000원의 대릉원 관람료가 모두 폐지된다. 다만, 대릉원 내 천마총은 문화재 보존과 관리 효율을 위해 관람료(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를 징수한다는 방침이다. 대릉원 무료 개방은 개정안이 확정 후 오는 5월부터 시행될 전망이다. 한편 경주시가 2020년 12월 9일부터 16일까지 실시한 ‘대릉원 개방에 대한 시민의견 조사’에서 응답자 2357명 중 적극 찬성 913명, 찬성 429명 등 총 1342명(56.9%)이 찬성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보 제25호인 ‘태종무열왕릉비’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태종무열왕의 능비다. 통일신라 석비를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석비의 형식이나 비액(碑額)의 새김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으로, 이후 이를 본보기로 우리나라 석비의 형식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은 고려 초까지 우리나라 석비의 전형으로 여겨져 주요한 전통이 됐다. 더불어 이 석비는 왕릉의 주인공이 무열왕이란 사실을 밝혀준 구체적인 증거가 됐다. ◆귀부·이수 갖춘 첫 신라시대 석비 삼국 항쟁이 본격화되던 7세기 한반도는 동북아 국제전의 현장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여기에 왜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포위한 가운데 신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군사 동맹에 사활을 걸게 된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세 변화 속에 당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주도했던 이가 김춘추(무열왕)였다. 648년 선덕왕의 명으로 당으로 향한 김춘추(무열왕)는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제안을 선제적으로 하게 된다. 당의 연호를 쓰고, 당의 복식을 수용하는 등 거의 모든 외교 영역에서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며 군사적 동맹을 맺게 된다. 이처럼 무열왕이 활동한 시기는 삼국의 항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고 전략적이었으며, 외교적으로 복잡한 함수를 지닌 때였다. 따라서 그는 이전과 다른 형태의 새로운 전장인 ‘외교’라는 무대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무열왕을 ‘태종무열왕’으로 칭하는데, 그가 죽은 뒤 얻게 된 ‘태종’(太宗)이라는 칭호는 창업에 버금가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의미와 함께, 기존의 불교식 왕호를 버리고 중국식 묘호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 신라에서는 묘제 양식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난다. 능묘를 조성할 때 피장자의 업적을 담은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시작이 무열왕릉 능비다. 이후 문무왕릉을 비롯해 성덕왕릉 등에 비석이 세워진 점으로 미뤄, 이 시기 능비를 세우는 것이 보편화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비석은 왕릉에만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유신의 묘에도 비석이 세워졌고, 김인문의 묘에도 비석이 있다. 삼국통일 직후인 이 시기 석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기 시작한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 모양 받침돌이고, 이수는 용이 조각된 비석 덮개돌이다. 이후 ‘귀부-비신(碑身)-이수’를 갖춘 석비가 전형적 양식으로 정착된다. 이 같은 방식도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 또한 무열왕릉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변용되고 신라화된다. 무열왕릉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최초의 신라시대 능비다. 비신은 파손돼 사라지고 없지만 귀부와 이수는 초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부는 머리를 앞으로 길게 뻗고 있으며 목의 위아래에 화려한 보상화문을 장식해 신성함을 표현했다. 귀부엔 돌출된 발은 길게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등에 새겨진 귀갑문은 여러 겹의 육각형 문양이 겹쳐지도록 했다. 비좌 주변에는 연화문을 새겨 비신에 대한 공양의 의미를 더했다. 이수는 좌우에 3마리씩 나란히 배치했는데,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다리를 모아 보주를 받치도록 했다. 이러한 이수조각 기법은 중국이나 초기 신라 석비의 전형적 특징이라고 한다. 귀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머리를 앞으로 길게 내밀고 있는 점과 여러 겹으로 표현된 귀갑문이다. 그리고 이수에서 나란히 아래를 향하고 있는 용의 표현도 특이하다. 이런 표현 기법은 초기에 조성된 귀부와 이수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 석비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629~694)이 직접 짓고 쓴 글씨로 비문을 새겼다. 이수 앞면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적힌 명문은 비의 주인공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석비는 661년 6월 무열왕이 사망한 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귀부와 이수가 마련된 석비의 시작 시기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학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비석 몸통이 사라져 비문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비석은 퇴계 이황(1501~1570) 당시만 해도 비록 훼손되긴 했으나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퇴계가 경주 유생들이 그 비석을 깨뜨려 벼루를 만들어 쓴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이를 꾸짖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에는 이미 몸통이 없어진 상태였다는 점으로 미뤄 조선 중기나 후기쯤 깨져 파편화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비석 명문 통해 피장자 규명된 무열왕릉 무열왕릉은 당대 만들어진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실하게 인정이 되는 신라왕의 무덤이다. 이처럼 확실한 왕릉으로 인정되다 보니, 무열왕릉은 신라왕릉의 위치 비정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무열왕릉의 장지 기록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이라고 기록했고 ‘삼국유사’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추사 김정희는 영경사 북쪽과 서악리를 동일하게 보고,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추정했으며, 고(故) 이근직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나 김용성 박사 등 연구자들도 애공사와 영경사를 동일한 사찰, 혹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명칭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무열왕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능의 주위로 괴석이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봉토의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호석 일부가 돌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무열왕릉을 중심으로 뒤로는 서악동 고분군으로 불리는 4기의 무덤이 일렬로 조성돼 있고, 그 반대쪽으로는 김양의 묘와 김인문의 묘가 있다. 무열왕릉의 배장묘(陪葬墓)로 추정되는 김양과 김인문의 묘는 현재 도로로 인해 단절된 모습이지만, 본래 하나의 능역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반대쪽 4기의 무덤 주인공은 무열왕의 선대 조상인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대왕(무열왕이 즉위하던 해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추봉)일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개별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으나 이들 4명이 이곳 무덤의 주인공이란 것에 대해선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이런 무덤의 모습은 삼한 통일의 대업을 문무왕과 관련이 있다. 이런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죽은자(무열왕)의 시각에서 보지 말고, 무덤을 조성한 사람(문무왕)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사실 서악동 고분군에 무열왕릉을 더한 5기의 무덤은 중국의 묘제와 관련이 있다. 중국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천자 7묘, 제후 5묘에 대한 규정을 따른 것으로, 유교이념에 의거한 정치·문화개혁을 위해 무열왕이 처음 기획했다. 무열왕은 당과의 관계를 위해 스스로 제후국을 자처하며 5묘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지금의 자리에 아버지 무열왕의 무덤을 쓰면서 완성됐다. 이 시기 5묘제 도입은 통일 이후 ‘새로운 왕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는 “진골 출신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출범한다는 것을 알리려는 문무왕의 선언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주에서 일을 마치니 점심때다. 혼밥을 해야하는 데 어디서 먹을까? 생각 중에 흥무공원에 있는 ‘금산재 칼국수집’이 떠올랐습니다. 김유신 장군묘 근처에 있는 경주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에요. 맛에 대한 끌림보다는 몇 해 전 경주에 근무할 때 들리던 집으로, 그간 어떻게 변했을까하는 궁금에 더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송화방지 비석, 연리지 나무 등 역사 이야기꺼리도 보고 싶었고요. 더욱이 오늘 봄날 같은 따스한 날씨도 내 발길을 산골 나들이로 향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1)송화산 아래 ‘금산재(金山齋) 칼국수집’에서 칼국수 집 건물 주변은 옛과 같으며, 대문 앞쪽 채소밭은 잔디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흥무공원 주차장에서 내려 철로 지하 굴다리를 통해 맛집에 가는 코스도 전과 마찬가지. 식당 대문으로 들어가니 큰 마당에 대형 평상과 테이블들이 놓여있습니다. 칼국수, 부추전, 수육, 막걸리가 주된 메뉴였어요. 값도 시중보다 저렴한 편으로 차림표 아래 ‘정성을 가득 담았습니다’라고 예쁘게 적혀있는 글귀에서, 주인장의 맛갈스런 손맛과 다정한 친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2)김유신 장군가의 원찰, 송화방 비석 이야기 칼국수 집 뒤편에 ‘송화방지(松花坊址)’라고 새겨있는 비석도 그대로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가문의 원찰 터 자리라고 표시되어 전해오는 비석입니다. 삼국유사 ‘김유신 조’ 편에 의하면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상곡’ 골짜기에 제사 지내고, ‘재매곡’이라 불렀고, 해마다 봄이 되면 집안의 남녀들이 여기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쯤 송화가루가 골[谷] 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재매부인이 여기에 절을 짓고, 출가하여 「송화방」이라고 이름 지어 김씨가문의 원찰로 삼았고, 장군의 명복을 빌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전해오는 곳입니다. (3)금산재 연리지 나무 송화방지 비석 옆에 100년쯤 되는 큰 팽나무 연리지 한그루가 잎을 죄다 떨어트리고 서 있습니다. 그 앞 안내판에, 이 나무는 한가지 소원은 들어주는 나무로, 왼쪽을 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고, 오른쪽을 돌면 딸을 낳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녀가 손을 잡고 같이 돌면 ‘100년 해로’ 한다고도 해요. 아마도 김유신 장군에 대한 재매부인의 간절한 사랑의 기운이, 송화방 주변에 서려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돼요. 튼튼한 가지들을 불끈 안고 기운차게 버티고 서 있네요. 봄이 되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찾아와, 이 사랑나무인 연리지를 보며 데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4)식당 아줌마의 손맛과 후한 인심 들깨 칼국수와 부추전을 먹고 카드로 결제를 하려고 하니, ‘손님 현찰로 주면 좋겠습다’라고 하며 ‘모두 그렇게 받습니다’라고 한다. 현금이 없어 난감해하자, 아주머니 말이, ‘그럼 다음 오실 때 주시든지, 아니면 계좌이체 하면 된다’고 하며 계좌번호가 적힌 명함을 줍니다. ‘지금은 그냥 먹고 가고, 나중에 밥값을 주면 된다’는 외상허락인데, 오히려 그쪽에서 상냥스럽고 느긋한 표정입니다.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해 어물거리며 칼국수 집을 나왔어요. 그리고 곧장 은행 ATM기를 찾아 시내로 차를 몰았습니다. 서천(西川) 물길 따라 불어오는 강바람이 모처럼 겨울 훈풍이 되어 어정쩡하던 내 기분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이야기가 있는 옛집에서 구수한 칼국수 맛과 식당 아줌마의 넉넉하고 유연한 인심에, 그리고 봄의 기지개까지 보았으니, 오늘 여기 잘 왔다 싶습니다. 이제 곧 봄이 되면, 이 송화산(松花山) 계곡에는 송화가루 향기 가득해지고, 벚나무 울창한 흥무대로에는 흰 꽃잎이 만발, 흩날릴 것입니다. 역사 있는 절터에 사랑 짙은 나무와 좋은 맛집이 있으니, 이보다 더한 힐링 장소가 또 있을까? 봄이 기다려집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아키타견(秋田犬)은 아키타현 오다테시(秋田県 大館市)가 고향인 일본 토종개이다.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키타견이 도쿄대학의 농학부 우에노 히데사부로(上野 英三郎) 교수집으로 분양되었고, 하치코란 이름을 가진 아키타견은 출퇴근을 하는 우에노 교수를 시부야 역 앞까지 마중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 날 우에노 교수가 학교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고, 아무것도 몰랐던 하치코는 시부야역 앞에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계속 기다리는 충견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고, ‘하치코(忠犬ハチ公) 이야기’란 이름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되어 세계적 주목을 끌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하치코가 태어난 고향인 아키타현의 오다테시(大館市)에서 아키타견을 키우는 동호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늘날의 아키타견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오다테시(大館市)는 아키타견을 만날 수 있는 도시가 되었고, JR오다테 역 앞에 아키타견 동상을 세우고, 아키타견을 명예역장으로 모시는 등 관광지의 랜드마크로 변모되었다. 또 아키타현 오다테시에는 ‘아키타견 보존회(1927년 설립)’의 본부가 있다. 보존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77년에 회관을 건립하고, 박물관을 운영하여 혈통보존과 보급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오다테시는 아키타견의 성지가 되었다. 아키타견((秋田犬)은 1920년부터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한 조사가 실시됐지만, 투견의 영향과 혈통이 고정되지 않아 천연기념물 지정이 보류되었다. 1927년에 오다테 촌장의 주도로 아키타견 보존회를 만들어, 표준 체형과 특징, 혈통을 고정하는 방식의 보존 운동을 하여 1931년에 일본 견종으로는 처음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태평양 전쟁시에 군용견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키타견과 셰퍼드를 인공 교배하면서 순수 혈통이 멸종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키타견 보존회의 전문적인 노력으로 혈통을 복원하여, 1947년에 제1회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49년에는 자체 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아키다 보존회는 2015년에 공익사단법인으로 변경하고, 2017년 8월에 아키타현 오다테시(秋田県 大館市)에 ‘아키타견 만남의 장소’를 개관하여 언제든지 아키타견를 만날 수 있게 하였다. JR오다테 역 근처에는 2019년 5월에 「아키타견의 마을(秋田犬の里)」을 만들어 새로운 관광지가 되었다. 아키타견을 만날 수 있는 체험장과 아키타견 박물관과 아키타견 관련 상품이나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 코너가 있다. 1년 동안 2만1000여명이 다녀간다. 현재 아키타견 마을 내 위치한 ‘지역 활성화 협력 사무실’에서는 아키타현의 공항, 역, 호텔 등지에 아키타견이 나온 포스터를 만들어 보급하고, 아키타현의 관광 홍보 대사가 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의 많은 지방자치단체는 2009년부터 ‘지역 활성화 협동조합’ 정책과 관광진흥, 상품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오다테의 지역 활성화 협동 조합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아키타견 홍보이다. 조합원은 아키타견을 체험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업무 외에도 SNS를 관리하여 아키타견을 통해 지역 관광을 활성화 시키는데 필요한 지원을 하고 있다. 1953년에 사단법인을 조직하였고, 현재는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최근엔 해외 지부도 활발하게 개설하고 있다. 공익사단법인으로 탈바꿈한 2015년부터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 회비와 후원행사, 자원봉사 등으로 조직을 꾸려가고 있다. 경주개 동경이의 자리매김은 유행에 들떠서 개를 살아있는 장난감이나 경제성 동물로 취급하는 어리석음을 사전에 막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천연기념물은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동식물로 고유혈통의 복원을 통해서 혈통고정을 완료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존과 아울러 지역의 관광 상품으로 거듭나야 한다. 학술적 가치와 문화재적 가치로 자리매김을 하여 재창출된 후에는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요소가 재탄생될 것이다. 절차가 바뀌어 결과만 보는 무리한 행정적 요구는 소탐대실이 될 것이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가 일궈놓은 벨칸토 오페라는 여주인공 1인에 의존하는 프리마돈나 오페라였다. 바로크 시대에 파워풀한 고음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카스트라토를 대체한 이는 초절기교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했던 ‘소프라노’였다. 워낙 고난이도의 성악 테크닉이 필요하고, 성대를 망칠 수 있는 위험까지 안고 있던 ‘그녀’들이었지만, 결국 최고의 자리로 날아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다. 벨칸토 시대 최고의 소프라노는 단연 주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1798-1865)였다. 그녀는 벨칸토 삼총사(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의 뮤즈였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작곡했고, 그녀는 그들과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흥행이 파스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파스타의 콧대는 더 높아질 수 없을 정도도 높아졌고, 디바의 갑질은 필연이었다. 걸그룹 ‘핑클’의 메인보컬로 데뷔하여 뮤지컬 스타가 된 옥주현의 갑질이 최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제작사의 캐스팅에 관여하여 특정 배우가 뽑히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옥주현의 티켓파워가 워낙 세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벨칸토 오페라 시대에도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특히 파스타는 초고액의 캐런티를 받으면서 극장의 경영과 작품 선정, 그리고 캐스팅까지 관여한 것으로 악명 높다. 벨칸토 오페라는 롱런하지 못했다. 부르는 사람도 힘들었고, 듣는 사람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카스트라토가 내리막길을 걷던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 벨칸토 오페라가 장기였던 로시니가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최고의 성악기교를 선보였던 파스타 역시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한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사실주의 베리스모 오페라 앞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벨칸토 오페라를 부활시킨 이는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로 불리는 칼라스는 본인의 성악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르가 벨칸토 오페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19세기의 파스타처럼 20세기의 칼라스도 벨칸토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섭렵했다. 칼라스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을 특히 사랑했다. 칼라스의 라이벌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1922-2004)를 제치고 최고의 디바로 오르게 한 오페라가 바로 노르마이기 때문이다. 벨칸토 오페라는 칼라스를 이어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1926-2010)에 의해 더욱더 풍성해졌다.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그리스와 호주 출신의 소프라노가 벨칸토 리바이벌로 20세기 디바가 되었다.
문루(門樓)는 출입하는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옥산서원의 문루 무변루(無邊樓)는 서원 안은 물론이고 서원 밖의 맑은 계곡과 산 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산천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경주부의 최초 사액서원으로, 1572년 선조 때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 재임1571.8~1574.2)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악의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와 1574년 선조 7년에 ‘옥산’이라 사액 받았다. 회재 선생은 1491년 경주부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나 1553년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돌아가셨다. 어려서 외삼촌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에게 수학하였고, 우재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 송재(松齋) 손소(孫昭,1433~1484)의 둘째 아들로 회재는 점필재학과 우재학을 전수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훗날 안동의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의 중심선상에 있었다. 이후 1610년 광해군 때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황 등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서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는 조선 중종년간 1541년에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성리학을 도입한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 선생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최초로 건립하였고, 이후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기도 하였다. 중국의 서원은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였고, 조선의 서원은 학자의 장수처(藏修處) 그리고 사림의 취회소(聚會所) 기능으로 정치적·사회적 기구의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 서원폐단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옥산서원의 문루 무변루는 정확히 누가 제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회재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이후 「옥산서원 제액찬(諸額贊)」에서 體仁廟․求仁堂․兩進齋․偕立齋․無邊樓․亦樂門 등 편액에 대해 찬하였으며, 옥산14영(玉山十四詠)을 지어 풍광을 읊조렸다.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하는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1536~1594)에게 보낸 시에 “옥산에 유업이 있는데 어진 자손은 굶주리고 도원엔 서책이 없어 학도들이 걱정한다네(玉山有業賢孫餓 道院無書學子憂)”라며 회재의 자손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도우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으니, 아마도 옥산과의 인연이 짐짓 깊어 보인다. 주자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讚)」에서 주돈이를 가리켜 “맑은 바람 밝은 달빛은 가없고, 뜨락의 풀은 파랗게 어우러졌네(風月無邊 庭草交翠)”라 하였고,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는 “용릉의 주무숙(茂叔)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깨끗해서 마치 비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깨끗한 달빛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며 주돈이의 인품과 기상을 달에 비유해 표현한 데에서 무변(無邊)의 뜻을 취하였다. 즉 무변은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말로, 풍월무애(風月無涯)라고도 한다. 무변루 자료로는 학고(鶴皐) 이암(李壧,1641~1696)의 「옥산서원무변루기」 등이 있다. 허균의 아버지이자 경주부윤을 지낸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이 1574년에 지은 「옥산서원기」를 보면, “누는 ‘납청(納淸)’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은 것은 기운이고 기운은 양(陽)이니, 이 누에 오르는 자가 맑은 기운을 받아들여 양을 기르고, 양을 길러 도(道)가 모인다면 제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즉 1574년 당시에는 문루를 납청루(納淸樓)로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옥산서원이 지어진 1574년 기록에는 문루를 납청루로 불렀고, 이후 노수신 등 문인들의 글에서 무변루로 불린 정황이 있다. 누가 언제 문루의 편액을 납청에서 무변으로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표현한 의미만은 변함이 없다. 다가오는 봄철에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옥산서원 문루에 올라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조선성리학의 이론과 심(心)·성(性)·정(情) 심성론 가운데 영남학파 주리론(主理論)의 유교적 공부를 배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났다. 설날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다. 장난감 파는 곳이면 아이들은 고가의 장난감을 고르느라 분주하고 한 발짝 물러선 곳에는 물주가 확실한 조부모가 서 계신다. 덕택에 계산하는 줄이 길게 늘어날수록 가게 주인도 신이 났다. 장난감 가게를 가지 않아도 아이들은 신났다. 두둑한 세뱃돈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돈을 벌고 돈을 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속담도 있으니 돈을 벌고 쓰는 일은 자급자족을 벗어난 순간부터 우리 사회의 아주 큰 고민거리였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곤 누가 코인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 땅을 사고, 팔아서 얼마를 벌었다, 집을 샀는데 그게 얼마나 올랐다. 이게 고작이다. 돈의 크기에 대한 개념도 없고 가치에 대한 고심도 없고, 그러니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만 어디서 주워 들어온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세대까지는 금융 공부를 안 해도 어찌어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평생직장 개념도 없지만 중요한 것은 ‘금융을 모르면, 경제를 모르면, 돈을 모르면’ 우리 아이들은 중산층으로 결코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나는 못 배웠지만, 우리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교육열 하면 대한민국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경제교육, 금융교육, 돈 교육은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을까? 수능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경제교육이다. 대학입시보다 중요한 것이 돈 교육이다. 왜? 대학은 선택이지만 돈은 삶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엄마는, 아줌마는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시지 못했다. 글도 숫자도 살면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알아가셨다. 그런 엄마가 내게는 아주 훌륭한 경제 선생님이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아마 아홉 살) 때 기억이다. 당시에 아주 큰 돈인 만오천원을 내 손에 쥐여주시면서 혼자 가서 신발을 사 오라고 하셨다. 생전 처음 버스를 타고 홀로 번화가에 갔다. 제주도 중앙로, 동문시장 현대약국 골목은 보세 신발 가게와 모든 신발 브랜드 가게가 몰린 곳이다. 어렵지 않게 찾아가서 번듯한 브랜드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두 이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한 곳에서 제일 저렴한 것을 찾았지만 그것도 만팔천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보세 신발가게로 들어갔다. 많은 신발 중에서 비교적 비싼, 만이천원에 불빛이 반짝이는 운동화를 살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거스름돈을 드렸다. 그랬더니 엄마는 “더 비싼 운동화를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네가 돈을 남겼으니 그 돈은 네 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진 거금이었다. 아빠가 기분 좋으실 때 주시던 심부름 값도 오백원을 넘긴 적이 없었다. 천원이면 과자를 여러 개 살 수 있는데, 삼천원이나 생겼다. 그때 나는 불빛이 빛나는 운동화를 산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일반 운동화를 샀다면 오천원, 아니 아저씨가 깎아주실 테니 육천원이남았을 수도 있었다. 사십 년 전 육천원은 지금 얼마일까? 초등학생이라면 슬슬 경제교육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이 사고 싶은 고가의 물건들과 일상의 지출에 대한 개념을 하나둘 잡아가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일주일마다 용돈을 받는다. 용돈을 받으면 저축, 기부, 용돈으로 나눠서 돈을 용도에 따라 봉투에 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장난감이나 필요한 것은 각자의 용돈에서 지출한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우유를 갖고 오라고 하고, 아이들이 우유를 갖고 올 때 무엇을 살폈는지 묻는다. 유통기한(최근 소비기한으로 바뀌었다)만 체크하고 온 아이에게 가격이 얼마였는지 묻는다. 우리가 이번에 마트에서 사야 할 것들과 남은 식비를 이야기해준다. 아이들이 추가로 사고 싶은 간식을 이야기할 때면 그것이 먹고 싶은 이유, 성분이 무엇인지(동생이 먹어도 되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가격이 얼마인지 묻는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진행하면서 아이들은 성장했다. 엊그제 마트에 갔는데 필요한 것들만 사고 나오는 길에 슬쩍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천원 하는 젤리 세 개를 건넸다. ‘이거 어때?’라고 물었는데, 아들이 ‘어머니, 감사합니다. 엄마가 이거 사주신대’하고 소리 지르며 동생들에게 뛰어갔다. 용돈교육을 하면 아이들은 돈의 가치, 크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함부로 고가의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아빠의 월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알게 되고 아빠에 대한 존경심도, 그 돈을 잘 관리하는 엄마의(또는 아빠) 능력도 왜 필요한 것인지 아이들은 알아간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은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3월 공동 발표한 깨진 유리창(Fixing Broken Windows: you suck Restoring Order and Reducing Crime in Our Communities)이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사회 무질서에 관한 이론으로,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구석진 골목에 2대의 차량 모두 본넷을 열어둔 채 주차시켜 두고 차량 한 대만 앞 유리창을 깨져있도록 차이를 두고 일주일을 관찰한 결과, 본넷만 열어둔 멀쩡한 차량은 일주일 전과 동일한 모습이었지만 앞 유리창이 깨져있던 다른 차량은 거의 폐차 직전으로 심하게 파손되고 훼손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 뉴욕시에서 있었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여행객들에게 뉴욕의 지하철은 절대 타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하철의 치안 상태가 형편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깨진 유리창의 이론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하철 내의 낙서를 모두 지우는 것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실제로 지하철에서의 사건 사고가 급감하였다. 깨진 유리창 이론 실험은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도입한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 예방 디자인 (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에서 유래되었다. 셉테드 (CPTED)는 도시의 공동화와 고령화 등에 따른 슬럼 공간을 만들지 않는 등 도시공간의 물리적 환경설계를 범죄 방어적인 구조로 변경하고 적용함으로써, 범죄자의 입장에서는 범죄 의지를 상실하게 하고 도시민들에게는 안전함을 주기 위한 도시 설계의 한 방법이다. 범죄자에게는 공간 개방과 시민의 감시가 느껴지는 환경 조성을 통해 범죄를 의도하다가도 검거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 범죄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시민에게는 범죄 발생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이것은 건물이나 지역 등의 환경이 지니는 범죄 유발 요인을 공간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하여 분석하고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환경 범죄학의 하나로, 1960년부터 연구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들어서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주요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도입한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 예방(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전략은 범죄율 감소에도 효과를 나타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연구되어 오다가 2005년 경기도 부천시가 처음으로 셉테드 시범지역을 시작했다. 그 이후 서울시는 지난 2012년 마포구 염리동을 시작으로 관악구 행운동, 중랑구 면목동 등에 셉테드를 적용하며 서울형 범죄예방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경주시에서도 경주경찰서에서 2021년 석장동 원룸촌 일대에 셉테드를 도입하였다. 경주의 범죄율은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3년 1천 명당 41명이다. 이 범죄율은 경상북도에서는 구미시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한다. 2022년도 통계에도 경주에서 발생한 범죄건수는 6884건으로 포항, 구미 다음으로 범죄 건수가 많다. 경주에서 셉테드를 도입한다는 것은 석장동이나 도심의 한 곳에 가로시설물을 설치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셉테드의 기본 원리인 감시와 접근통제, 공동체 강화가 중요하다. 첨단 공간정보기술을 통한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감시와 공공공간의 확대, 공간에 대한 기계적, 조직적, 물리적 조절이 되어야 하고 주민들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자치활동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는 경찰이나 지자체만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공간정보시스템과 커뮤니티 맵핑 같은 기술이 바탕이 되어 시민들이 함께해야 효율적인 범죄 예방을 이룰 수 있고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보다 안전한 경주가 될 수 있다.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는 경주시와 울산시가 자랑하는 독립운동가이다. 양정의숙의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 의사는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1910년 평양지원에 발령받았으나 한일병합조약으로 식민지가 되자 식민 지배하의 판사 생활을 거부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국권회복 운동과 의열 투쟁이었다. 그는 1912년에 독립운동 자금 마련과 연락망 구축을 위해 대구에서 곡물상회인 ‘상덕태상회’를 몇몇이 함께 개점하였다. 그리고 1910년대 국내 가장 전투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으로 활동했다. 대한광복회는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의 방법과 전략을 결합하여 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표로 1915년 결성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이다. 대표적 활동으로는 1915년 경주 우편 마차 세금 탈취사건, 1917년 경북 칠곡의 악덕 대지주 처단 사건, 1918년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처단 사건 등이 있다. 대한광복회 활동은 3·1 운동과 1920년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무장 독립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함의가 크며 박상진 의사는 바로 그 대한광복회의 핵심적이자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박상진 의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박상진 의사는 1884년 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생후 100여일 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었지만 생부와 양아버지인 백부는 옆집에 살았다. 박상진 가는 생부와 양부가 모두 과거 급제한 명문가였다. 울산시는 박상진 의사를 울산의 대표적 인물로 내세워 여러 사업을 실시해왔다. 2007년에 박상진 생가를 해체·수리하였으며 2018년에는 생가 주변을 ‘송정 박상진 의사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소재지가 송정동이어서 공원 명칭에 송정을 넣었다. 2014년에는 생가 가까이에 있는 저수지에 둘레길을 조성하여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으로 명명하고 시민의 힐링 공간으로 삼는가 하면, 동해남부선의 북울산역을 일명 ‘박상진 의사역’으로 부르고 있기도 하다. 경주시도 울산 못지않게 박상진 의사와의 인연이 깊다. 박상진 의사는 4세(1887) 때 생부·양부를 따라 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로 이주하였다. 박상진 의사는 경주 최부자 12대 만석꾼 최준 선생의 4촌 자형이기도 하다. 최준의 4촌 누님에게 장가든 것이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의 대표인 총사령으로 활동할 때 1915년 경주 우편 마차 세금 탈취사건을 기획하기도 했다. 1918년 도고면장 처단 사건으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자 중국 동북 지방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려다가 친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외동읍 녹동리로 귀향했으며, 모친의 빈소에서 출상 하루 전에 일경에 체포되었다. 사형 판결을 받고 옥살이하다가 1921년 순국한 박상진 의사의 묘소가 자리한 곳도 다름 아닌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다. 경주를 빼놓고 박상진 의사의 생애를 이야기할 수 없는 셈이다. 따라서 박상진 의사는 경주와 울산 양 도시가 함께 현창해야 할 인물이다. 물론 경주시도 박상진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다. 2021년에는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진입로 확장도 추진하고 있다. 2022년에는 경주 우편 마차 세금 탈취사건의 현장인 효현교에 안내판을 크게 세우기도 했다. 나아가 녹동리 생가의 복원이 요망된다. 최근 외동읍 녹동리에 위치한 양부 집터가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녹동리의 생가를 복원하기에 앞서 터를 우선 매입하여 안내판이라도 세워 복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경주시가 지금 녹동리 생가 복원까지 눈 돌릴 여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해월 최시형 생가 복원,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 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해오름 동맹’이라는 도시연합과 협력이 논의·추진되는 상황에서, 경주시와 울산시의 역사 문화·관광 협력 방안의 일환으로 녹동리의 박상진 의사 생가 복원을 선도 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녹동리 생가 복원은 경주와 울산 양 도시가 상생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녹동리의 생가 복원이 실현되어야 울산시의 박상진 의사 현창 사업도 빛을 더욱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시 역시 박상진 의사 생가 복원을 통해 역사 도시 경주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가 터 매입은 시간이 지체되면 더 힘들므로 지금 당장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
경주시가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최고등급인 ‘종합청렴도 1등급’을 획득했다. 국민권익위가 지난 1월 26일 발표한 2022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 경주시는 전국 75개 기초지자체 시 부문에서 청렴 1등급에 올랐다. 경주시가 종합청렴도 1등급을 받은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동안 구겨졌던 경주시민의 체면을 펴게 할 뿐만 아니라, 청렴도시에 산다는 자긍심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경주시는 지난 2017년부터 3년간 청렴도가 최하위인 5등급이었다. 이어 2020년, 2021년엔 3등급에 머물며 청렴도 중하위권 도시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공무원들의 크고 작은 비리와 시민들의 평가가 냉소적이었던 탓이 컸다. 이런 경주시가 무려 5등급이나 종합청렴도 등급을 수직 상승시켰다는 것은 그간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 가늠케 한다. 특히 ‘청렴노력도’ 부문에서 △반부패 추진계획 수립 △기관장·고위직 노력과 리더십 등 모두 5개 평가 항목이 100점 만점으로 1등급을 받는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 청렴도를 높이기 위한 추진 내용도 충실했다. 경주시는 지난 2018년 민선 7기 출범 이후 강도 높은 반부패 청렴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2020년엔 조직 개편을 통해 청렴윤리팀을 신설해 청렴도 제고를 위한 실무체계를 구축했다. 또 주낙영 시장이 직접 주관하는 클린 경주 추진기획단을 운영해 실효성 있는 청렴정책을 추진해왔다. ‘주니어 직원 및 직렬별 간담회’, ‘주니어 직원 및 직렬별 간담회’, ‘청렴메시지 전파’ 등 취약분야 내·외부 소통을 지속하며 청렴한 조직문화 조성을 위한 자정의 노력도 기울였다. 이들 모두 청렴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경주시의 이 같은 노력으로 ‘청렴체감도’ 부문 세부 평가 항목에서도 전국 시 평균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2등급에 올랐다. 또 부패실태 부문은 0점으로 부패사건으로 인한 감점요인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결과 국민권익위가 다양한 부패유형을 반영해 청렴체감도(60%)와 청렴노력도(40%)를 종합 합산하는 평가 결과 종합청렴도 1등급을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경주시는 앞으로 더 분발해야 한다. 청렴도 최고등급이 한 번에 그쳐서는 안돼서다. 비록 청렴도 1등급의 경주시라도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다. 경주시의 끊임없는 자정 노력과 공무원 각자의 청렴 문화 확산으로 더욱 청렴한 경주시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