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콜택시 서비스 ‘첨성대콜’과 ‘신라콜’이 오는 5월 1일부터 하나로 통합 운영된다. <사진> 경주시는 지난 22일 시청 대외협력실에서 첨성대콜 개인택시지부와 신라콜 법인택시연합회로 이원화돼 있는 콜택시를 ‘경주브랜드콜’(이하 경주콜)로 통합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업무협약식에는 주낙영 시장, 김재봉 경주개인택시지부장, 이동철 법인택시연합회장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협약은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대기업의 택시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책임감 있는 택시 서비스를 시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이뤄졌다. 이번 업무협약으로 경주시는 경주콜센터 사무실 보수와 차량 갓등 및 랩핑 교체 등 디자인 변경 예산을 지원한다. 통합 경주콜센터 사무실은 기존 개인택시지부인 첨성대콜을 이용한다. 경주개인택시·법인택시는 경주콜 운영을 위한 콜 수락·친절 등 택시 서비스 수준 향상 및 운수 종사자 관리, 통합콜센터 운영 등을 담당한다. 한편 4월 현재 신라콜(법인택시)는 콜택시 319대, 첨성대콜(개인택시)는 콜택시 647대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주낙영 시장은 “콜센터 통합 운영으로 운영비 절감이 가능해지고 시민들의 택시 이용 편의가 크게 증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지역 택시산업의 지속적인 발전과 시민의 교통복지 향상을 위해 더욱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월성1호기 최종해체계획서 초안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한다. 최종해체계획서는 원자력발전소를 해체하기 위해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인허가 문서다. 안전성평가, 방사선방호, 제염해체활동, 방사성폐기물 관리 및 환경영향평가 등 해체에 관한 종합적인 계획이 기록돼있다. 공청회는 5월 9일 경주 양남해수온천랜드, 14일 울산 시티컨벤션에서 개최된다. 의견수렴 대상 지역(경주, 울산 북구·중구·남구·동구·울주군) 주민 가운데 공청회에 참여해 의견을 진술하고자 하는 주민은 공청회 개최 5일 전까지 해당 지자체 신청 장소에 비치된 양식 또는 국가법령정보센터(www.law.go.kr) 내 ‘원자력안전법 시행규칙’ 별지 제112호 서식을 작성해 신청 장소에서 서면으로 신청하면 된다.(신청 장소는 해당 시·구·군청에 문의) 앞서 한수원은 지난 2월 8일부터 4월 7일까지 60일간 경주, 울산, 포항 등 주민 의견수렴 대상 지역 내 7개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최종해체계획서 초안 주민공람을 실시했다. 주민공람 기간 중 지자체의 요청으로 경주 4곳, 울산 2곳, 포항 1곳 등 총 7회에 걸쳐 주민설명회도 열었다. 그리고 이번 공청회는 원자력안전법 103조에 의거 주민공람 이후 주민 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요청에 따라 공청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향후 한수원은 주민 의견수렴 결과를 반영한 최종해체계획서와 공청회 결과 등을 연내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경주시와 한국수력원자력㈜이 SMR 활용 탄소중립 도시 조성을 위해 손을 잡았다. 이들 기관은 지난 24일 부산벡스코(BEXCO)에서 스마트넷제로시티(SMR Smart Net-Zero City, SMR을 활용한 탄소중립도시 모델, 이하 SSNC)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주낙영 시장, 황주호 한수원㈜ 사장 등 관계자 1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협약식은 ‘기후위기 극복의 힘, 원자력이 함께 합니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2024 한국원자력연차대회의 메인행사로 I-SMR & SSNC 론칭세션으로 진행됐다. 두 기관은 △경주 SMR 국가산업단지 및 테크노폴리스 조성 △CF100 활성화를 위한 공동 노력 등 SMR 활용 스마트넷제로시티 모델 개발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한수원은 현재 탄소중립도시 모델 개발을 위해 국내외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시뮬레이션 모델을 구상 중이다. 경주시는 이번 협약을 통해 지역 특성과 수요에 부합하는 최적의 사업모델을 개발할 계획이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경주시와 함께 탄소중립도시 실현을 위해 적극 협력하고 미래 원자력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경주시가 추진 중인 SMR 국가산업단지, 혁신원자력 연구단지 및 테크노폴리스의 성공적인 조성에 더해 글로벌 탄소중립 도시이자 미래 원자력산업의 중심 도시로 발돋움 하겠다”고 전했다.
경주시가 전국 최초로 민간 주도 ‘탄소중립 실천 선도도시’를 선포하고 향후 실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경주시는 지난 22일 화랑마을 기파랑관에서 ‘경주시 탄소중립 실천 선도도시 선포식’을 개최했다.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주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주관한 선포식은 제54회 지구의 날을 기념행사와 함께 열려 그 의미를 더했다. 선포식에는 주낙영 시장을 포함해 이철우 시의장, 시·도의원, 환경단체 회원 등 시민 400여명이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구호 제창을 통해 ‘지구환경과 미래세대를 위해 나부터! 지금부터! 앞장서겠다’는 경주시민의 탄소중립 실천 의지를 선포했다. 탄소중립은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전 세계적 과제다. 주요 선진국들의 탄소중립 선언에 이어 우리나라도 2020년 12월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 선언’을 통해 시대적 흐름에 동참했다. 산업·에너지·교통 등 다양한 온실가스 감축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 비전’의 이행주체인 경주시는 탄소중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과 다양한 친환경 정책을 추진 중이다. 특히 시는 △ESG경영 모범도시 실천 로드맵 설정 △2050 탄소중립 실천 선도도시 추진 △경주형 에너지절약 인센티브제 시행 △탄소중립 실천 추진전략 구상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인정받아 2024 대한민국 파워리더 ESG 경영대상, 2024 대한민국 최고 경영대상 ESG경영 부분 대상 등을 수상했다. 윤태열 경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장은 “환경오염과 기후재난이 심각해지는 만큼 이에 따른 반성과 경각심도 커지고 있다”며 “경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작은 습관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선포식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구촌의 주인으로서 어떤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지구를 잘 지키고 가꾸어 나갈지 알려주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경주시는 지난 18일 지역 17개 단체와 기후위기 대응과 2050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해 국가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 협약식을 체결했다. 참여 단체는 △경주YMCA △경주시농어업회의소 △경주시지역아동센터협의회 △경주시평생교육사협회△경주시여성친화도시 시민참여단 △형산강 생태체험학교 △한국전기공사협회 △한국노총 경주지역지부 △경주상공회의소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경주발전협의회 △업사이클링 플럽 △디딤 ESG 교육원 △환경운동실천협의회 △경북 숲해설가협회 경주시지부 △한국자유총연맹 경주시지회 △경주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등이다. 이들 단체는 빈곤·기아 퇴치, 불평등 감소, 기후변화 대응 등 UN이 채택한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에 적극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전국 최장 미분양관리지역으로 지정된 경주에 내년까지 4000세대 넘는 아파트 완공으로 미분양 물량은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완공된 아파트 중 상당수가 미분양된 상황인데다 미공개된 미분양 물량도 상당수 있어서다. 경주지역 아파트 미분양 물량은 오랜 기간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경주시와 부동산 빅데이터에 따르면 지역 미분양가구수는 1월 1387호, 2월 1449호로 조사됐다. 지역 미분양가구수는 1년 전 2023년 1월 1460호, 2월 1433호보다 증가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미분양 물량이 쌓이고 있다. 지역에서 미분양이 가장 많은 곳은 오는 6월 입주 예정인 진현동 엘크루 헤리파크다. 이곳은 총분양 337가구 중 269가구가 미분양으로 남아 분양률 21%에 그쳤다. 그리고 2015년 입주한 황성동 경일리버뷰는 현재까지 미분양 물량이 쌓여 지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미분양으로 남아 있다. 지역에 쌓인 미분양 물량도 넘쳐나고 있지만 문제는 공개되지 않는 미분양 물량이다. 현재 충효동 웰라움 더 테라스 230가구, 건천읍 해링턴 플레이스 549가구, 황성동 힐스테이트 608가구가 미분양 현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미분양 현황을 공개하지 않은 곳 대부분 미분양이라며 향후 미분양 물량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경주, 27개월 연속 미분양 관리지역 지정 지역 미분양 물량이 줄어들지 않으면서 경주는 27개월 연속, 전국 최장 미분양관리지역으로 선정됐다. 주택보증공사는 지난 5일 경주시를 비롯한 포항시, 대구 등 9곳을 다음 달 9일까지 제87차 미분양관리지역으로 선정했다. 경주시는 지난 2022년 3월 미분양관리지역으로 지정된 후 다음 달까지 기간이 연장되며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리지역으로 머물게 됐다. 지역 주택 보급률 110% 지역 아파트 미분양 물량 해소를 위해서는 외부 투자 수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역 주택 보급률이 110%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역 주택 수는 세대수보다 많은 상황이다. 경주시에 따르면 3월 기준 지역 총 세대수는 12만4683호, 주택수는 13만8033호로 보급률 110.7%에 달했다. 주택유형별로 살펴보면 공동주택(아파트 5만4280호, 연립 3555호)이 가장 많았고 단독주택(4만3580호), 다가구(2만8628호), 다세대 (8040호) 순으로 집계됐다. 주택 보급률이 110%를 넘긴 상황에서 아파트 공급은 더욱 늘어날 예정이다. 올해와 내년 약 4000세대가 넘는 아파트 입주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534호 규모의 아파트를 시작으로 4월 494호, 337호가 입주 예정돼 있다. 그리고 오는 7월 292호, 2025년에도 2647세대 등 향후 1년간 약 4000여 세대가 입주를 시작할 예정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지역은 주택 보급률 100%를 넘긴 상태에서 향후 2000세대 이상의 입주 물량이 쏟아지면 미분양 해소가 쉽지 않다”면서 “외부 투자 수요도 줄어들면서 미분양 해소에 어려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월성 4호기(가압중수로형 70만㎾급)가 20일 제20차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갔다. 한수원(주) 월성원자력본부에 따르면 월성 4호기는 정기검사와 원자로 안전성 향상을 위한 예방정비를 위해 20일 오전 9시 발전을 정지하고, 53.6일간의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갔다.계획예방정비 기간 월성 4호기는 법정검사, 터빈제어 및 비상정..
신라향가문화원이 오는 25일 저녁 7시, 원석컨벤션 웨딩홀에서 ‘해설이 있는 향가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번 콘서트는 ‘故 사가 이임수 교수 향가 발자취를 찾아’라는 부제를 가지고, 신라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향가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선보이는 무대로 꾸며진다.
경주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경주범피)는 대구지검 경주지청과 공동으로 18일 ‘범죄 피해자 원스톱지원 네트워크 실무회의’를 개최했다.대구지검 경주지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회의에는 검찰과 경주시, 경찰서, 교육청, 건강보험공단, 의료기관, 상담소 등 14개 기관 20명의 실무자들이 참석했다. 김지영 부장검사의..
마음을 그리고 소리를 design하다 살아가면서 매 순간 느끼는 마음의 소리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잔상들... 소중한 순간들은 생각보다 너무 연약하고 쉽게 사라져 버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마음의 소리들은 공간에 따라 변화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담고자 마음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잡아둔 채 작업으로 남기고 있다. 작품은 한글의 아름다운 모양을 매개로 소리를 담고, 물감이 층층이 쌓이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어 만들어지고 표현된다. 이를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쌓이고 수축해서 사라져 버리는 시각적인 것과 같이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는 마음의 소리들을 캔버스에 올린 물감들의 레이어를 통해 소리를 design한다.
20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유치를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정부가 4·10 총선이 끝나면서 개최도시 선정을 위한 절차를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당장 19일까지 유치 신청서를 접수한 뒤 5월 현장실사와 유치계획 설명회를 거쳐 오는 6월경 개최도시를 결정할 예정이다. 지난 2005년 APEC 정상회의를 개최했던 부산이 유치 공모에 불참 의사를 밝히면서 경주를 비롯해 제주와 인천 등 3개 도시가 경쟁을 벌이게 됐다. 가장 강력한 후보 도시이자 같은 영남권인 부산이 빠지면서 경주유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교부는 APEC 정상회의 유치 목적과 기본 계획의 우수성, 국제회의에 부합하는 도시 여건, 정상회의 운영 여건, 국가와 지역 발전 기여도 등을 선정기준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경주시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 △대한민국 경제발전 경험 공유 △경호·안전 안심 도시 △다양한 국제회의 개최 경험으로 준비된 국제회의도시 등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공모 절차 준비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본지는 경주가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로서의 당위성이 차고 넘친다고 강조해왔다. 신라 천년고도 경주가 간직한 문화유산을 토대로 K-컬처의 뿌리와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세계와 공유할 수 있다는 점. 또 경주의 원전·자동차 부품, 포항 철강·2차 전지, 구미 전자·반도체, 안동 바이오산업 등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릴 수 있다는 점. 회의 장소인 보문관광단지는 경호와 편의성 측면에서 최적지라는 점. 또 G20 재무장관회의, APEC 교육장관회의, 세계물포럼, OWHC 세계총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 등은 경주만의 강점이다. 또 경주는 3개 도시 중 유일한 기초자치단체로서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과 APEC의 포용적 성장 가치 실현에 가장 부합한 도시다. 특히 ‘2025 APEC 경주유치를 위한 선진시민의식 및 손님맞이 캠페인’을 통해 지역사회의 정상회의 유치 의지를 재결집하고 개최도시 시민의 준비된 모습을 대내외에 알리는 등 타 도시와는 차별화된 유치 활동도 벌이고 있다.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 결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경주유치를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할 때다. 경주의 백년대계를 앞당길 수 있도록 경주시, 경북도, 지역 정치권의 몫에다 경주시민들의 유치 의지를 더해 APEC 정상회의가 반드시 경주에 유치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 범죄가 더욱 지능적인 수법으로 진화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최근 들어 QR코드 피싱인 일명 ‘큐싱(큐알코드와 피싱의 합성어)’ 사기가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경주지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발생했다. 큐싱은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하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개인정보, 비밀번호 등을 탈취해 가는 사기 방식이다. 황성동에 거주하는 30대 남성은 최근 주말 공유 킥보드를 이용하기 위해 QR코드를 스캔했는데 이상한 사이트로 접속됐다고 제보해왔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꺼서 사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주시와 경주경찰서 등에 따르면 현재까지 큐싱으로 인한 사기 피해 접수사례는 없다. 하지만 관광도시 경주는 자전거, 킥보드 등 공유모빌리티를 이용하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많아 이 같은 사기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높다. 큐싱 사기 예방법으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QR코드 촬영 금지, QR코드 촬영 후 연결된 사이트 주소 확인, 공유모빌리티 이용 시 QR코드 위 스티커가 덧붙여져 있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만약 실수로 QR코드 촬영 후 원치 않은 앱이 설치됐다면 스마트폰의 비행기모드를 활성화 한 뒤 경찰 또는 휴대폰 서비스업체를 찾아 악성앱을 삭제해야 한다. 큐싱 사기 이외에도 최근 카드 발급과 배송을 미끼로 한 피싱 사기, 범칙금 고지서 피싱, 부고 알림 피싱 등등 새로운 피싱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같은 피싱 사기는 인지가 확실한 사람들도 쉽게 넘어갈 만한 구체적인 수법으로 피해를 입히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당할 수 있는 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경계심을 늦추는 순간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의심하기와 확인하기를 습관화해야 한다. 또 출처가 불분명한 문자메시지는 이에 포함된 URL이나 전화번호를 누르지 말고 반드시 삭제하는 것이 상책이다.
지난해 4월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름 서너 개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바 있다. 그중 하나가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중 토트넘(Tottenham Hotspurs)팀의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3월 말 런던 토트넘 홈에서 열리는 손 선수 경기를 잠시 미루고 국내에 들어와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어떤 형태로든 참가하는 일이 또 하나의 선택지로 떠올랐다. 당시 필자가 지지하는 정당이 공천잡음과 당 대표 피습 등의 이슈로 지지율이 요동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에겐 작지만, 토트넘 경기 직관으로 소요되는 시간과 돈만 투자한다면, 그래서 이번 선거에 작지만 내 나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기꺼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3월 중순 한 달 남짓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 런던행이 아닌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선 ‘에어비엔비(Airbnb)’ 사이트를 통해 숙소를 예약하고 황남동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덕분에 시간을 두고 경주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호사를 누렸다. 첫날, 천변을 따라 걷다가 황성공원을 거쳐 모교인 신라중학교 교정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다 공원 일대를 둘러본 필자는 3~40년 전의 울창한 소나무, 참나무는 간 데 없고 공연장, 축구 보조경기장, 아스팔트 도로가 들어서 있어 큰 상실감을 느꼈다. 소나무 숲의 울창함은 간데없고, 간신히 남은 솔숲 오솔길을 따라 김유신 장군 동상 아래, 목월 시인의 얼룩소 시비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소위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난개발을 진행하기보다 수많은 이야기와 추억이 담긴 소중한 이곳을 잘 보존했었더라면 나의 추억여행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쪽 정치세력만 지지해온 내 고향 경주는 정치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주지 못하고, 중앙정치의 들러리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그날 저녁 Airbnb에서 경주의 야경을 둘러보고 들어온 이태리 여행객 Lisa(여, 32)를 만났다. 방금 동궁과월지와 월정교 야경을 둘러본 그녀에게 경주에 대한 첫인상을 물으니 “현대식으로 개조된 왕궁터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고도인데 왜 이렇게 식당과 빵집들이 많은지 의아하다”며 경주는 하루만 체류하고 내일 아침 다음 여행지인 부산으로 떠날 것이라고 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경주의 모습은 필자가 느끼는 경주에 대한 인상과 다르지 않았다. 난개발된 황성공원 지구, 경주의 멋과 아름다움이 잘 간직된 것이 아닌 값싼 외래자본으로 치장된 기와지붕과 맛집들, 외지인만 가득한 도심은 30여년 만에 찾은 내게 다소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뒤 지인이 출마한 지역구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하면서 침울했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지난 21대 선거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신 후보이자 필자의 군 선배이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분이다 보니 바닥 정서가 나쁘진 않은 곳이었다. 개소식 마지막 순서로 시민 세 분이 자원해서 지지발언 했는데, 필자는 500만 재외교포를 대신한다며 자원해서 발언대에 올랐다. 군에서 가다듬은 목소리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멋진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었다. 이번 4.10 선거에서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선택했고 이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결과적으로 지지한 후보 중 한 분은 경주에서 지난 총선 대비 10% 정도 득표율을 끌어올려 선전했고 또 다른 한 후보의 경우 500표 차 이하로 낙선되는 뼈아픈 결과를 안았으나 험지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훗날에...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시인의 표현처럼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으나 이상과 꿈을 위해 달려온 그들의 열정과 노력은 우리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오래도록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될 것이다.
“별기에 따르면 이 왕의 치세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유사(1281년)의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로부터 173년 뒤엔 “첨성대는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 태종 정관 7년 계사(633년)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경상도 경주부’에 기록하여 연도까지 밝히고 있다. 선덕여왕의 업적을 하나 더 보면 황룡사 창건(553년)으로부터 93년 뒤 645년 9층목탑을 완공하였다. 높이 80m에 이르는 신라삼보의 하나로 1층 일본[倭]으로부터 9층 예맥(穢貊)에 이르기까지 신라 주변의 9개국[九韓]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선덕여왕이 꿈꾸던 하늘, 오늘날 경주도 스카이웨이로 실현하면 얼마나 좋을까. 선덕여왕은 왜 첨성대를 쌓고 황룡사9층목탑을 세웠을까? 신라 초기의 궁궐이 있던 곳은 초승달 모양의 월성(月城)이다. 단순히 천문대의 기능을 넘어 밤을 모티브로 하는 달과 별에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축조한 것은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은 급기야 신라인들은 황룡사9층목탑의 찌를 듯한 높이에 올라서서 하늘을 향유하고자 하였다는데 이른다. 하늘과 교감하고 하늘에 이르고자 한 신라 사람들의 염원을 선덕여왕이 풀었다고 본다. 이는 비록 우리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동서양을 통틀어 달과 별로 총칭되는 밤하늘의 이미지를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담은 나라가 40개국이 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돌아와 경주는 하늘에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가? 어쩌면 앞으로 경주가 살 길을 하늘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경주의 핫플(hot place)’은 당연 황리단길이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하루에 무려 8~9만명이 북적댄다. 이는 한옥에서 오는 뿌리의식과 정겨움이다. 경주시는 역사도시 경주에 걸맞게 특정 지역엔 집을 지을 때 한옥형 골기와 지붕을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하고 있다. 일반 지역 건물에서도 건축허가시에 지붕의 모양이 아름답도록 설계에 반영하는 시책을 수년 전부터 하고 있다. 이러한 계기는 경주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더불어 건물 지붕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어느 시장님이 유럽 출장지의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붕 모양과 색깔에 반해서 도입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경주는 철저히 소비자인 관광객의 구미에 맞는 수요자 중심의 관광자원 개발이 필요하다. 무수한 관람형 문화유산의 상대적, 차별적 우위는 이미 오래전에 퇴색되고 새로운 즐길거리, 먹거리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 번쯤 다녀가고는 계속적인 재방문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의 경리단길이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고 전주한옥마을의 선호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경주의 황리단길도 정점으로 치닫고 있어 그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즈음에 역사를 품고 힐링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오감 만족의 스카이웨이를 제안한다. 토목용어사전에 의하면 스카이웨이(sky-way)란 도심부나 역 주변의 건축물 상호를 도로 상공에서 연결하는 입체 보도교를 말하며, 일반적으로는 지붕·유리벽 등으로 전체면이 차폐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냥 높은 지대의 도로에서 조망하기 좋은 예는 서울의 북악스카이웨이가 있고 둥글게 지붕을 덮고 LED로 영상물을 방영하여 올려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은 대전 스카이로드가 있다.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높은 기둥을 세우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원형의 도보다리로는 포항 스페이스워크가 있다. 관객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국내 최대 규모 체험형 조형물이란 설명에 걸맞게 포항 환호공원에 위치하여 해발 81m, 333m 길이에서 내려다보는 360도 전경은 가히 일품이다. 경주시는 구도심 재생사업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단길’의 시너지를 위해 구도심지역을 금리단길로 명명하고 대대적인 시설 확충과 도시디자인 개선에 힘쓰고 있다. 황오동으로 편제되는 옛 시가지는 그동안 고도제한 등으로 높은 층의 건물이 비교적 적다. 또 옥상도 평면형이 대다수이다. 이들 건물들을 연결하여 스카이웨이를 만들면 경주의 하늘이 되는 것이다. 큰 건물의 옥상에는 카페나 쉼터를 조성하고 군데군데 구름다리나 흔들다리를 만들어 재미를 더하면 좋겠다. 중심 포인트에는 포항 스페이스워크처럼 아치와 원형을 접목한 트렉다리를 만들면 경주 시가지의 조망과 문화유산의 분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리라. 스카이웨이 아래의 상가로 내려가는 계단도 요소요소에 만들면 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꿈같은 아이디어가 현실에 이르기까지에는 넘어야 할 산이 참 많을 것이다. 건축 법규도 문제거니와 건물주와의 협의, 주거지역의 시민 사생활 보호, 필요한 재원 확보 등등. 그러나 인구소멸도시로 가는 경주의 앞날과 역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하락, 구도심의 황폐화를 대비하는 준비와 황리단길 방문객의 도심 유인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으면 한다. 신라시대 황룡사 탑을 짓기까지 창건 후 100년 가까이 걸렸다면 경주는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며 하늘로 다가가는 스카이웨이를 만들어 보자. 외래어를 피하자면 하늘다리, 별빛다리처럼 우리말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아예 시민 공모로 이름부터 지어 놓고 연년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경주의 조선문화가 집약된 양동마을,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마을 안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 낮은 경사면으로 여강이씨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1.14)의 은거지이자 사당으로 활용된 심수정(心水亭) 공간을 만난다. 정자는 소담한 공간에 이양재(二養齋), 삼관헌(三觀軒), 함허루(涵虛樓) 현판을 걸었고 모두가 농재 선생의 글 자경(自警)에서 가져왔으니, 그의 유교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이양재는 정자(程子)의 『주역』 이괘(頤卦) 풀이에서 “언어를 삼가서 자신의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여 자신의 몸을 기르는 것이다(愼言語以養其德 節飮食以養其體).”를 통해 말과 음식을 삼가고, 삼관헌은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서 “어진 자는 그 사랑을 볼 것이며, 지혜로운 자는 그 도리를 볼 것이며, 강한 자는 그 뜻을 볼 것이다(仁者可以觀其愛焉 知者可以觀其理焉 强者可以觀其志焉)”라며 예로서 모두를 살펴야 한다 하였고, 함허루는 『논어』에서 “학식이 있어도 없는 듯, 충실하되 빈 듯이 하며, 남이 나를 집적이더라도 따지지 않는다(有若無實若虛 犯而不較)”라며 증자(曾子)가 안연(顔淵)의 겸허한 덕성(德性)을 언급하였다. 농재 이언괄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11.23)의 동생으로 3살 터울이면서 스승이자 교우관계였다. 1547년 회재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강계부(江界府:石州)로 유배당하고, 1548년 4월에 계천군(鷄川君) 손소(孫召)의 따님이신 모친상을 당하며 집안은 더욱 안타까움에 처한다.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리 길을 지나 강계에 이른 농재, 형제의 정을 나눈다. 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우가 유배 간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기구한 인생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서천록(西遷錄)」에 1551년 8월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우 자용(子容:농재)과 작별하며 남긴 시가 애틋함을 전한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회재와 농재 형제 사이를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 두 형제에 비유하며 우애의 돈독함을 강조하였다. 정호는 이학(理學)의 이상주의학파에 영향을 끼쳤고, 정이는 합리주의학파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며 이들의 형제 간 우애는 인구에 회자된다. 고봉 기대승은 회재의 신도비명에서 “부모 섬기는 때에 사랑과 공경을 극진하였고, 철에 따라 따뜻하고 시원하게 지내도록 보살피며 입에 맞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예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고, 아우 이언괄과 우애와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라며 동생 이언괄과의 우애를 부각시켰다. 양동마을의 여러 인물 가운데 회재와 농재의 우애는 역사적 사건에 얽힌 슬픔이 서려 있고, 심수정과 영귀정의 건립을 통해 후손의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심수정기 - 회당 장석영 심수정은 동도의 성산 아래 양좌마을에 있고, 농재 이언괄 선생의 외루(畏壘:은거지)이다. 무릇 마음은 그친 물과 같고 그치면 고요하며, 고요함은 움직임의 근본이고 태극설의 정(靜)을 주로하고, 정좌(靜坐:고요히 앉음)는 배움을 잘하는 것이 되니 이는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 형제 이래로 학문의 종지(宗旨)였다. 선생의 유문(遺文)이 전하지 않아 그 전말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 『농재일고(聾齋逸稿)』가 있으니 이는 모두가 작지만 귀한 것이다. 공자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정(靜)이라는 한 글자는 마음속의 물(靜之一字 心中之水)”에서 정자의 이름을 취하였다. 선생은 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동생이다.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자가 “형제는 사람마다 모두가 있겠지만, 동생 된 자 가운데 동생의 도리를 다한 자는 공일 것이다”라 하였다. 당시 문원공이 석주(石州)의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천지가 꽉 막히고, 집안이 황폐해졌다. 형제간에 서로 죽기를 다투는 옛사람의 의리에 의하면 시골의 한미한 가문 신분으로 형의 일을 조정에 보고해 임금의 덕을 도왔고 형의 원통함을 폈으며, 밤마다 향을 피우고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이때 이기(李芑) 등의 무리가 헐뜯고 음해함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으나 강계의 위리안치를 거두어 몸을 보전하였고, 또 공이 형을 사랑하는 정성이 하늘에 이르러 마치 형이 말한 바와 같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는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대현(大賢)의 교화에 훈도되어 크고 작은 일에 성취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공을 살피려는 자는 대현의 동생 됨만을 살피고, 몸소 행하고 절실히 실천한 학문을 살피지 않는다면, 이 역시 정백자(程伯子:정호)가 자신의 동생[정이]을 인정하고, 숙자(叔子:정이)가 자신의 형[정호]에게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조정에서 작위를 내리고, 사림은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미 운천사(雲泉祠), 덕연사(德淵祠)에 배향되었으나 불행히도 훼철되었다. … 지금은 그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운천사 서쪽 10후도(侯道:활과 과녁의 거리) 거리에 심수정을 건립하고 을축년에 낙성식을 하였다. 형의 영귀정도 마침 같은 시기에 완성되어,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인다. … 이양재(二養齋), 삼관헌(三觀軒), 함허루(涵虛樓) 모두 유문 가운데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하는 말에서 취하였다.
매년 봄이면 벚꽃이 아름답게 경주를 물들인다. 벚꽃이 만개한 곳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나무는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낸다. 화사하게 피었던 벚꽃이 지고 초록색 싹이 나무를 다시 물들인다. 그렇게 벚나무는 봄 눈을 가득 머금었다가 연둣빛 새싹 옷을 입고 무더운 여름의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준비한다. 매년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벚나무를 보며 아줌마는 생각했다. ‘나는 어떤 나무일까?’ 아줌마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그렇게 잘나지도 않았고 뛰어난 능력도, 그렇다고 아주 부족하거나 문제를 갖고 있지도 않은 그저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성장했다. 반백의 나이가 된 지금, 아줌마는 여전히 미완성임을 깨닫는다.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인생을 안다고, 삶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보니 인생도 삶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지 정답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갈 뿐이다. 모두가 살아가지만,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인생의 황금기를 누구는 이삼십 대에, 누구는 환갑이 넘어서 맞기도 한다. 사철나무처럼 매년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리하다 거대한 풍모를 갖춘 나무가 되기도 하고, 묘목의 모습을 벗자마자 매년 과실을 수확하는 나무로 살아가는 삶이 있고, 벚나무처럼 화사한 벚꽃으로 봄의 절정기를 보여주고 이른 여름을 준비하며 녹색 잎을 싹 틔우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로 빈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철나무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황혼기에 거대한 풍모를 갖춘 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것이다. 과실 나무는 매년 수확하는 삶이지만 벚꽃은 봄의 화려함과 겨울의 앙상함을 매년 보여주는 삶이다. 또한 봄의 벚꽃은 햇빛 찬란한 개화기에는 화사함을 보여주지만, 개화기에 비바람을 맞은 벚꽃은 너저분한 쓰레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같은 나무지만 시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노력한 만큼 거둘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그저 나이테를 하나씩 늘려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이테 간격이 클 때도, 작을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조건이 원활하여 크게 성장한 해도 있겠지만, 가뭄으로 태풍으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한 해를 넘기기가 힘든 시절도 있으리라.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데로 살아가다 보면 나이테는 어김없이 생기며 우리의 삶은 모습을 갖춰간다. 나이테가 많아진 만큼 연륜도 생기고 여유도 생겼다. 결코 이삼십 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나이테가 쌓일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라고 아줌마는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알듯이, 과거의 내가 모여 오늘의 내가 되고, 오늘의 내가 쌓이고 쌓여 미래의 내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테를 만들어가면 된다. 이삼십 대에 꽃을 피울 인생인지, 황혼기에 꽃을 피울 인생인지, 매년 조금씩 수확하는 인생인지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의 나를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아줌마는 뭐, 엄청난 과거의 삶을 잘 살아서, 조언한다고 생각할까 봐 미리 고백한다. 물론 열정적인 날도 있었고 열심히 공부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날이 그렇진 않았다. 멍 때리는 날도 있었고 방황한 날도 있었고 불평불만 가득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을 때,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을 때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오늘의 아줌마를 있게 했고 내일의 꿈을 꾸는 아줌마로 키웠다고 생각한다. 갈망하니 길이 보이고, 열망하니 길이 열렸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방법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하나둘 쌓이니 요령이 생기고, 그런 경험들이 또 쌓이니 연륜이 되고 여유가 생겼다. 어떤 나무의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위기는 올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견뎌라. 힘겨운 나이테가 생긴 만큼, 삶은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다.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후반 유럽에 만연했던 국민주의 음악이 아닌, 미술사조 인상주의와 같은 이름의 ‘인상파 음악’이 대두한다. 드뷔시가 바로 인상파 음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상파 음악으로 근대음악과 현대음악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 음악계의 혁명가로 평가받는다. 드뷔시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11살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했고, 12살 때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으며, 17살 때는 악보 초견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22살(1884년)에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수상한 것은 프랑스 음악천재의 계보를 잇는 드뷔시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드뷔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전통음악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는 이 음악에서 매우 특별한 영감을 받았는데, 바로 이때 만든 작품이 ‘달빛(Clair de Lune, 1890)’이다. 달빛은 한자로 월광(月光)인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구별하고자 드뷔시의 작품을 보통 ‘달빛’이라 부른다. 달빛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세 번째 곡이다. 우리는 트란 안 훙 감독의 프랑스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1993)를 수놓고 있는 드뷔시의 달빛 멜로디를 아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1894년 드뷔시는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é, 1842-1898)의 시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아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10분 길이의 교향시로, 나무의 신이 향락을 즐긴다는 내용이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화음의 사용으로 인상주의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 작품은 서양 음악사의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드뷔시는 오페라에도 손을 댄다.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로 1902년 오페라를 발표한다. 오페라는 희극처럼 5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중세에 있었다는 상상의 나라를 무대로, 남편의 동생을 사랑한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다. 바그너의 비극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드뷔시가 원숙기에 접어들어 만든 교향시 ‘바다’(1905)는 그가 어렸을 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지중해에 연한 도시 칸(Cannes)에 머물 때의 경험이 밑바탕된 작품이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가능한 모든 색채를 음악에 도입한 본격적인 인상파 음악이다. 초판 악보에 실린 일본의 유명작가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 1760-1849)의 우키요에 작품 ‘파도’로 작품에 대한 ‘인상’을 강조했다. 드뷔시는 말년에 행복하지 못했다. 타고난 바람기로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고, 낭비벽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딸은 부모에 앞서 죽었고, 얼마 안 가 드뷔시 역시 직장암에 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져 갔지만, 필사적으로 창작활동에 매달렸다. 결국 드뷔시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56세(1918년)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그의 작품번호 두문자는 독특하게도 ‘L’이다. 프랑스의 음악학자인 르쉬르(François Lesure)가 드뷔시의 작품을 정리했다.
경주시가 반려식물을 키우는 시민을 위해 ‘찾아가는 반려식물 돌봄 서비스’를 실시한다. <사진> 이는 치료센터 이용이 어려운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위한 사업이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으로 전문가가 찾아가 물관리, 병·해충 관리 등 전반적인 반려식물 관리 컨설팅과 함께 분갈이 서비스도 제공한다. 16일을 시작으로 경주용강 LH아파트 등 아파트 3곳에서 실시하고, 하반기엔 9~10월 중 추가로 2회를 실시할 예정이다. 세대당 화분 2개의 분갈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분갈이할 새 화분은 직접 가지고 와야 한다. 앞서 시는 지난 2022년부터 반려식물 관리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해 반려식물 치료센터 10곳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올해 첫 전국여자야구대회가 천년 역사와 문화 도시 경주에서 열리고 있다. 경주시와 한국여자야구연맹이 주최하고, 경주시야구소프트볼협회와 한국여자야구연맹이 주관하는 ‘제7회 선덕여왕배 전국여자야구대회’가 지난 13일 경주베이스볼파크에서 막을 열었다. 한국여자야구연맹은 13일~14일, 20일~21일 2주간 주말 양일에 걸쳐 경주베이스볼파크와 경주고 야구장 등 경주 일대에서 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 34개 팀, 700여명의 여자야구 선수와 관계자들이 경주시를 방문한다. 대회는 리그 분리 토너먼트 형식으로, 챔프리그와 퓨처리그로 나눠 총 34개 경기가 치러진다. 13일 첫 경기를 시작으로, 모든 경기가 치러진 뒤 21일 챔프리그 결승전과 이어지는 시상식을 끝으로 대회가 마무리된다. 경기는 경주베이스볼파크 1, 2구장과 경주고 야구장 등 총 3개 구장에서 열린다. 지난 13일과 14일 예선부터 8강전, 20일과 21일에는 준결승과 3·4위전, 결승전이 펼쳐진다. 한국여자야구연맹 황정희 회장은 “천년 역사, 풍부한 문화가 꽃핀 경주시에서 전국여자야구대회가 개최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며 “돈독한 팀워크로 추억을 쌓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여자야구인들의 우정을 다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내가 경주최부자를 쓰겠다고 다짐했을 때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생활전반에 대한 이야기다. 최부자댁에서는 무엇을 먹었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특별한 생활을 했을까? 이것은 나로서는 각별히 들여다보고 싶은 분야였다. 사람이 사는 것이 다 비슷한데 이 전통의 명가, 12대의 부잣집이라면 얼마나 다양한 음식과 옷, 특별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사실 최염 선생님께 이런 것을 여쭈었을 때 최염 선생님도 적잖이 호기심을 내비치시면서 ‘그런 게 이야기가 될까?’ 하시면서 미심쩍어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게 더 중요한 이야기였다. 앞 호에서 남천변으로 들어오던 나락 행렬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 그 길이 최부자댁 앞 공터를 기점으로 지금의 월정교 앞으로 해서 계림을 지나 반월성과 첨성대, 박물관과 시내로도 통하는데 그 길 역시 곡식 섬을 실어 오던 소달구지들의 길이었을 것이다. 또 지금 주차장 자리로 쓰이는 최부자댁 앞 넓은 공터 역시 처음 이사를 오던 최기영(1768~1843) 공 때부터 있던 것이다. 최부자댁에는 800석짜리 곳간이 지금도 있고 경작지들의 분포에 따라 이조리, 울산 등에 이런 곳간이 7개 더 있었다. 나락을 분산해서 보관했던 것이다. 참고로 ‘만석의 곡식’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잘 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쌀이 주식이던 시절 1만명이 일 년 동안 먹을 정도의 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처럼 쌀을 덜 먹는 경우에는 2만명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최국선 공 이후 최부자댁이 대대로 빈민구제와 과객 대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충분한 양의 양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두는 쌀의 3분의 1은 가용, 3분의 1은 빈민구제, 1000석은 접빈객, 나머지는 치수와 공공사업으로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최부자댁의 1만석 중 3분의 1은 집안 대소가가 함께 쓰는 가용(家用)으로 사용했고 3분의 1은 빈민구제로 활용했다. 과객을 후히 대접했는데 오히려 그 부분은 비용이 적게 들어가 연간 1000석 정도 사용된 듯하다. 그 나머지는 보막이나 농로개설 등 치수사업이나 요즘의 공공사업에 사용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은 단순히 쌀에 대한 논의일 뿐, 최부자댁에는 다른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산지별로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최부자댁 소작농들은 대를 이어서 최부자댁 논밭을 관리해 왔고 그 규모도 어지간한 부농 못지않게 큰 곳들이었다. 그런 소작농들이 줄잡아 수백 집이었다. 그들은 경주와 울산, 영천 등 사방에 퍼져 살면서 철마다 자신들의 집 근처에서 나는 작물이나 해산물, 혹은 잘 말린 엽초(담배잎)나 특별한 먹거리들을 최부자댁으로 가져왔다. 이것은 마치 지방 관아에서 중앙조정에 공물을 보내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다른 것은 국가공물과 달리 이게 강제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작하는 입장에서 누군들 최부자댁에 인심을 얻고 싶지 않았을까?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소작 관계가 완전히 청산된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전에 소작하던 분들이 철마다 미역이며 생선, 산나물, 과일 등을 택배로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하물며 실제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이던 그 시절에는 어떠했을까! 그래서 최부자댁 찬방에는 철마다 산해진미 온갖 음식 재료들이 떨어질 새가 없었다. 말린 전복이나 건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산나물이면 산나물, 해산물이면 해산물 부족할 게 없었다. 이런 진귀한 재료들은 대부분 제수용으로 썼고 동네에 퍼져 사는 친척들과 각 대를 이은 사돈댁, 또는 인사를 차리기 위한 여러 집안에 보내졌다. 귀한 손님들을 맞을 때 특별히 내놓은 음식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부자댁 후원에는 가산으로 쌓아 올린 언덕 뒤로 ‘뒤솔밭’과 보비림이 있고 그 주변에는 수천 평의 밭이 펼쳐져 있어서 배추나 무, 혹은 음식에 필요한 각종 야채는 대부분 자급자족이 되었다. 그러니 최부자댁은 사시사철 산해진미를 먹지 않았을까?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 “우리 식구들이 평소 먹는 음식은 외부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굉장히 검소했어요. 그것은 대를 이어오며 호화와 사치를 경계한 가르침 때문이었지 싶어요. 식구들이 평소에 먹은 반찬은 일주일에 고깃국 한 번 올라오는 정도 이외에는 흔히 먹는 제철 생선에 채소류가 전부였어요” 그렇다면 최부자댁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음식들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최부자댁 전통음식의 원형은 아무래도 사옹원 참봉을 지내셨던 최국선 공(1631~1681)의 영향이 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부자댁 고유의 술, 법주다. 이 술은 최국선 공이 사옹원 참봉으로 봉직하던 시절에 마음먹고 그 비법을 배우고 익힌 후 낙향하자마자 담그기 시작한 술로 알려져 있다. 최부자댁 법주는 달고 농도가 진한 것이 특징, 서애 류성룡 선생 가문의 가양주로도 옮겨가 “할아버지는 다른 곳에는 도량이 넓으셨는데 유독 술에는 엄하셨어요!” 최부자댁 법주(法酒)는 최부자댁 며느리들이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품목이었다. 온갖 데 인자하고 말수가 적으셨던 문파 선생님이셨지만 유독 술에 대해서만큼은 깐깐하기 이를 데 없어 조금이라도 술맛이 이상하면 불호령을 치셨다고 한다. 그래서 술이 익을 무렵이면 최염 선생님의 할머니나 어머니는 술 항아리들 근처에서 떠나실 줄 몰랐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놓칠새라 노심초사하셨다. 반면에 문파 선생님이 술맛을 보신 후 흡족해하시면 온갖 세상의 근심을 내려놓으신 듯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하셨단다. “이 술은 당도가 진해 술 한 방울을 상에 흘려 놓으면 금방 굳어져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찐득찐득하게 들러붙을 정도예요. 그렇다고 술이 특별히 달지도 않아... 우리집 안채 한쪽에는 날씨가 무더울 때가 아니면 언제나 술이 익고 있었지. 독이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언제건 제때에 마실 수 있도록 독이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 술 거르는 날도 거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해져 있었고. 우리 집 술은 당도가 강해서 다른 집 술은 거른 후 보름을 못 넘기고 시큼하게 변하는데 우리 집 술은 두어 달을 둬도 맛이 변하지 않지요!” 이 술은 지금도 최염 선생님 댁에서 빚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안동의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가댁에서 가양주로 알려진 술은 요즘은 꽤 유명해진 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술 역시 최부자댁 가양주가 옮겨간 전통 최부잣집 술이다. 그 이유는 바로 최염 선생님의 누님 때문이다. 서애 종가 14대 종부로 시집간 누님이 최부자댁 술을 그대로 이어서 빚은 술이 지금은 서애 종가의 가양주로 알려진 것이다. 나는 이 술을 운 좋게도 직접 마셔 볼 수 있었다. 2015년 10월에 서애 선생 종가에서 제 15대 종손인 류창해 선생의 종손 취임식이 열렸다. 최염 선생님을 모시고 행사에 참석한 나는 뜻밖에 엄격하게 제한된 취임식 장면을 종손의 외삼촌이신 최염 선생님의 추천으로 촬영할 수 있는 특권도 얻었고 최염 선생님의 누님이신 14대 종부님과 겸상으로 밥도 먹는 영광을 누렸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최부자댁 법주를 맛볼 수 있었다. 은근히 달면서도 특별히 고아한 향기가 나는 것이 ‘신선주’가 따로 없었다. 여기서 최부자댁 전래의 육포도 함께 맛보고 몇 쪽 얻어오는 특권도 누렸는데 이 육포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최부자댁 전통 법주와 달리 경주 교촌에 가면 최부자댁 본가 옆에 ‘교동법주’라는 간판이 달려 있고 실제로 꽤 맛이 좋은 술이 있다. 그러나 이 술은 최부자댁 비법을 담은 술은 아니다. 이 술은 최부자댁 친척 며느리이신 ‘배영신’이란 분이 빚은 술로 그 댁의 고유한 비법을 담아 만든 술로 알려져 있다. 지금 배영신 할머니는 안 계시고 그 아드님과 며느리 되시는 분이 빚고 계시는데 이 술 역시 탁월한 향기와 맛이 일품이다. 교촌에 가면 가끔 사서 부모님과 나누어 마시는데 약간 비싸 보이는 술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맛있다. 마침 지난번 교촌에 갔을 때 요석궁 담에 ‘경주최부자댁 방식으로 저온숙성한 가양주 ‘대몽제’‘라는 광고를 보았다. 가주이신 최인환 회장님 역시 당당한 최부자댁 후손이니 비법을 알고 계실 법하다. 한 병 사서 맛보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문을 닫은 시간이라 구입하지 못해 아쉬웠다. 참고로 최부자댁 법주의 제조법은 최염 선생님의 사모님과 자부님께도 전승되어 특허청에 상표등록도 해놓았다. 최부자댁 법주에 대해 말씀을 들을 당시 최염 선생님께 왜 최부자댁 법주를 상품화하시지 않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우리 집 술은 찹쌀로 만드는데 재료에서부터 달라서 교동법주 정도의 용량으로 술을 담근다면 한 병에 십만 원 훨씬 넘는 고가가 될 겁니다” 또 하나, 최부자댁과 관련된 것으로 소문난 유명한 술이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경주법주’다. 이 술은 최부자댁과 전혀 관련 없고 ㈜금복주에서 경주에 공장을 두고 생산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윤을곡 마애불좌상 햇살이 일찍 찾아드는 동쪽의 땅, 서라벌의 아침이 환하다.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 두 봉우리가 너른 들판 한가운데 질펀히 누웠다. 영물인 거북이 한 마리가 서라벌 깊숙이 엎드린 형상이다. 오늘은 남산 윤을곡 골짜기를 지나 부흥사를 지나 늠비봉 절터까지 올라볼 참이다. 윤을곡과 부엉골 갈림길에서 윤을곡 산행로를 따라 걷다 왼쪽 산비탈을 오른다. 급한 경사 길에 지쳐 몇 번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드니 지척에 ‘ㄱ’ 자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윤을곡(유느리골) 마애불좌상’이다. 누가 부러 가져다 놓은 병풍처럼 바위는 정교하게 꺾여있다. 누구는 ‘삼신(三神) 바위’라고도 하고, 누구는 ‘삼불암(三佛庵)’ 또는 ‘마애삼체불(磨崖三體佛)’이라고도 한다. ‘마애’는 자연 암벽에 무엇을 조각한 것을 일컫는데 주로 불상을 말한다. 정면 남쪽을 향한 바위엔 두 기의 부처를, 오른쪽 서쪽을 향한 바위엔 한 기의 부처를 새겼다. 정면 두 기의 부처는 선이 굵고 선명하게 도드라져 남성스럽다. 반면 서쪽을 향한 한 기의 부처는 선이 얕고 가늘어 도드라짐이 약하다. 석공이 초보였는지 서툰 솜씨다.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불린다.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체 좌우엔 부처가 한 기씩, 모두 네 기가 더 새겨져 있다. 남향을 한 부처와 서향을 한 부처는 새김의 기법도 달라 서로 다른 석공의 작품으로 느껴진다. 남쪽을 향한 두 기의 부처 중, 오른쪽 부처의 어깨 쪽에는 ‘태화 9년 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835년) 때 새긴 부처인 셈이다. 왼쪽의 부처는 약사발을 든 약사여래불로 코도 닳았고 눈도 움푹 파였다. 하필 눈이고 코다. 흥덕왕 시절, 신라는 고통에 시달렸다. 831년 지진과 832년 가뭄, 833년 기근으로 몹시 힘든 시기였다. 절박했던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오로지 신(神)을 중심에 둔 종교뿐이었을 것이다. 존귀한 부처의 몸을 빌려서라도 살고자 했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부처 아니던가. 절망적인 사람에게 절박함이 더해질 때, 사람은 이성을 잃고 본능을 앞세우게 된다. 그러니 부처의 파인 눈이나 코는 중생의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유일한 위안이고 안식처였을 것이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등산로로 내려와 오른쪽 산기슭 자드락길을 오른다. 산허리까지 올라 시야를 뻗으니 맞은편 절벽이 지척이다. 부엉골이다. 거대한 암벽, 그 어디쯤에서 대낮에도 부엉이가 운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엉골은 산세가 깊고 험하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은 부엉더미 산허리에서 나를 맞았다. 서쪽 절벽을 향한 부처는 세월 탓인지 암질 탓인지, 윤곽이 흐릿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손을 대면 돌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아, 곧 열반에 들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는 전체적인 선의 깊이가 얕고 가는, 선각에 가깝다. 산기슭 아래로 서너 발 물러서서 부처를 보니, 그제야 부처는 온전히 거기 있었다. 연꽃 대좌에 앉은 부처는 옷 주름의 곡선이 부드럽고, 연꽃의 표현이 세밀해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부처를 등지고 서니 남산 팔경의 하나인 부엉골 황금대가 훤히 내다보인다. 황금대는 석양이 질 무렵이면 골짜기 바위가 모두 황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석양과 함께 부처도 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황금여래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부엉골 능선 절벽에 자연바위 기단 삼아 우뚝 선 늠비봉 오층석탑 늠비봉으로 가는 길은 산세는 깊어도 길은 완만하다. 길목에 부흥사(富興寺)가 있다. 봄이 한창인 부흥사는 옛 절터에 새로 얹은 절집이다. 대웅전 한편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지붕돌 한 개가 유물처럼 놓였다. 대웅전 마당엔 벚꽃 그늘이 짙다.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이른 아침, 능선 위 만개한 벚꽃 사이로 새하얀 탑이 보인다. 늠비봉 오층석탑이다. ‘늠비’는 우뚝 선 봉우리에서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뜻한다. 금오산 삼릉 능선과 오른쪽 해목령 능선 가운데, 부엉골을 향해 뻗어가던 능선이 갑자기 뚝 끊겨 절벽을 이룬다. 그 봉우리가 늠비봉이다. 포석곡 제6사지인 작은 늠비 절터 입구에 들어서면 늠비봉 절벽에 서 있는 오층석탑의 웅장함에 말문이 막힌다. 시원스레 잘 생겼다는 표현 외에 딱히 어울리는 말이 없다. 늠비봉 아래 무너지고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했다고는 하나, 1000년 전 이렇게 웅장하게 탑을 쌓을 기술이 있었느냐는 의문이 든다. 믿기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 웅대함에 대한 놀라움이다. 대부분의 탑재가 없어지거나 약해, 옛 석재와 새 석재를 섞어 복원했기에 지나치게 현대적이다. 하지만 산봉우리 절벽 바위에 저렇게 높은 탑을 우뚝 세운 건, 현대 기술이라 할지라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산봉우리 자연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올린 탑은,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 전체인 셈이다.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치솟은 다섯 개의 지붕돌 모서리가 조금의 틀어짐 없이 일직선으로 나란하다. 누구의 발원으로 세워졌는지 모르나, 석재를 고르고 다듬고 올렸을 적잖은 공들임은 오직 불심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서라벌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쌓은 것은 아닐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득히 먼 고국을 향했을 백제인들. 그들의 짙은 그리움만큼 탑은 한 층 한 층 높이를 더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붕돌은 다섯 개에 이르렀고, 그들은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을 것이다. 탑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느낌도 다르다. 백제인이 기원이라는 가정 하에 탑을 보노라면 무한한 쓸쓸함과 애잔함이 더해진다. 크고 단단한 바위는 자체만으로 신성한 신앙처가 된다. 그들이 쌓은 것은 단순한 예술적 상징의 돌탑이 아니다. 마음을 기댈 버팀목이자 위로이자 안식처였다. 자연 바위를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으니 탑의 뿌리는 가늠하기 어려운 지맥 저 깊은 어디쯤일 것이다. 사람은 비록 세파에 흔들릴지언정 암반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흔들리지 못하니, 그들의 웅혼한 염원을 담은 탑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작은 늠비봉 절터, 큰 늠비봉 절터 탑 뒤엔 작은 늠비봉 절터가 있다. 터를 보니 그리 큰 절은 아니었을 테고, 단칸의 법당 정도만 겨우 갖춘 암자였을 것이다. 앞은 절벽이고, 사방 천지는 탁 트였으니 불어오는 비바람에 부단히 고단했을 것이다. 탑을 뒤로하고 금오봉을 오른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에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절정이다. 100여m 남짓 올랐을까.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절터가 아닐까’ 생각할 무렵, 한 치 앞에 절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나타난다. ‘포석곡 제7사지(큰늠비 절터)’를 알리는 표지 뒤로 일대에서 수습한 탑재 일부를 정리해 놓았다. 잡목이 우거진 숲 사이로 평지가 보인다. 필시 작은 암자는 아니었을 테다. 법당과 별도의 요사 한 채가 들어서도 될 만큼의 넓이다. 바람이 일자 대숲이 요란하다. 나는 나른한 상상으로 빠져든다. 숲은 사라지고 법당과 요사채가 가지런히 놓인다. 큰스님은 법당에서 염불을 외고, 수행스님은 마당을 쓴다. 또 다른 스님은 장작을 패고, 동자승은 마당에서 볕을 쬔다. 동자승 발치에 흰둥이 한 마리가 몸을 누였는데, 동자승이 머리를 쓸어주면 졸음에 겨운 듯 눈을 뜨지 못한다. 등 굽은 보살이 찾아와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법당으로 들어선다. 한참 뒤 법당에서 나온 보살은 산기슭 바위마다 손을 모아 합장한다. 어느 따스한 봄날의 절간 풍경이 곱고 나른하다. 한 무리 바람이 일고, 등산객들이 절터를 스치고 멀어진다. 평지는 다시 잡목 우거진 절터로 바뀐다. 큰 늠비 절터에서 뒤를 돌아본다. 우뚝 선 오층석탑과 경주 시가지가 훤하다. 사람들이 바위마다 부처를 새기고 돌을 쌓아 탑을 올린 이유와 서라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법등을 올리며 염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신(神)을 찾아 산으로 왔다. 산과의 교감이 곧 신과의 교감이라는 것을 믿으며, 신은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보듬어 치유하는 존재라고 믿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찾아든 골짜기엔 아직도 신이 살아서 발길 미치는 자마다 복을 누리게 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세월이 흘러 탑은 와르르 무너졌을지언정, 제 뿌리는 늠비봉이라는 것을 탑은 알 것이다. 수백 년 흘러, 탑은 후대의 손을 빌려 다시 일어섰다. 탑이 어떤 모습으로 긴 세월을 살아남았든 제 뿌리의 근원만은 잊지 않았다. 다시 늠비봉으로 내려와 석탑이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는다. 해가 서녘으로 기운다. 탑을 떠받들던 부재들은 늠비봉 한편에 누워 ‘과거’가 되고, 탑은 ‘현재’가 되어 세상에 순응하고 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