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대 규모 유소년 축구대회 ‘2024 화랑대기 전국 유소년 축구대회’가 다음 달 5일부터 15일간 경주에서 열린다. 올해 21회째를 맞는 이번 대회는 전국 학교·클럽 612개팀, 1만20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다. 지난해 8월 대회와 비교해 111개 팀이 더 참가하면서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다.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
경주시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회적 약자 100명에게 진료비를 지원한다. 반려동물 치료비, 수술, 검진, 접종 등으로 1인당 연간 최대 20만원까지 지원한다. 올해 첫 시행되는 이 사업은 사회적 약자의 심신 재활과 동물복지 향상을 위해 마련됐다.
비움 황금을 머금은 가을 연잎 사계절의 연잎과 연꽃을 그려보겠다는 생각으로 봄·여름 새벽마다 연꽃밭을 누비며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사진작가들이 줄지어 작품을 찾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연꽃밭에서 사라지고 텅 빈 가을 연잎만 남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계절이 된다. 가을과 겨울 사이, 벌레 먹은 연잎이 되어 보고 노랗게 물들어 말라버린 연잎이 되어 화폭에 담아 보며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잎을 그려냈다.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을 관찰하며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만든다. 텅 빈 연밥은 생멸을 거듭하는 비워졌지만 비워지지 않은 채움이다.
서울에 산 지 꽤 되었지만, 발음에서 배어 나오는 경상도 억양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고 고친다는 말 자체도 별로 달갑지 않다. 오래 살다 보니 수도권에서 태어난 친구들의 말투를 흉내는 내지만 그들과 완벽히 같지 않은 그런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불편한 점이 없고 감정표현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많아 앞으로도 바꾸지 않으려 한다. 경상도 출신 사람이 본인의 발음과 억양을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영국인이 미국에 산다고 하여 굳이 미국 말투를 따라 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엑센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서로 존중한다.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영어를 사용하는데, 또 그 억양은 각국의 특색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영국 남부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북쪽의 스코틀랜드지역으로 가면 게일어라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표지판에도 게일어가 병기되어 있다. 영국이 지역별로 언어의 편차가 큰 것은 표준어 중심의 교육보다는 지역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가 표준어로 통일되어야 하기보다는 공존을 통한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말과 문화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하는데 빠질 수 없다. 중국의 대제국 청나라를 경영한 만주족들은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졌음에도 한족에게 동화되어 이제 만주어를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언어가 사라지니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정체성도 희미해진 것이다. 반대로 그 지역의 언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지역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유명 도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카탈랑)를 공식 언어로 사용한다. 그들에게 지역 언어는 지역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들의 독자적인 말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하다. 사투리, 지역어를 보존하여 잘 사용하는 것은 우리 언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길이다. 지역어가 없는 상황은 지역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물론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방향이 한 곳으로 향한다면 다양성에서 나오는 문화의 힘은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도시가 모두 비슷한 모습과 형태를 가진다면 특색 없이 재미없는 공간이 되기 쉽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도시에서 사용하는 말이 가지는 분위기와 속도, 호흡은 고스란히 도시의 분위기, 속도, 발전 속도와 활력에도 반영된다. 문화와 삶은 도시에 녹아들어서 지역별로 특징 있는 공간이 형성되는데 문화의 대표주자인 말이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언어를 활성화하는 것은 지방소멸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부분 지역 언어는 촌스럽고 표준에서 벗어난 말로 취급되어 개그 소재로나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젊은이들이 지역과 지방 도시를 바라보는 생각에도 반영되고 있다. 지방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가서는 사투리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으려 말투부터 고치려 한다. 쓰는 말부터 자부심이 없는데 어떻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수 있을까? 표준어가 옳고 사투리는 틀렸다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나 행사에서 지역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카탈루나의 사례와 같이 지역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높은 자부심과 애착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경상도말에는 성조가 있다. 표준어는 고음과 저음이 있어 같은 단어지만 그 뜻을 구분할 수 있다. 경상도말에는 그 이상의 성조를 가지고 있어 더 많은 단어를 구분할 수 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가가가가’ 나 ‘e의 2승, 2의 2승, 2의 e승’을 듣고 바로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 있다. 이 좋은 기능과 장점을 가진 우리말을 굳이 동일한 발음과 억양으로 통일시킬 필요는 없다. 서울 사람들은 어렵지만 경상도 말을 쓰는 사람들은 연기(延期, postpone), 연기(演技, acting), 연기(煙氣, smoke) 이 세 가지 단어를 정확히 구분하여 발음할 수 있고, 또 경상도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 당장 주변 분들에게 시험해 보시라.
경주시는 ‘카카오맵’을 통해 시내버스의 위치 정보와 도착예정 시간 등의 초정밀버스정보 서비스를 곧 제공할 예정이다. 이는 기존 버스정보시스템(BIS)과 달리 지도상에서 실시간 움직이는 버스 위치 정보를 제공해 승강장에서 승객의 대기시간을 줄여 시민과 관광객의 이용 편의성을 크게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휴대폰 앱을 통한 초정밀버스정보 서비스 제공과 APEC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시민과 관광객의 시내버스 이용 편의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글로벌 관광도시 경주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몇 가지 제안하겠다. 첫째, 버스 승강장의 명칭 표기 개선이다. 예를 든다면, 시청 승강장에는 ‘보건소 〈시청〉 한전앞’으로 되어 있다. 이 승강장에서 버스를 타면 보건소 방향으로 간다. 그래서 ‘한전 앞 → 시청 → 보건소’ 이거나 ‘한전 앞 → 시청 → 보건소’로 표기되어야 합리적이다. 차가 우리와 달리 좌측으로 다니는 일본·인도인 관광객이 경주에서 혼란을 겪지 않아야 한다. 서울 지하철이나 다른 도시에서는 이미 이런 식으로 승강장 명칭을 표기하고 있다. 둘째, 버스 노선의 단순화이다. 동국대와 경주역을 오가는 노선을 예로 들겠다. 동국대에서 경주역으로 가려면 50번 버스를 타면 된다. 50번 승강장 반대편에서 51번을 타도 경주역으로 가지만 51번은 용강동으로 우회해서 가기 때문에 승차 시간이 매우 길다. 한편 경주역에서 동국대로 가려면 51번을 타야 한다. 50번도 동국대 방향으로 가지만 이 버스는 용강동을 경유한다. 그래서 경주역에서 동국대로 가려면 51번을 타고 갔다가 다시 경주역으로 오려면 50번을 타야 한다. 경주역에서 출발하는 50번과 51번 버스가 동국대 방면으로 가지만 승차시간이 짧은 51번을 타려면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이용에 큰 불편이 따른다. 경주역에서 동국대로 가는 버스 노선을 51번 하나로 통합하여 배차 간격을 줄이고 초행자의 혼선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51번 버스가 경주역에서 출발하여 종착지인 용강동에 도착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오도록 노선을 정하면 경주역에서 51번 버스를 타고 동국대에 갔다가 51번 버스를 타고 경주역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된다. 40번과 41번 버스, 10번과 11번 버스도 지금의 50번과 51번의 관계처럼 서로 역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내버스 노선이 몇 개 되지 않을 때 만들어진 노선 편성 원칙이 근본적인 변화없이 지속되고 있다. 셋째, 버스 후면 차창 밖에 부착된 고정형의 노선 안내판을 LED 전광판으로 교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주역과 동천동 선주아파트를 오가는 70번 버스를 예로 든다면, 선주아파트에서 경주역으로 가는 버스는 ‘선주아파트→경주역’으로 되어야 하고, 경주역에서 선주아파트로 가는 버스는 ‘경주역→선주아파트’로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갈 때 모두 ‘선주아파트↔경주역’으로 되어 있다. 초행자는 이 버스가 경주역으로 가는지 선주아파트 쪽으로 가는 지 헷갈린다. 이는 스마트관광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전광판으로 교체하여 오갈 때 노선 표시를 달리하면 시민과 관광객의 버스 이용의 편의성이 증대될 것이다. 넷째, 주도면밀한 준비를 전제로 버스 노선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 버스 노선을 대략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으로 짜서 최단거리로 이동하게 하고 환승 때 승강장 대기 시간이 짧도록 환승 노선의 운행 시간을 배려하면 시내버스 이용객의 편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나아가 시범 노선에 버스 운행 시간표도 승강장에 부착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다섯째, 관광객을 위해 경주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주요 관광지로 출발하는 버스 노선의 증설이 요망된다. 작년에 경주역에서 보문관광단지로 오가는 710번 노선과 경주역에서 통일전을 거쳐 불국사를 오가는 711번 노선이 신설되었다. 경주역에서 버스터미널, 황리단길, 오릉, 포석정을 거쳐 서남산의 삼릉 계곡 입구까지 오가는 노선이 신설되면 좋겠다. 내외국 관광객이 시내버스로 경주관광을 하기 불편하다. 경주역이나 버스터미널의 시내버스 승강장에 부착된 노선도에 내외국 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더 필요하다. 버스 이용객이 적다고 노선의 배차 간격을 줄이면 이용객은 더 줄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용객이 적은 이유를 심도있게 분석하여 대책을 세우면 수요가 창출될 것이다. 요즘 시내버스를 타면 “차가 정차하면 자리에 일어나 하차하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버스가 정차하기 전에 하차하는 문에 와 있어야 하던 때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느껴진다. 버스 이용객을 위한 계속적인 편의성 증대를 통해 시내버스 타고 출퇴근하는 시민이 많아지고 내외국인 관광객이 버스 타고 관광하는데 불편이 없게 되길 기대한다.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일대의 산사태 위험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확인돼 관련 당국의 철저한 대응 마련이 시급하다. 녹색연합이 지난 15일 경주국립공원사무소, 국립산림과학원 등과 합동 조사한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토함산 일대 3곳에서 ‘땅밀림’ 현상이 확인됐다. 지난 5월 녹색연합이 토함산 24곳에서 산사태 발생했다고 밝힌 뒤, 6월 말부터 7월 초에 걸쳐 실시한 합동 조사결과를 ‘경주 대형 산사태 대책보고서’로 내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무장산·함월산·토함산 일대 73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고, 그중 토함산 일원 3곳이 산사태보다 위력이 훨씬 강한 ‘땅밀림’ 현상이 발견됐다. 땅밀림은 일반 산사태보다 위력이 강해 한 번 발생하면 일반 산사태보다 훨씬 큰 피해를 낳는다. 평소에는 서서히 진행되지만 폭우나 지진 등으로 충격이 가해지면 지반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토함산이 있는 황용동 2곳의 땅밀림 현상은 1만2231㎡(약 3700평)와 2701㎡(약 820평) 규모로, 지방도 제945호선이 피해 영향권에 들어있다. 또 문무대왕면은 4561㎡(약 1380평)로 범곡리 마을이 영향권이다. 게다가 황용동 1만2231㎡ 규모의 땅밀림 현상이 확인된 곳은 35도를 넘는 급경사지로 현재도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 또 이곳은 하나의 계곡에 두 곳의 대형 땅밀림 현상이 진행되고 있어 그 위험성이 배가되고 있다. 산사태는 많은 비로 급경사 지역에서 표층의 급속한 붕괴로 일어나는 현상인 반면, 땅밀림은 지하로 스며든 대량의 물로 인해 지반 자체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발생한다. 땅밀림이 산사태처럼 보이지만 피해 영향권은 더욱 넓고 크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일본은 땅밀림 규모가 하루 1㎜ 이상이면 ‘주의’, 하루 1㎝ 이상 ‘경계’, 시간당 4㎜ 이상이면 ‘피난’ 경보를 울리는 등 경보발령 시스템 및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재난관리시스템부터 먼저 도입해 인명피해를 막아야 한다.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강우 빈도가 높아지는 현실에서 땅밀림을 측정할 수 있는 계측기를 설치하고, 위험지도를 만드는 등 위험지 관리에 대한 종합적인 마스터플랜 마련이 시급하다.
경주시가 인공지능(AI) 전화 서비스로 복지사각지대 주민들의 안부를 챙기는 사업을 7월 안강읍에서 시범 운영한다. 이 서비스는 주거 취약, 독거 장·노년, 치매 등 복지사각지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AI가 주 1~2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기고 말벗도 되어주는 사업이다. 인공지능이 돌봄 대상자와 네이버 AI ‘하이퍼클로바’를 기반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가족처럼 건강 상태, 식사 여부 등 안부를 확인한다. 통화 응답 여부, 상담 내용 등을 분석해 특이점이 포착되면 담당 공무원 등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방문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사업은 경주시가 지난해 행정안전부 공모사업인 ‘2023년 디지털타운 조성사업’에 선정됨에 따른 구축 서비스의 일환이다. 이달 안강읍에서 시범 운영 후, 다음 달부터 전체 23개 읍면동으로 확대 시행할 예정이다. 이 서비스는 서울, 부산, 인천, 대구, 강릉 등 다수의 지자체가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자체들의 반응도 좋다고 한다. 실제 대화에서 단순히 정해진 리스트에서 질문을 던지는 단계에서 벗어나 상대방 답변을 이해한 뒤 그에 반응하고 되묻기까지 하는 등 AI의 대응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비록 기계를 통한 상호작용이긴 하지만, 복지사각지대 대상자의 정서적 고립감을 일정 부분 해소하고, 노인 고독사 예방과 위급 상황 대처에 유효하다는 평가다. 경주는 지난달 말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인구의 26.8%를 차지한다. 또 홀몸 노인,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유형의 가정 또는 개인도 존재한다. 이런 위기 가정이나 개인을 사회복지사들이 일일이 찾아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빈틈없이 돌보기는 더욱 힘들다. 그동안 복지사각지대 발굴을 위해 주택 전력 사용량 점검, 요구르트 판매원 활용 등 각종 아이디어가 동원됐다. AI 전화 서비스는 이런 활동에 들이는 시간과 수고를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만 미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에 AI의 능력을 빌릴 수 있다면 기존 시스템과 충분히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 경주시가 시작한 이 사업이 활성화돼 지역 내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큰 성과를 거두길 기대한다.
월지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월지는 4, 50년 전까지 여름이면 이 못 가장자리에서 미역을 감는 개구쟁이들이 있었고, 겨울철이 되면 스케이트나 썰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간간히 낚시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학년 말 방학을 앞둔 2월의 어느 일요일 친구들과 썰매를 타러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날씨가 풀려 못 가운데에는 얼음이 거의 다 녹고 가장자리에는 고무 얼음(날씨가 풀려 두꺼운 얼음이 녹으면서 고무처럼 신축성이 있는 상태의 얼음)이 되어 있었다. 고무 얼음 위로 썰매를 탈 때는 빨리 지나야만 얼음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담력이 큰 아이들은 못 가운데 쪽으로 가서 타기도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아이가 깨진 얼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모두 놀라 못 밖으로 나오는데 두 아이가 서둘러 구조를 하러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다. 얼음 속에 빠진 아이의 형과 쌍둥이 동생이라고 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몇몇 어른들은 가까이 다가가 구조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긴 나무 막대를 던져 주기만 한다. 그런데 구하려 가던 그 아이들이 서 있는 곳의 얼음마저 깨어져 세 사람이 모두 허우적거렸다. 두 아이는 어떻게 해서 빠져 나왔는데 결국 한 아이는 물속으로 몇 번 오르내리더니만 결국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순사(순경)가 오면 모두 잡아가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면서 서둘러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적이 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일찍이 이곳 월지는 신라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압지부평(鴨池浮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못의 부평초는 뿌리가 땅에 닿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압지부평’이라 했다. 원래 부평초는 개구리밥을 의미하지만 경주지방에서는 마름을 이르는데 말밤[末栗]이라고도 한다. 이 말밤은 9월 초에 마름모꼴의 열매가 맺히는데 양 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조심해서 열매를 깨물어 하얀 속살을 먹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말밤이 수면을 가득 덮었다. 아이들은 말밤이 없는 못 가장자리를 골라 물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60년대 초반 어느 날 휴가를 나온 두 장병이 헤엄을 쳐서 못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중 한 사람이 이 말밤에 몸이 감겨 끝내 익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외에도 이 못에서 익사 사고가 가끔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는 이 못에 귀신이 있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들 했다. 못 속에서 소복을 차려입은 잘 생긴 젊은 여인이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처녀가 더 많았다. 청년이라면 여인의 유혹으로 익사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처녀가 물귀신의 유혹으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 처녀를 유혹한 귀신은 남자 귀신이 아니었을까? 당시 못 서쪽으로 주춧돌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동북쪽에는 기둥의 반이 물속에 잠긴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임해전이라고 했다. 실제 이 건물은 신라 때의 임해전이 아니다. 1920년 경주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던 건물로 이 장소에 본래 없던 건물이다. 유림에서 정자로 활용했으면 ‘임해전(臨海殿)’이 아니고 ‘임해정(臨海亭)’이라 했어야 하는데…. 여름방학 시즌에는 무전여행을 다니던 대학생들이 이곳 임해전에서 취식을 하고, 또 농번기에는 주위에 농토를 가진 농부들이 점심이나 새참을 먹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이 건물을 헐어서 황성공원 안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이 있는 독산 서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궁도인(弓道人)들이 활터의 정자로 활용되고 있는 호림정(虎林亭)이 바로 월지에 있던 임해전이다. 『장자』 「추수편」에 ‘관규려측(管窺蠡測)’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으로 보고 소라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의미이다.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워낙 대단한 유적인 이곳 월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필자의 경험담이 대롱이고 소라껍데기일 것 같다. 장자의 질책이 귀에 따갑다.
“20대 승객은 휴대폰으로 문자나 전화하느라 바쁘고, 아줌마들은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휴대폰 찾느라고 바쁘다” 택시 기사님이 오랜 경험으로 하는 말씀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삶은 나이 듦의 과정이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험이나 지혜는 주름살 수만큼 깊이만큼만 생기는 결과치다. 와인처럼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살면서 직면하게 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무기들을 얻는다. 안정감도 특권이다. 젊음의 성마름이 다 지나고 푹 쉬어져야 삶의 불확실성에도 초연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도 세월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청춘들은 외려 얻기 힘든 것들이다. 하나 더. 노년은 어쩌면 인생의 완성인 죽음을 준비하는 절대 시간이다. 푸르른 봄을 경험하고, 지난한 뙤약볕의 여름을 감내하며, 가을의 결실을 맛보고 맞는 겨울, 그 침전과 사색의 시간이 주는 진리라고나 할까.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지니 분위기 좀 바꾸자. 일본의 어느 어르신은 삶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자, 출전이다/ 안경 보청기/ 틀니 챙겨라(79, 남성)” 자못 비장하다. 적장을 노려보고 있는 노장의 기백마저 느껴진다. 다른 어르신의 작품은 또 어떤가. “분위기 보고/ 노망 난 척해서/ 위기 넘긴다(71, 여)” 위기를 그야말로 기회로 뒤집어 버린 되치기 기술이다. 어르신들만의 해학과 넉살 좋은 눙에는 여유가 녹아있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67, 여)” 한때는 치료의 대상이었을 비문증(飛蚊症)과 이명(耳鳴)이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가족이 된 셈이다. 병을 ‘기르고’ 있다니 웃기지만 슬픈 이 상황을 이처럼 귀엽게 묘사할 수 있나 싶다.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이자 삶을 바라보는 통찰이다. 다들 고매한 철학자이신가? 그렇지는 않다.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73, 남)”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65, 여)” 늙고 쇠약해져서 생긴 병이라는 의미의 노환(老患)은 사실 치료 대상이 아니다. 치료하고 고쳐서 낫는 병이 아니다. 우리는 치료해서 쫓아낼 병도 있지만 남은 생을 함께 하는 병도 있음을 배우게 된다.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70, 남)” 그래도,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만큼 앞뒤가 안 맞다. 그래도 괜찮다. 인생이 다 그런 거다. 저 먼 별이 빛날 수 있는 건 둘러싼 온 온 세상이 까맣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세상에도 희망은 있다. 잔잔한 행복은 멈추지 않는다. “똑같은 푸념/ 진지하게 듣는 건/ 오직 개뿐(69, 여)” 상상이 간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니(본인은 처음이라 생각하겠지만) 질려버린 가족들은 다 도망가고 없는데, 그 곁을 지키는 반려견은 처음 듣는 듯 듣고 있다. 사람만 친구가 되라는 법은 없다. 따뜻한 지혜와 넉넉한 웃음도 어르신들과 궁합이 좋다.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과 나를/ 부리는 아내(51, 여)” 이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챘나 보다. 그러느라 얼굴엔 주름꽃이 활짝 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있기에 지금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젊어 보이시네요」/ 그 한마디에/ 모자 벗을 기회 놓쳤다(76, 남)” 아, 팽팽한 긴장감이 예술이다. 머리숱이 없는 나도 이 느낌이 뭔지 알 것 같다. 자존심이라기보단 그저 낭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다. 아슬아슬하지만 오늘도 살아 있으니까.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75, 남)” 그래서 더 집중하고 싶다. 오늘을 더 부여잡고 싶다. 몸이 그걸 못 따라와 주지만 나름 방법이야 만들면 된다. “손자 증손자/ 이름 헷갈려/ 전부 부른다(40, 여)” 여기에 소개한 작품들은 센류(川柳)라고 하는, 5-7-5 음수율의 짧은 일본 시(詩)다. 이들 모두는 일본 전국 유료실버타운 협회가 주체한 응모전에 뽑힌 작품들이다. 풍자와 익살은 기본이고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순간이나 감정을 포착해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모든 게 오랜 세월 켜켜이 축적된 삶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 순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LED 전구/ 다 쓸 때까지/ 남지 않은 나의 수명(78, 남)”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황동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쉰다섯 여름과 겨울 그 헐렁한 길을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노니. 공사장에 나가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다 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노니, 정신 온통 너덜너덜. 그 해골 돌로 두드리면 돌 소리 내고 나무로 두드리면 나무 소리 내는구나.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알맞게’ 익은 미소 하나를 위한 생 제목부터가 엉뚱하고도 재밌는, 그러나 알고 보면 해학과 깊이, 거기에다 예지의 빛까지를 거느리고 있는 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해골’이라는 말에서 온다. 진짜 해골이라도 ‘촉루(髑髏)’라고 표현하면(“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박두진 「묘지송」 ) 향기가 나는 법인데, 시인은 역으로 우리의 ‘얼굴’을 ‘해골’이라고 유머와 해학으로 그러나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다. 온갖 감정이 다 담기는 민낯의 얼굴, 그게 해골이 아닐 것인가. ‘해골’밖에 안 되는 주제에 온갖 거짓과 가식으로 남을 속이고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냐, 하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해골을 수식하는 관형절이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이다. ‘알맞게’라는 말은 과장에는 이르지 않고, 거짓의 탈을 쓴 가식은 걸러내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연스럽게 익은 양태를 말한다. 문득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인은 쉰다섯 인생길을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헤매다녔다고 밝힌다. 그 나이에 이르는 동안 시인이 내면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부딪힌 현실은 얼마나 괴리가 많았을까? 자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헐렁한” 길이 되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만난 중첩된 고난과 시련을 “맨 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하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좌절, 절망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기에 시인에게 ‘공사판’으로 비유되는 삶이라는 여정은 무엇보다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는 말의 순화과정의 연속이지만, 그것은 쉽사리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찢어진 체가 되”는 낭패와 소모과정을 거쳐, “정신 온통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나 웬걸? 정신이 다 닳고 나자 시인은 자신이 변화되는 경이를 맛보게 된다. 그 과정은 2연과 3연 사이의 여백에 생략되어 있다. 3연은 앞의 연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탄생을 그린다. 바로 어떤 말을 들어도 다 소화가 되는, 귀가 순해진 인간이다. 타자가 “돌로 두드리면/돌 소리 내고/나무로 두드리면/나무 소리 내는” 해골. 그것은 내 마음이 타자에 대한 적의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오히려 내 마음에 긍휼과 여유가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떤 것으로 나를 치고 들어오든 그 사람에게 맞는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 나오는 미소다. 시인은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드는 데 쉰다섯 해가 걸렸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이순(耳順),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나이를 예순이라 하니, 시인은 그것을 몇 해나 당겨서 이룬 셈이지만, 나중에 우리 생을 결산할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일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도 덜도 말고 알맞게 지은 미소를 가진 얼굴, 그거면 된 게 아니냐고 시인은 우리의 옷깃을 당기며 속삭이듯 말한다.
경주시립도서관이 8월 9일까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제10회 책 속 인물에게 보내는 한글 손 편지’를 공모한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국립한글박물관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공모전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위해 기획됐다. 참여를 원하는 어린이는 시립도서관 어린이자료실 안내데스크를 방문해 편지지를 수령한 다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책 속 인물에게 보내는 손 편지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모집된 한글 손 편지는 우수작 3편을 선별해 주최기관에 본선 추천작으로 출품될 예정이다. 행사에 참여한 전국 작품 중 대상 1명(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으뜸상 6명, 버금상 20명을 선정해 9월 중순 결과를 발표하고 10월 중 시상한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경주시립도서관 홈페이지 및 SNS를 참고하거나 어린이자료실로 문의하면 된다.
황오동 청년회가 지난 15일 지역 내 경로당 7곳을 방문하고 더운 여름철 경로당 어르신들의 안부를 물었다. <사진> 이날 경로당 방문에는 황오동 청년회 윤원주 회장과 정희택 시의원, 최미리 황오동장을 비롯한 청년회 회원들이 함께 했다. 이들은 청년회에서 준비한 복달임 음식인 수박과 휴지 등 생필품을 전해드리며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무더운 여름을 지나길 기원했다. 또한 최미리 황오동장과 정희택 시의원은 어르신들의 불편사항이나 건의사항 등을 청취하며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윤원주 회장은 “장마와 무더위로 무엇보다 건강 관리가 필요한 시점에 이렇게 어르신들을 찾아 뵐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앞으로 더 자주 경로당을 방문해 어르신들과 소통하며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청년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최미리 동장은 “폭염 및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어르신들이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길 바라고, 지역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청년회원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사)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회장 구승회) 안강분회 에덴A 경로당, 산대3리 경로당에서 지난 5일 건빵을 활용한 오감 깨우기 활동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2021년부터 기획재정부 복권기금지원사업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경주시지회 경로당행복선생님 사업으로 600여개 경로당에 운영하고 있다. 김미숙 경로당행복선생님은 배정된 경로당을 찾아 준비한 쌀 건빵을 만지고 부수어서 흔들어보았다. 이어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 보고 깨물어 보며 오감을 깨우는 시간, 손끝활동 등을 가졌다 건빵봉지에 선물처럼 들어있는 별사탕과 함께 천천히 깨물고 입안에서 녹이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진> 도깨비가 나오는 동화이야기, 군에 갔던 아들이 건빵은 지금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가난했던 시절이야기, 건빵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 게임, 놀이, 공예 등 경로당은 많은 보따리가 풀어졌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나이 들어가며 마음만큼 활동할 수 없어 우울했었는데 행복선생님 덕분에 오감이라는 단어도 알게 되고 온몸을 깨우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며 “우리가 제일 무서워하는 치매예방을 놀이와 게임으로 알려줘서 건강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행복선생은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도 있었지만 안타까움이 많아 과거시간 속에서 숙연해지기도 했다”며 “지금은 경로당에서 건강하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크게 웃으시는 모습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옥산서원에서 ‘2024년 세계유산활용프로그램-갓씨구놀자’가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옥산서원의 역사와 선비문화의 우수한 보편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2024년 세계유산활용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돼 오는 10월까지 매주 주말 운영된다.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가 후원하고 (사)신라문화원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옥산서원 입구 역락문 앞에서 시작된다. 참가자들은 의관정제, 선비복 체험, 붓글씨 체험, 옥산서원 해설, 만인소 체험 등 선비들의 의·식·주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각 장소별로 스탬프를 받아오면 기념사진을 인화해주는 스탬프 투어 형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올해 처음 선보인 ‘만인소 체험’은 옥산서원 소장 아태기록유산인 복제개혁만인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기후변화와 환경 위기 등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에 주목받고 있다. 한 참가 부부는 “10년 전 연인 시절 옥산서원을 방문했다가 이번에 아이와 함께 재방문했다”며, “문화유산의 매력은 변함없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사)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은 “선비들의 정신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했기 때문에 옥산서원이 더욱 개방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며 “만인소 체험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가치와 현재 국민의 참여가 만나 새로운 미래 가치를 만드는 첫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로그램 참여 및 문의는 (사)신라문화원으로 하면된다.
경주 남산 약수골은 금오봉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이다. 초입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경주교도소 철책 울타리를 끼고 산행이 시작된다. 교도소 내부에는 계곡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타리 너머 점심 식후 산책 중인 교도관에게 수감자도 산책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강한 어조로 ‘노’라고 말한다. 물었던 이유는 박노해 시인 때문이었다. 그의 사색은 독방 안에서만 가능했을까 아니면 산책의 시간도 가졌을까? 그의 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기에 급히 물었던 이유였지만 그는 분명 봄날 뻐꾸기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저 멀리 단석산 위 맑은 가을 하늘과 흘러가는 흰 구름도 보았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엔 형산강으로 달려가는 약수골 계곡 물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상선암 목탁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경주 남산 바위 속 마애불과 목 없는 불상들과도 대화도 나눴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교도소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외지인들이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국립공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공원은 1968년도 지정되었고 경주교도소는 1973년 이곳에 설치되었다. 불국토 남산의 정기가 어린,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이여서 일까 이곳은 국내 최초 실버 교도소로 선정되어 65세 이상 고령 수형자들이 새로운 사회생활 시작을 준비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초범 재소자와 미결수, 시국사범들이 주로 수형생활 하던 곳이다. 특히 박노해 시인은 이곳에서 7년 6개월을 독방에서 수감 생활했다. 그의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이곳 수감 중에 출간한 책들이다. 내용 속 경주 남산이 많이 등장한다. 투사에서 사색가로 사상적 전향과 삶의 행로가 달라진 것은 경주 남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쓴 글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을 주도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결성주동자로 7년여 수배 끝에 체포되었다. 24일간의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경주교도소로 왔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박해받는 노동자(勞) 해방(解)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본래의 이름은 박기평이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은 출판사 풀빛에서 판화 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27살 버스회사 수습 정비공 시절 나온 시집이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가 기억할 만큼 유명한 책이다. 노동현장에 있던 사람은 물론, 문학인, 지식인에게도 강렬했던 한방이었다. 감은암(感恩庵) 경주교도소 한 평도 안 되는 0.75평, 침침한 관속 같은 독방을 살아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감은암(感恩庵)으로 지었다. 출가 수행자처럼 참구參究하며 이곳을 수행처로 삼았다. 그는 책에서 밝혔듯이 이곳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복역하다 나온 사람에 의하면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하고 아침은 단식, 점심과 저녁은 채식하며 하루 10km 이상 교도소 운동장을 뛰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근무한 교도관은 그가 읽은 책이 족히 일 만권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운동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 책을 읽었다. 독서와 사색이야말로 투쟁의 시간을 끝내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첫째의 일일 것이다. 그가 읽은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 노자와 장자를 읽었으며 그리고 붓다를 읽었다. 특히 그의 글에는 붓다를 만난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와 산문에서 불교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동안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알차게 보냈다. 출가승의 자세로, 구도자의 자세로 임했기에, 다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곳 남산자락에서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뜨겁게 흐르던 피를 식힐 수 있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곳이다. 세례명이 가스파르인 시인은 원래 신부가 꿈이었다. 자기보다 먼저 형이 신부가 된 카톨릭 집안이지만 그는 경주 남산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구도자의 삶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에 자신을 묻은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경주 남산에 나를 묻다 수감생활 중에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경주 남산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중이던 1993년 6월 출판된 시집 『참된 시작』(1993년 창비)은 1. 2부는 수감생활 중에 쓴 시, 3~4부는 《노동해방문학》과 무크지 《노동문학》에 발표했던, 수감 이전에 쓴 시로 구성되어 있다. 편차, 골곡이 다소 있는 구성으로 엮어져 있다. 시집의 첫 페이지는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으로 시작한다, 바람 찬 날이다/ 경주 남산/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 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나직이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 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이 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 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마침내 싹이 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전문 이 시는 경주교도소로 이감 직후인 1992년 4월 시인의 누나가 접견창구에서 받은 시이다. 경주 남산에서 처음 쓴 시라 할 수 있다. 독방에 갇혀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었다. 또 다른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패배였다’로 시작해서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라고 맺는다. 패배는 무기수라는 인간으로서의 패배와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온 이념의 패배는 볼 수 있다. 시집 속에는 「강철 새잎」, 「모과향기」, 「민들레처럼」 같은 생명과 생존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다. 세월 지나도 많은 사람이 인용하며 사랑한 시들이기도 하다. 세 가지 신물信物-진평왕릉, 에밀레 종, 감은사 탑 이 시집에서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산문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은 펄쩍 놀라게 만든 글이다. 문화유산을 읽는 생각이 깊고 남다르다. 이를 통해 자신과 연결시켜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용을 다 인용하고 싶지만, 부분부분 몇 줄씩 발췌해 본다.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세 가지 신물信物을 모셨습니다. 진평왕릉은 내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고 특출한 형상을 해야만 대단한 것으로 우러르는 이 시대의 천박한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습니다. (중략) 항시 나에게 열려있으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옵니다. (중략) 에밀레종은 뼈아픈 내 침묵, 절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나의 시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중략) 감은사탑은 나의 참된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 사상과 운동이 무엇으로 쌓아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생동하는 아름다운 모습. 결코 허세를 부리는 억지 상승이 아닌,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으로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청난 기품이 서려 있는 감은사탑. (중략) 진평왕릉과 에밀레종 그리고 감은사지 탑을 통해 자기 신념으로 비추어보는 통찰력이 깊고 아름답다. 최소한 경주사람만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사람이 차가운 독방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문장은 붓다의 마지막 말을 곁들이며 끝을 맺는다. 경주 남산 자락에 파묻힌 이 침침한 관속같은 독방에서, 저는 매일같이 새벽 묵상 때마다. 진평왕릉과 에밀레종과 감은사탑을 내 마음속 부드러운 자리에 모시면서 성성한 화두처럼 궁글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부처 최후의 말씀) - 1993년 5월 경주교도소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붓다의 유훈은 시 「불변의 진리」에 또다시 인용하고 있다. 붓다의 유훈을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또한 다른 글에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이 좋아하는 문장 이전에 끝없이 부지런히 정진 노력하려는 본인의 철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온 삶의 가파른 내력들을 보면 얼핏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캄캄한 독방에서 붓다와 독대하고 참구하며 사유했다. 글 속에는 불교 경전을 탐독한 글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 자락에서 그는 많은 것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시작할 시詩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 그것은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에밀레종 소리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일까. 일성원음一聲圓音의 소리를 통해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지혜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성이 있는 자는 여기 경주 남산에 오면 얼른 알아차리는지도 모른다. 영험한 남산 골짝마다 바위마다 억 만개 아승지겁阿僧祗怯의 마음들이 깃들어 있을 것이기에 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년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22편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노해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라는 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일독을 권하는 추천사를 썼다. 내적 성찰이 담겨있는 책에는 자연과 생태주의, 여성, 농민에 대해 두루 이야기하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 휴머니스트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출판 선인세로 받은 일천만원을 북한동포돕기에 기부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지 않음을 실천하는 사람답다. 1998년 7년 6개월 수감 끝에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비영리단체 ‘나눔 문화’를 설립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 가난한 나라를 가서 반전 평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존경받기엔 충분하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성공에도 푹신한 권력의 자리에 앉지 않고 다시 아프리카 밀림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세계의 분쟁지역과 오지를 헤메이며 사진으로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화 인권운동가로, 사진작가로, 꾸준히 활동하며 찍은 그의 사진은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시집과 산문, 사진집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그의 『걷는 독서』 속 한 문장은 지친 걸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눔으로 실천하는 그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노동자, 얼굴없는 시인, 수배자, 혁명가, 777번 무기수, 사색가, 사진작가, 사상가, 평화 인권운동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보면 입전수수入廛垂手, 화광동진和光同塵 같은 말이 떠 오른다. 경주 남산은 한 사람의 내적 성찰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경주 남산은 민초들의 산이고 평범한 민초들의 염원들이 깃들어져 있고 새겨진 산이다. “꿈은 혼자서 꾸면 단순히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온몸으로 꾸면 현실이 된다” 경주교도소를 출소하던 날 경주 인근 식당에서 200여 명의 마중객 앞에서 한 말이다. 덕분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알고 보면 혁명도, 사랑도, 사는 일이 다 한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밥상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 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 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 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 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 남산 약수골은 금오봉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이다. 초입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경주교도소 철책 울타리를 끼고 산행이 시작된다. 교도소 내부에는 계곡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타리 너머 점심 식후 산책 중인 교도관에게 수감자도 산책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강한 어조로 ‘노’라고 말한다. 물었던 이유는 박노해 시인 때문이었다. 그의 사색은 독방 안에서만 가능했을까 아니면 산책의 시간도 가졌을까? 그의 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기에 급히 물었던 이유였지만 그는 분명 봄날 뻐꾸기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저 멀리 단석산 위 맑은 가을 하늘과 흘러가는 흰 구름도 보았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엔 형산강으로 달려가는 약수골 계곡 물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상선암 목탁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경주 남산 바위 속 마애불과 목 없는 불상들과도 대화도 나눴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교도소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외지인들이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국립공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공원은 1968년도 지정되었고 경주교도소는 1973년 이곳에 설치되었다. 불국토 남산의 정기가 어린,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이여서 일까 이곳은 국내 최초 실버 교도소로 선정되어 65세 이상 고령 수형자들이 새로운 사회생활 시작을 준비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초범 재소자와 미결수, 시국사범들이 주로 수형생활 하던 곳이다. 특히 박노해 시인은 이곳에서 7년 6개월을 독방에서 수감 생활했다. 그의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이곳 수감 중에 출간한 책들이다. 내용 속 경주 남산이 많이 등장한다. 투사에서 사색가로 사상적 전향과 삶의 행로가 달라진 것은 경주 남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쓴 글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을 주도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결성주동자로 7년여 수배 끝에 체포되었다. 24일간의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경주교도소로 왔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박해받는 노동자(勞) 해방(解)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본래의 이름은 박기평이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은 출판사 풀빛에서 판화 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27살 버스회사 수습 정비공 시절 나온 시집이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가 기억할 만큼 유명한 책이다. 노동현장에 있던 사람은 물론, 문학인, 지식인에게도 강렬했던 한방이었다. 감은암(感恩庵) 경주교도소 한 평도 안 되는 0.75평, 침침한 관속 같은 독방을 살아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감은암(感恩庵)으로 지었다. 출가 수행자처럼 참구參究하며 이곳을 수행처로 삼았다. 그는 책에서 밝혔듯이 이곳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복역하다 나온 사람에 의하면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하고 아침은 단식, 점심과 저녁은 채식하며 하루 10km 이상 교도소 운동장을 뛰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근무한 교도관은 그가 읽은 책이 족히 일 만권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운동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 책을 읽었다. 독서와 사색이야말로 투쟁의 시간을 끝내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첫째의 일일 것이다. 그가 읽은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 노자와 장자를 읽었으며 그리고 붓다를 읽었다. 특히 그의 글에는 붓다를 만난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와 산문에서 불교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동안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알차게 보냈다. 출가승의 자세로, 구도자의 자세로 임했기에, 다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곳 남산자락에서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뜨겁게 흐르던 피를 식힐 수 있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곳이다. 세례명이 가스파르인 시인은 원래 신부가 꿈이었다. 자기보다 먼저 형이 신부가 된 카톨릭 집안이지만 그는 경주 남산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구도자의 삶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에 자신을 묻은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경주 남산에 나를 묻다 수감생활 중에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경주 남산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중이던 1993년 6월 출판된 시집 『참된 시작』(1993년 창비)은 1. 2부는 수감생활 중에 쓴 시, 3~4부는 《노동해방문학》과 무크지 《노동문학》에 발표했던, 수감 이전에 쓴 시로 구성되어 있다. 편차, 골곡이 다소 있는 구성으로 엮어져 있다. 시집의 첫 페이지는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으로 시작한다, 바람 찬 날이다/ 경주 남산/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 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나직이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 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이 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 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마침내 싹이 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전문 이 시는 경주교도소로 이감 직후인 1992년 4월 시인의 누나가 접견창구에서 받은 시이다. 경주 남산에서 처음 쓴 시라 할 수 있다. 독방에 갇혀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었다. 또 다른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패배였다’로 시작해서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라고 맺는다. 패배는 무기수라는 인간으로서의 패배와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온 이념의 패배는 볼 수 있다. 시집 속에는 「강철 새잎」, 「모과향기」, 「민들레처럼」 같은 생명과 생존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다. 세월 지나도 많은 사람이 인용하며 사랑한 시들이기도 하다. 세 가지 신물信物-진평왕릉, 에밀레 종, 감은사 탑 이 시집에서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산문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은 펄쩍 놀라게 만든 글이다. 문화유산을 읽는 생각이 깊고 남다르다. 이를 통해 자신과 연결시켜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용을 다 인용하고 싶지만, 부분부분 몇 줄씩 발췌해 본다.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세 가지 신물信物을 모셨습니다. 진평왕릉은 내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고 특출한 형상을 해야만 대단한 것으로 우러르는 이 시대의 천박한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습니다. (중략) 항시 나에게 열려있으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옵니다. (중략) 에밀레종은 뼈아픈 내 침묵, 절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나의 시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중략) 감은사탑은 나의 참된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 사상과 운동이 무엇으로 쌓아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생동하는 아름다운 모습. 결코 허세를 부리는 억지 상승이 아닌,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으로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청난 기품이 서려 있는 감은사탑. (중략) 진평왕릉과 에밀레종 그리고 감은사지 탑을 통해 자기 신념으로 비추어보는 통찰력이 깊고 아름답다. 최소한 경주사람만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사람이 차가운 독방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문장은 붓다의 마지막 말을 곁들이며 끝을 맺는다. 경주 남산 자락에 파묻힌 이 침침한 관속같은 독방에서, 저는 매일같이 새벽 묵상 때마다. 진평왕릉과 에밀레종과 감은사탑을 내 마음속 부드러운 자리에 모시면서 성성한 화두처럼 궁글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부처 최후의 말씀) - 1993년 5월 경주교도소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붓다의 유훈은 시 「불변의 진리」에 또다시 인용하고 있다. 붓다의 유훈을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또한 다른 글에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이 좋아하는 문장 이전에 끝없이 부지런히 정진 노력하려는 본인의 철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온 삶의 가파른 내력들을 보면 얼핏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캄캄한 독방에서 붓다와 독대하고 참구하며 사유했다. 글 속에는 불교 경전을 탐독한 글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 자락에서 그는 많은 것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시작할 시詩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 그것은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에밀레종 소리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일까. 일성원음一聲圓音의 소리를 통해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지혜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성이 있는 자는 여기 경주 남산에 오면 얼른 알아차리는지도 모른다. 영험한 남산 골짝마다 바위마다 억 만개 아승지겁阿僧祗怯의 마음들이 깃들어 있을 것이기에 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년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22편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노해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라는 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일독을 권하는 추천사를 썼다. 내적 성찰이 담겨있는 책에는 자연과 생태주의, 여성, 농민에 대해 두루 이야기하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 휴머니스트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출판 선인세로 받은 일천만원을 북한동포돕기에 기부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지 않음을 실천하는 사람답다. 1998년 7년 6개월 수감 끝에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비영리단체 ‘나눔 문화’를 설립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 가난한 나라를 가서 반전 평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존경받기엔 충분하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성공에도 푹신한 권력의 자리에 앉지 않고 다시 아프리카 밀림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세계의 분쟁지역과 오지를 헤메이며 사진으로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화 인권운동가로, 사진작가로, 꾸준히 활동하며 찍은 그의 사진은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시집과 산문, 사진집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그의 『걷는 독서』 속 한 문장은 지친 걸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눔으로 실천하는 그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노동자, 얼굴없는 시인, 수배자, 혁명가, 777번 무기수, 사색가, 사진작가, 사상가, 평화 인권운동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보면 입전수수入廛垂手, 화광동진和光同塵 같은 말이 떠 오른다. 경주 남산은 한 사람의 내적 성찰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경주 남산은 민초들의 산이고 평범한 민초들의 염원들이 깃들어져 있고 새겨진 산이다. “꿈은 혼자서 꾸면 단순히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온몸으로 꾸면 현실이 된다” 경주교도소를 출소하던 날 경주 인근 식당에서 200여 명의 마중객 앞에서 한 말이다. 덕분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알고 보면 혁명도, 사랑도, 사는 일이 다 한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밥상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 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 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 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 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제 경주최부자댁 과객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일전의 원고에서 최부자댁 손님 중 가장 중요한 손님이 사돈이라는 말을 했다. 최부자댁을 일컬어 부잣집이라는 소리는 많이들 하지만 양반으로서 명문가이냐는 말에는 꼭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 명문 양반가의 기준이 여럿 있지만 그중 중요한 기준은 뛰어난 학자나 이름난 명신(名臣)을 배출했느냐의 여부이다. 그러나 경주최부자댁에는 바로 이 중요한 벼슬을 산 분이나 학자가 없었다. 그 반면 경주최부자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경주최부자댁을 향해 ‘치마양반’이라 부르는 말을 알고 있다. 치마양반은 양반으로서 매우 불명예스럽게 들릴 수 있다. 치마양반이란 자신의 집에서 벼슬을 내지 못하고 결혼 정책을 통해 사돈을 잘 맺음으로써 그 후광으로 양반행세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은 대대로 치마양반이라는 말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굳이 그 말에 대해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최부자댁 나름의 오랜 전통의 결과이기도 할 뿐 아니라 벼슬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서일 것이다. 특히 최부자댁의 오랜 가훈인 육훈(六訓) 중의 하나를 떠올린다면 벼슬살이에 대한 조상님들의 담백한 심경을 알 수 있다.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이유가 어떠하건 최부자댁은 진사 이상은 더 나가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진사는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 부르는 국가시험에 합격한 유생을 부르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진사시와 생원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사시는 지방에서 치는 향시에 붙은 사람들에 한해 예조에서 관장하는 복시로 최종 합격을 결정짓는다. 진사시는 사장(辭章), 즉 문장과 논술을 다루는 것을 주 시험과목으로 취급하고 생원시는 경학(經學), 즉 유학의 경전을 다루는 학문을 주 시험과목으로 취급했다. 진사나 생원은 모두 성균관 유생의 자격을 얻은 사람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대과에 응시할 기회를 얻게 된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대과에 급제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벼슬살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 조상들은 복시에 합격하고도 굳이 성균관 유생으로 등록하지 않거나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난 뒤에도 곧바로 낙향하여 가업을 이어가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진사임을 증명하는 백패(白牌)만 지닌 채 만족하며 살아 온 것이다. 최부자댁 조상님들이 벼슬살이에 초연했던 반면 조선시대 양반사회는 3대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면 양반의 자격이 사라진다고 보는 기준이 있었다. 다만 진사나 생원이 되면 양반으로서 소양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부자댁은 꾸준히 진사를 배출했으니 그로써 양반으로서의 명맥을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 명문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퇴계, 학봉, 서애의 후손, 명문가와 사돈을 맺으며 품격을 유지한 경주최부자 때문에 최부자댁은 다양한 명문가와 혼인을 맺는 것으로 품격을 유지해 왔다. 대표적으로 정무공으로부터 6대 최부자인 최종률(1724~1773) 공은 생원시 급제자로 안동 권씨 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안동 권씨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권근 이후 세조~예종대의 권람, 임진왜란의 명장이자 명신인 권율(1537~1599) 등으로 대표되는 명문가다. 7대 최부자 최언경(1743~1804) 공은 의성김씨 가문과 결혼했다.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가문이다. 김성일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를 돌며 장병들을 위무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으로 후대가 더 번창한 가문이다. 8대 최부자 최기영(1768~1834) 공은 진사시에 급세했고 안동의 진성이씨 집안과 결혼했다. 진성이씨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분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봉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1502~1571) 선생이다. 이 집안 역시 자손들의 출세가 근래까지 지속되어 왔다. 진사시에 급제한 10대 최만희(1832~1879) 공도 진성이씨 집안과 혼인했다. 역시 진사시에 급제한 11대 최부자 최현식(1854~1928) 공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선생의 후손과 혼인했다. 문파 선생님 역시 안동을 기반으로 한 풍산 김씨 가문과 혼인했다. 풍산 김씨는 유연당 김대현(1553~1602) 공과 그의 아들들의 벼슬살이로 유명한 집안이다. 8형제 중 5형제가 대과, 3형제는 소과로 모두 급제했고 이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벼슬을 산 집안이다. 특히 5형제의 벼슬살이를 기려 동네 이름이 오미동 또는 오릉동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이런 혼인 문화는 근현대에도 이어져 최염 선생님 아버지이신 최식 선생은 선조~광해군 대의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강(寒岡) 정구(1543~1620) 선생 후손인 부인과 혼인했다. 성주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가문이다. 최염 선생님의 숙부 역시 성주의 명문가로 독립운동으로 이름 높은 한계(韓溪) 이승희(1847~1916) 선생의 후손이다. 최부자댁에 시집 오는 며느리들이 명문가의 여식인 것처럼 최부자댁 여식들도 명문가로 출가했다.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자. “윗대로는 고모할머니들 중 6대조 고모할머니가 한강 정구 선생의 종부로 가신 것을 필두로 가문의 많은 여식들이 명문가의 며느리로 시집가셨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의 무남독녀가 해저에 있는 의성 김씨 댁에 출가하여 가문을 번창시켰는데 이전에 고려 사이버 대학 총장을 지내고 있는 김중순 씨가 그 증손자이지요!” 최염 선생님의 고모들과 누이분들도 명문가의 종부로 출가하여 그 험하고 어렵다는 ‘종부살이’의 전통을 이었다. 선생님의 큰 누님이신 최희 여사가 동계 정온 선생 종부로 시집가셨고 둘째 누님 최소희 여사는 서예 유성룡 선생의 14대 종부로 가셨다. 특히 유성룡 선생님 종부로 가신 둘째 누님 최소희 여사님은 내가 직접 뵙고 말씀도 나누었기에 그 기억이 더 소중하다. 2015년 10월 30일, 서애 선생 15대 종손 류창해 선생 취임식 당시 최염 선생님과 함께 뵙고 여사님께 최부자댁 비전 법주와 육포를 대접받는 기연을 얻었다. 이런 혼인 관계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최부자댁이 이렇게 명문가와 혼인관계를 맺을 때, 며느리로 들어오는 입장에서는 풍족한 부잣댁에 시집오니 나쁠 게 없지만 거꾸로 명문가에 시집간 따님들은 그 어려운 종부살이가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최염 선생님께 그로 인해 종부살이 가신 누님들께 어려움은 없었는지 여쭈어보았다. “아무래도 시집간 딸들은 대체로 우리 집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요. 재산 많은 것을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가의 며느리들은 안빈낙도의 허울 속에 팍팍한 삶을 살아야 했어요. 그래서 다른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썩 내키지는 않았을 법도 하지. 그러나 집안 간의 중대한 혼사에 딸들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질 여지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전국에서 유명한 종부들을 모았는데 우리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치마양반의 위세가 드러났지요!” 그러면서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말씀해 주셨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흥준 교수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시기, KBS 방송과 함께 전국의 유명한 집안 종부들을 모아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이때 최염 선생님에게도 연락이 와 사모님을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선생님은 “우리 집안은 종부라고 불릴 처지가 아니다”며 사양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 “종손이니 종부니 하는 명칭들을 만만히 알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아요. 종손 혹은 종부는 큰 벼슬을 하거나 아주 유명한 학자들의 제사를 받드는 직계 후손들에게만 부여하는 아주 귀한 존칭입니다” 종손·종부의 개념이 생긴 것은 우리나라 성리학이 전성기를 이룬 성종 이후, 퇴계니 율곡이니 하는 성현들에서 비롯되었고 그런 성현들에게 불천위(不遷位-후대에 제사를 끊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정한 성현들의 위폐)로 봉하는 사례가 성해지면서부터다. 때문에 보통 종손들은 그 후손의 나이가 많을 경우 14대가 대부분이고 젊을 경우는 세대교체가 되어 15대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16대손도 더러 있지만 이 경우는 정말 젊은 종손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따질 경우 최염 선생님은 최부자댁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으로부터 14대 후손이 된다. 그러나 선생님 스스로는 정무공께서 퇴계니 율곡이니 서애니 하는 분들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아 종손이라는 존칭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어디에 가셔서나 당신을 최부자댁 ‘종손’이 아닌 ‘주손(胄孫)’이라 불러 달라고 겸양하셨다. 더구나 최부자댁이 정무공의 손자인 최국선 공으로부터 시작되는 점을 고려해 언제나 정무공 종손을 우선하는 말씀을 들려주시곤 했다. 당시 KBS 제안에도 이점을 들어 출연을 사양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KBS 담당자는 최부자댁을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 여겨 끝내 출연을 당부했고 더하여 정무공 종부님도 함께 출연하게 되어 최부자댁에서만 두 분의 종부가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반전이 또 생긴다. “이렇게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 종부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중 단연 주목을 받은 집안이 우리 집안이 되어 버렸어요. 전국의 여러 종부 중 우리 누이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우리와 인척지간인 종부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지요. 상객 중의 상객, 사돈을 중요시한 치마양반의 위세 아닌 위세가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드러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 여정이 펼쳐진다. 라우갤러리에서는 배윤정, 오정향 작가의 2인전이 3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경북대 동문인 두 작가의 기획초대전으로 비디오아트와 평면작품 총 20여점을 선보인다. 개인적인 경험과 보편적인 공감의 지점을 발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공간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전시. 이 전시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삶과 도시의 변화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며,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토대로 도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배윤정 작가는 영상 작업을 주요 매체로 활용해왔다. 초기에는 3D 작업에 집중했지만, 대학원 시절 미디어아트 전공 교수의 영향으로 점차 영상 작업에 매료됐다는 그녀다. 2017년부터는 2D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하며, 회화의 손맛에 대한 향수로 드로잉 기반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특히 칼라풀한 색채를 실험하며, 가상의 세계가 주는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적극 활용했다. 배 작가의 작품 세계는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개인적인 차원에 집중돼 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직접 말하기 어려웠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3D 작업의 대주제인 ‘나로 하여금’은 인간의 존재와 확신에 대한 질문을 자화상을 통해 표현했다. 배윤정 작가는 계명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개인전 6회를 개최했으며, 다수의 공연 및 미디어 퍼포먼스, 그룹전에 참여했다. 또한 ACC 창작공간네트워크 레지던시와 Ten topic project 입주작가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오정향 작가는 사라진 공간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선보인다. 사람의 기억은 감정, 생각, 삶의 역사가 반영돼 상당히 자의적이고 선택적이며 오류가 생길 수 있지만, 이런 특성이 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런 개별적인 기억들에서 공통성과 유사성을 발견하여 작품에 반영했다. 작품은 실제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만, 기억을 공유하고 이해, 공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공간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유사한 기억을 공감하고 자신만의 기억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정향 작가는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개인전과 단체전 활동을 펼치며, 2011년 ‘올해의 청년작가상’을 수상하고 2008년 ‘ASYAAF’에 선정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대구미술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 라우갤러리 송휘 관장은 “이번 전시는 작가 각자의 삶 속에서 겪었던 도시의 변화와 기억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관람객들 간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라면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되돌아보며, 공간 속에서 변화와 흔적을 발견해 보길 바란다”면서 밝혔다.
여름철에는 평소보다 더욱 귀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귀가 가렵거나 아프고 진물이 나게 되는 원인과 그 예방법을 알아보자. 물놀이 후에 갑자기 귀가 아프고 진물이 날 때 여름철 물놀이 후에 생기는 귀 염증은 주로 외이도염이다. 귓구멍에서 고막까지 이르는 통로를 외이도(外耳道)라고 하며 몸의 표면을 덮고 있는 피부가 외이도도 덮고 있는데, 물놀이 후에는 급성 외이도염이 생기기 쉽다. 외이도염은 수영장의 오염된 물에 존재하는 균이 외이도를 감염시켜 발생하며, 이때 동통, 소양감 및 난청을 호소하게 된다. 흔히 물이 귀에 들어간 느낌이 들면 면봉으로 물기를 닦아내려고 하는데 이는 오히려 물에 젖은 외이도 피부를 자극하고 미세한 상처를 만든다. 상처에 녹농균이나 포도상구균과 같은 세균이 침투하여 통증과 가려움증, 진물을 동반한 급성 외이도염을 유발한다. 이때 외이도를 관찰해보면 피부에 진행성 발적과 부종, 이루 등이 관찰되고, 이개(귓바퀴)를 움직일 때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치료를 위해서는 수영장 등에서 외이도가 습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세척 등을 통해 부위를 청결히 하며, 치료를 통해 적절한 산성화를 회복하면서 항상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통증이 심할 경우와 외이도 감염이 의심될 경우에는 적절한 약물 요법을 병행할 수도 있다. 환기관 삽입술(튜브 삽입술)을 시행받은 경우의 귀 염증 과거 삼출성 중이염으로 고막에 환기관 시술을 받았던 어린이라면 되도록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환기관은 고막에 작은 구멍을 유지하여 공기가 통하게 하는 작용을 하기에, 귀로 많은 물이 들어가면 환기관을 타고 고막 안쪽 중이까지 물과 세균이 침입해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고막에 삽입된 환기관은 대부분 일정 기간 후 저절로 빠지면서 고막이 아물게 되는데, 그동안에는 물놀이 시 귓구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경우 귀지에는 외이도에서 탈락된 각질 세포와 지방성 성분이 있어서 자연적으로 외이도 피부를 보호하고 외부의 먼지와 흙이 귀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외이도 입구 쪽에서 잘 밀려 나오던 귀지가 너무 많이 생성되거나, 과도하게 면봉을 사용해서 귀지를 외이도 안쪽으로 다시 밀려 들어가게 해서 귀지가 외이도에 쌓일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은 외이도가 좁기 때문에 공간이 거의 막히게 될 수 있고, 성인도 여름철에 습기로 땀이 차고 자꾸 면봉을 사용하다 보면 밀려 나오던 귀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 쌓이기 쉽다. 이럴 때 귀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이용액(귀에 사용하는 액체 용액)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비인후과 의사가 이경으로 외이도를 확인하여 필요시 작은 집게 등의 도구나 흡입기(석션)을 이용하여 제거할 수도 있다. 집에서 면봉이나 날카로운 물체를 사용해서 억지로 귀지를 빼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외이도 깊은 쪽으로 귀지를 밀어 넣게 되기도 하고 외이도 피부에 상처가 생기거나 고막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이비인후과에서 이경이나 이내시경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 더운 날씨에 보청기 착용 시 귀 가려움증 발생 귀는 다른 신체 부위보다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귀가 가려울 때 참고 견디기란 참으로 힘들다. 특히 보청기를 귀에 꽂고서 덥고 습한 여름을 지내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애써 맞춘 보청기를 빼놓고 지낼 수도 없기 때문에, 여름 동안 보청기를 착용하는 귀를 현명하게 관리하려면 기본적인 위생이 가장 중요하다. 귀가 가려운 것은 귓구멍 안의 외이도(外耳道)의 피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귓구멍 안의 외이도는 몸의 표면을 덮고 있는 피부에 의해 덮여 있는데, 여름이 되면 좁은 귓구멍 안에 습기가 차기 쉽고 특히 귀 속에 보청기를 꽂고 있을 경우 더욱 공기가 통하지 않아 눅눅해지기 쉽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귀지는 귓구멍에서 저절로 바깥쪽으로 밀려 나오게 되는데 보청기를 끼게 되면 자꾸 귀지가 귓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도 한다. 좁고 구부러진 귓구멍 안에 습기가 차고 귀지가 쌓이면 쉽게 세균의 침범을 받아 심한 가려움증과 통증, 진물 등이 생기고 귀가 먹먹해지는 외이도염이 생기게 된다. 염증을 예방하려면 외이도를 건조하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 샤워나 사우나 후에 귀에 물이 들어갔다고 해서 면봉으로 닦아내다가는 습기가 차고 부은 귓구멍 안의 피부에 오히려 상처를 만들어 세균이 침투하게 될 수 있다. 헤어드라이기나 선풍기를 이용해서 약 30cm 거리에서 20~30초가량 말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습기를 제거할 수 있다. 이때, 헤어드라이기를 너무 뜨겁게 설정해 귀에 가까이 대면 어지럽거나 화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날씨가 습하고 더운 날씨에는 땀이 많이 나고 귓속이 습해지기 쉬우므로 보청기를 뺀 후에 헤어드라이기나 선풍기로 말려주는 것이 좋다. 여름에는 습관적으로 귓구멍을 괴롭혀서 결국 만성 외이도염이 생긴 환자를 자주 만나게 되는데, 면봉을 항상 주머니에 챙기고 다니거나 심지어 성냥개비, 철로 된 귀이개, 볼펜 뚜껑 등으로 귀를 후벼파는 경우, 가려움증이 되레 심해지고 염증이 악화되어 악취를 풍기는 진물이 나고 청력장애가 나타나기도 하여 치료가 어려워진다. 일시적인 외이도염으로 인한 가려움증은 대개 외래 치료와 투약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 하지만 계속 귀를 후비거나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고집하다가는 보청기를 끼기 어려울 정도로 염증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손대고 싶을 만큼 귀가 불편하다면 이비인후과 의사와 상담하여 귀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름철 보청기 착용 시 귀 건강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잠을 잘 때는 보청기를 꼭 빼서 귀를 쉬게 해준다. 낮에도 한 시간 정도는 귓구멍이 쉴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면봉은 금물!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불러올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않아도 귀는 하루 24시간 외부 소리에 반응한다. 잠들었다가도 위급한 상황에서 소리를 듣고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기관인만큼 소리가 전달되는 외이-외이도-고막은 항상 외부와 통하기 때문에 여름철 고온과 높은 습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쉽다. 여름철에 쉽게 발생하는 귀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귀를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 (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글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용인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손은진
공고번호 : 경북-경주-2024-00588 경주시 진티1길 9 부근에서 구조 얼굴만 까만 강아지! 엄살이 좀 있지만, 말도 많아서 더 귀여운 아이! 믹스견 / 여아 / 1차 접종 O / 중성화 X / 3개월 / 1.8kg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그 숫자가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흔이 넘어 그림을 시작한 새내기 화가들의 특별한 전시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사진> 갤러리란에서 권순조(1944년생), 이진선(1952년생), 구옥자(1953년생) 3인의 작품 20여점을 선보이는 ‘인생은 70부터’가 진행되고 있는 것. 이들 할머니 화가들의 공통점은 70살이 넘어서 그림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늦은 나이에 미술에 입문한 그들은 이제 자신만의 화풍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일 작가와의 만남에서는 가족, 친지, 지인 50여명이 참석해 할머니 화가들의 등단식을 축하하는 시간이 마련돼 격려와 응원,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권순조 할머니는 고된 병마와 싸우다 그림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마당의 꽃과 나무, 화분, 바다 풍경을 소재로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낸다. 이진선 할머니는 남편을 보내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소나무와 풍경화가 주요 작품 소재다. 구옥자 할머니는 철학가인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권순조 할머니는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게 돼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라면서 “이 나이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줄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은 모두 70세가 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국민 할머니 화가 모지스와 영국의 로즈 와일리 할머니처럼, 이들 역시 늦깎이 화가로 주목받고 있는 것. 갤러리 란 관장 최한규 작가는 “이번 전시는 황혼의 인생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며 “할머니 화가들의 열정 넘치는 도전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메시지를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