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지역에서만 사용가능한 지역화폐 ‘경주페이’가 15일 출시됐다. 경주시는 지역 자금 역외유출을 막고 지역 내 소비촉진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충전식 카드형 상품권 경주페이를 발행했다. 15일 모바일 앱 출시를 시작으로 22일부터는 모바일 사용이 불편한 시민들을 위해 농협과 대구은행에서 현장발행 한다.‘..
경주한수원 여자축구단이 15일 오후 7시 황성체육공원 3구장에서 세종스포츠토토 여자축구단과 2020 WK리그 홈 개막경기를 치른다.이날 홈 개막경기는 한국여자축구연맹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지침’에 따라 무관중으로 진행된다. 올해 WK리그는 8개 팀이 11월 16일까지 정규리그 21경기(홈11경기)와 챔피언십 3경기가 ..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 상반기 채용을 실시한다. 채용대상은 체험형 인턴 26명, 공무직 3명, 기간제 3명 등 총 32명.지원서는 19일부터 26일까지 접수하며, 서류심사·필기시험·면접전형을 거쳐 8월중 최종 임용 예정이다. 입사지원서는 공단 채용 홈페이지(https://korad.recruiter.co.kr)를 통해 접수한다.체험형 인턴은 ..
경주시 물 정화기술 장치(GJ-R)가 베트남 수출 1호 납품으로 해외수출 길을 열었다. 경주시는 10일 외동읍 소재 ㈜지엠하이테크 공장에서 GJ-R장치 해외수출 베트남 1호 축하 기념식을 열었다. 경주시는 지난해 10월 베트남 선하그룹과 베트남 수처리사업 공동추진 협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전역을 대상으로 하폐수 처리장..
김상도 의원(더불어민주당, 선도·월성·황남)은 ‘경주시 식생활교육지원 조례안’과 ‘경주시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등 2건의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다. 2건의 조례안은 지난 4일 시의회 경제도시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경주시 식생활교육지원 조례안은 ‘식생활교육..
우수 자원봉사자에 대한 지원을 통해 지역 내 자원봉사활동 활성화시키기 위한 ‘경주시 자원봉사활동 지원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이 개정을 앞두고 있다. 서선자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이 대표 발의한 이 조례안은 지난 4일 시의회 문화행정위원회에서 원안 가결됐다. 조례안은 자원봉사증을 갖고 있는 지역 우수 자..
경주시의회 김순옥 의원(미래통합당 비례대표)이 대표 발의한 ‘경주시 모자보건 조례안’이 지난 4일 시의회 문화행정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조례안은 모성과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강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해 시민의 보건향상과 건강증진에 기여하고자 발의됐다. 조례안에는 모성 및 영유아 건강..
경주시가 코로나19로 직·간접 피해를 입은 시민과 착한 임대인 등을 지원하기 위한 지방세 감면을 실시한다. 경주시에 따르면 ‘코로나19 피해자 및 착한 임대인에 대한 시세 감면 동의안’이 지난 4일 열린 경주시의회 문화행정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동의안에 따르면 8월 부과 예정인 개인균등분 주민세 개인 1만원, ..
경주시가 동물보호센터 설치를 추진한다. 반려 동물 1000만 시대에 진입하면서 매년 버리는 사례도 늘고 있어 유실·유기동물의 안전한 관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데 따른 것. 현재 시는 민간 동물병원 2곳에 위탁해 유기동물을 관리하고 있다.경주시가 제251회 경주시의회 제1차 정례회에 제출한 동물보호센터 설치를 위한..
경주시가 지난해 예산을 편성해 놓고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사업이 많은 것으로 드러나 보다 효율적인 예산사용이 요구된다. 2019회계연도 경주시 일반회계 및 특별회계 결산검사 결과에 따르면 경주시가 지난해 편성한 예산 중 단 한 푼도 집행하지 못한 사업이 총 57건에 16억3400만원이며, 국·도비 등 보조금을 확보해놓고도 전액 집행되지 않은 사업도 6건에 3억4800여만원에 달해 예산 편성 및 집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예산을 집행하고도 잔액이 1억원이 넘는 사업도 10건에 50억여원이나 돼 집행률 또한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뿐만 아니라 연내 발주가 불가능한 제3차 추경에 신규 자체사업을 반영해 이월 금액을 증가시키는 등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됐다. 이외에도 세입금 환급 및 미수납 관리 미비, 일반회계 보조금 사업 집행 잔액 과다, 이월사업비 과다 등 총 18개 사항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정도면 경주시가 예산 편성과 집행을 효율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결산검사위원들은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사업 협의지연, 사업량 판단착오, 이해당사자의 사업추진 반대 등에 대해 관행적인 업무처리로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과다한 집행 잔액이 발생하지 않도록 추경예산 편성 시 삭감해 긴급한 주요사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월사업을 최소화해 재원의 효율적인 활용방안을 강구하는 등 집행 잔액 최소화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이같이 예산 편성과 집행 문제가 많이 발생한 것은 경주시가 사업의 우선순위나 타당성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우선 예산을 확보해 놓고 보자는 식으로 처리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예산은 사업의 중요성과 추진시기 등을 면밀히 검토한 후 편성해야 낭비가 없고 사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다. 효율적인 예산 편성과 이에 걸 맞은 집행은 경주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특히 가용 예산이 넉넉지 않은 경주시의 경우 예산을 적기에 집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경주시는 앞으로 철저한 검토와 심의를 거쳐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철저한 관리를 해야 한다고 본다.
기상청이 올해 여름은 평년보다 높은 폭염이 올 것이라고 예고한 가운데 경주시의 철저한 폭염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지난해 경북도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신고가 123건으로 124명의 온열환자가 발생했으며 월별로는 7월 52건, 8월 44건으로 7~8월(77.4%)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해보다 빠른 시기에 폭염이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온이 더 높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시 차원의 시민건강관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 보인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폭염에 취약한 어르신들의 건강관리가 더욱 중요하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접촉이 지극히 제한된 가운데 어르신들의 폭염 피난처 역할을 해왔던 경로당, 복지관 등은 아직 운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 600여곳의 경로당과 복지관은 어르신들이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겨울철에는 따뜻하게 지내는 공동생활공간이지만 올해는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가 넘는 경주는 특히 손길이 먼 농촌지역에 고령자가 많아 폭염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지자체들이 폭염대책수립을 서두르고 있다. 경주시도 최근 그늘막을 설치하고 폭염예방수칙 등을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요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폭염대책이 제한적인 상황임을 감안해 대대적인 양산쓰기운동을 계획하고 있는 곳도 있다. 양산쓰기가 보편화되면 폭염 피해를 줄이고 자연스럽게 물리적 거리두기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라고 한다. 경주시도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폭염대책을 수립할 때라 여겨진다. 그리고 우선이라도 폭염예방수칙과 코로나19 대응수칙 등을 알기 쉽게 만들어 가정마다 나눠주고 어르신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르신들의 건강 상황을 상시 체크할 수 있는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각 읍면동 복지담당과 이·통장, 마을회장과의 상시 연락망을 구축해 주요 시간대마다 수시로 점검하고, 현재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한 생활을 돕기 위해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로당 행복도우미들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얼마 전 AC(After Corona19), BC(Before Corona19)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Corona19는 이렇게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전 세계를 변화 시키고 있다. 많은 매스컴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까지 표현한다. 전 세계는 전염병 하나로 엄청난 파장을 미치고 있다. 경제를 위시한 인간의 모든 삶과 연관지어진 분야분야에 앞날이 어떻게 될지를 짐작하기조차 두렵고 또 어렵게 된 작금의 상황이다. 앞으로의 변화를 각 분야의 학자들이 서로 앞 다투어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은 지금까지의 변화나 대처 등으론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예전엔 엄청난 질병이었던 홍역이나 콜레라 같은 일상 속의 전염병으로 진행 되면서 백신도 치료제도 곧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하는 혹은 잘 정리하는 사람으로 쉽게 구분 지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그냥 일상의 여느 병처럼 그냥 지나가는 전염병정도로 치부하게 될, 조금은 무디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다. 다만 평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살아가야하는 사람이 조금은 많아질 상태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Corona19를 맞닥뜨린 이즈음 한 문화인으로서의 우려는 또 다른 앞날의 변화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Corona19를 통한 메시지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가장 우려 하는 것은 불신풍조 속에 사람과 사람간의 ‘단절’이라고 감히 정리하고 싶다. 기침하는, 재채기하는, 열이 나는, 또 늙은 등등이 본인을 공격할 것 같은 사람들로 주위에 있는 모두가 적군과 다름이 없는 전쟁 같은 상황이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Corona19이후 단절이 주는 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직하고 두려운 미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몇 주 전 얼떨결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이른 아침 용인민속촌에서 광역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물론 그때는 운전기사가 마스크 미착용에 대한 경고를 하던 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스 안은 싸늘했다. 마치 병 보따리를 안고 타는 사람을 보듯 모든 승객들은 고개를 돌리고 옆자리에 앉기를 꺼려했다. 다시 내려서 마스크를 가지러 가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실례를 무릎 쓰고 건장한 청년 옆자리에 앉았다. 순간 청년은 통로 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고 1시간 동안을 송충이를 대하 듯하며 쿵쿵댔다. 나 역시 그의 불편함을 인정하는 바라 창 쪽으로 몸을 틀어 햇볕을 온 얼굴로 막으며 그 시간을 버텼다. 간혹 나오는 불규칙한 마른기침은 버스 안 모든 이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고속도로위를 달리고 있었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는 강남역(신논현역)정류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정류소 앞 약국을 향했다. 순간 당황했다. 미닫이 문 창에 부착된 ‘마스크 미착용자 입장 불가’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의 실례를 무릎 쓰고 뻔뻔스럽게 입장 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약사가 두 팔을 들어 흔들며 동냥 나온 거지를 내쫓아내듯 기겁을 하며 나가라는 것이다. 황당했다. 문밖으로 밀려난 나는 본의 아니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고 급기야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상황으로 까지 가고 말았다, 잠시 후 뒤로 멀찌감치 물러선 그 여자 약사는 주민등록증을 요청했다. 마침 그날따라 공용마스크는 구매할 수가 없는 날이란다. 그러니 3장에 4500원짜리 마스크를 구입하라는 것이다. 그 상황은 너무나 답답했지만 결과는 정말이지 감지덕지다. 이런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어디 이것뿐이겠냐?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진실만을 과연 이해하겠는가? 이어져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신’과 ‘단절’에 배려니, 양보니, 공동체니 하는 단어가 그들에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 한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현관을 들어서는 늙은 아버지, 어머니의 이마에 체온계를 들이대고 몸에 소독약을 뿌리곤 “죄송해요. 됐어요. 올라오세요!”하는 며느리를 어떻게 탓하랴? 이미 이 나이만큼 살아온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겠지만 사회를 알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불신’과 ‘단절’만을 배우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며 살아갈까?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지금의 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게 될까?
‘인간답다’라는 말은 언제 쓰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인간과 다른 존재의 삶을 들여다보면 될 것 같다. 동물들, 혹은 식물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의 삶은 지극히 소박하다. 소박하기 때문에 필요이상의 먹거리를 탐내지 않고, 미래의 불안을 대비한다는 명목이나 과시를 위한 축적이 없다,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면 거의 살생을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인간은 어떠한가? 마치 신에게 도전하듯 거대해지고, 화려해지며, 건강한 신체를 빌미로 동물들을 식육하며, 식물들의 본연의 모습을 강제로 조작하는 등의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그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폭력성은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기저의 생각들이 재생산되고 고착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지구가 지금 이 시각에도 시속 1300km로 자전을 하고 있고, 시속 10만kw정도로 공전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21세기의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태어나기 전부터 창의성으로 무장된 교육은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서 더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함을 오히려 불행으로 여기게 한다.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지구인들을 멈출 수 있는 길이 그동안에는 없었다. 몇몇 명상가들이나 참 종교인들의 외침은 너무 작았다. 발전이 모토가 된 지구인들 스스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고, 어쩌면 빠름에 중독된 인류는 멈추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몇 개월의 강제 멈춤의 시간은 매우 고귀해야만 한다. 신이 강제로 멈춘 것이 아니라 지구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인과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본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안개를 걷고 선명하게 잠시나마 보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우리는 집 즉 가정으로 돌아갔고, 최소한의 사람들을 만났으며, 최소한의 물질로 생활을 영위해갔다. 아까워서든, 나중을 위해서든 남겨두었던 식량들을 끄집어 내어 감사하게 먹었다.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감사했고, 소소한 일거리라도 있는 것에 감사했다. 심리적 혼란과 자발적 격리 속에서 나눔과 봉사와 기부행렬은 줄을 이었다.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은 국가브랜드를 만들만큼 성숙했다. 세계적으로도 공해가 심했던 인도에 30여년 만에 히말라야산맥이 도시 중심에서도 보이게 되었고, 미세먼지로 봄마다 몸살을 앓았던 우리나라에도 맑은 하늘과 공기를 돌려주었다. 우리가 지구인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모범 답을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꺼번에 느끼고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고 본다. 선진국대열에 들어선 만큼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하소연이 한반도를 흔들어대어 국가는 현대판 구휼미를 풀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원하는 한편, 물심양면 지자체와 공조해 모든 분야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상상도 하지 못할 금액인 몇 천억, 몇 조의 현금이 여기저기서 풀린다는 소식이 매일 언론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돈이 흐르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활동이 재개되고 우리는 다시 원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소박한 삶의 미덕이 도외시 되었던 오래된 습관들로 되돌아가고 있다. 굶주릴까봐 열었던 나라의 곳간이 꼭 필요한 생필품이나 소외된 작은 식당, 업소들을 돕는 것이 아닌 고급식당에 갔다왔다는 이야기와 평소에 벼르던 고급 장비들을 구입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국가가 재난지원금을 지원하는 의도와는 크게 다르다. 이런 소리들이 들린다는 것은 3개월 정도 경제가 멈춰도 큰 지장이 없이 준비가 잘 되었다는 소리이기도해서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멈춤의 시간’이 무의미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깝다. 배움을 통해 성찰과 깨달음을 얻고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교육의 값진 원리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작은 소유, 가장 적은 관계를 통해 행복이라는 것을 맛보고 감사함을 절실히 느꼈던 불과 어제의 일, 오늘의 일을 잊어버리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0세기 최고의 여성 성악가를 뽑으라면, 마리아 칼라스(M.Callas/1923-1977)를 빼놓을 수 없다. 단아한 용모, 뛰어난 실력, 그리고 기품 있는 무대매너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처음에는 프리마돈나를 꿈꾸는 풋내기 가수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 극장은 오페라 가수라면 누구나 꼭 서고 싶은 꿈의 무대다. 1778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의 명에 따라 설립된 이래로 로시니,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웅들이 이곳에서 명작을 발표했다. 라 스칼라의 주연배우는 이탈리아 전국구를 넘어서 국제적 스타로 인정받았다. 칼라스가 이탈리아로 넘어 온 때는 토스카니니가 캐스팅한 레나타 테발디(R.Tebaldi/1922-2004)가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칼라스에게 테발디는 넘지 못할 벽처럼 보였다. 그리스계 미국인이란 사실도 핸디캡이었다. 하지만 칼라스는 칼을 갈며 준비했고, 마침내 기회를 잡는다. 1950년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앞두고, 테발디를 대신해 무대에 서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성악가로서는 꽃길을 걷는다. 칼라스가 데뷔할 당시에는 사실주의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가 대세였다. 반면 여성 성악가의 기량을 중시하는 벨칸토 오페라는 구닥다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칼라스는 19세기 초반의 벨칸토 오페라를 20세기에 부활시킨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자신의 성악역량을 최대치로 부각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칼라스가 부른 벨리니의 노르마 타이틀 롤은 특히 극찬을 받았다. 그녀 자신도 비올레타나 토스카가 아닌 노르마 역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칼라스는 벨칸토 창법에만 능통한 가수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장르의 오페라를 소화할 줄 알았다. 영화배우로 치면, 한 명의 배우가 멜로, 로맨틱 코미디, 심지어는 호러나 스릴러까지 모든 분야에서 주연을 맡는 거랑 비슷하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칼라스를 소프라노 아솔루타(Soprano Asoluta)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절대적인 소프라노다. 더 이상의 찬사는 없을 것 같다. 칼라스는 연애 스케일도 남다르다. 아버지 연배의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 후 바람이 난다. 불륜의 상대는 그리스의 유명한 선박왕 오나시스였다. 하지만 오나시스가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사랑에 빠지면서 멀어진다. 칼라스는 일세를 풍미한 스타였지만 그녀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공원 이야기 포항 동해면 임곡리 해변가에 영일안 바다를 바라보며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공원이 길게 자리잡고 있다. 포항의 대표 설화인 연오랑과 세오녀를 주제로 하여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시작되는 지역이다. 포항시 시승격 70년이 된 작년에 ‘귀비고’가 완공됨으로써 소위 신라문화탐방 바닷길인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전면에 영일만 바다와 포항 제철소 전경이 전개되고, 호미곶까지 아름다운 해안섬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인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해서는 상고시대 해와달의 이야기와 관련해 삼국유사(기이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동해 바닷가 연오랑과 세오녀 일본에 떠내려가 왕(왕비)이 되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AD158)때 동해 해변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있었다. 어느때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서 해조류를 뜯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있던 바위가 쩍 갈라지면서 동해 바다로 둥둥 떠나갔다. 뜻밖의 일이라 놀란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주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부인인 세오녀가 걱정할까봐 마음이 안절부절했다. 망망대해로 떠내려간 연오랑은 며칠 후 일본해안에 도착했고, 그 곳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육지에 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오랫동안 먼 바다를 살아서 온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해 그를 왕으로 삼았다. 한편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부인(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아니하자 이상히 여겨 해안가를 다니면서 여기저기 찾았지만 끝내 남편은 없었다. 동해바다만을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신세가 된다. 얼마후 그가 신든 신발을 바위위에서 찾아내어 두리번 그리는데 이젠 그 바위 또한 흔들거리면서 그녀를 싣고 연오랑이 있는 일본나라로 갔다. 이 곳 해안가 사람들이 세오녀를 보고 놀라 왕에게 아뢰니, 오랜만에 부부가 서로 반갑게 상봉하게 되었고 역시 세오녀는 왕의 귀비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없어지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다 한편 이런일들이 벌어진 사이에 신라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어느날 이 후 이상하게도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것이다. 왕이 일관을 불러 왜 이런가 하고 물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갑자기 일본땅으로 가버린 탓으로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사신을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를 찾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연오랑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어찌 내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왕비가 짠 고운 명주비단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가서 하늘에 제사지내면 어려운 일이 해결될 것이오”말하고 비단을 사자에게 주었다. △왕비(세오녀)의 비단을 가져오자 해와 달빛이 다시 소생 사자가 돌아와서 신라왕에게 아뢰고 시키는 대로 제사를 올렸더니 그제서야 해와 달이 전과같이 빛을 찾게 되었다. 왕은 비단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에 놀라 왕실의 특별창소에 간직하고 보물로 삼았고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그리고 왕이 해와 달의 정기를 되찾기 위해 바닷가에 나가 제사를 지낸곳을 영일(迎日)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 또한 비단을 놓고 제사를 지내던 연못 일월지(日月地)은 직경 250여m, 면적 16.500㎡쯤되는 둥근 연못으로 해병대 지역에 있다. 이 전설은 상고시대 신라·백제 문화의 일본 흐름을 말해주는 표본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 공원 둘러보기 테마공원 내 바닷가 옆에 둥글게 지어놓은 건물이 귀비고(貴妃庫)이다. 공원 내 가장 커고 우아한 건물이다. 설화속에 신라의 해와 달빛을 소생케한 비단을 보관한 신라궁중 창고 모양이다. 이 건물앞에 쌍거북돌이 포개져 있는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타고간 바위를 추정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를 돌면서 기도를 하면 바라는 것을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 귀비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전시실, 일월 영상관, 양외 테라스 등이 있고 실내 천장 수족관에 생물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귀비고에서 나오면 부부가 살았다는 초가집이 있고 길 옆 마을 벽에는 두 부부의 설화 내용이 적혀있다. 멀리 포항제철소 전경 동해안의 시원한 바다, 떠다니는 배, 해안풍경 등으로 가슴이 확 트이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잇다. 포항을 빛낸 제1호 인물인 연오랑과 세오녀를 상징하는 이 해양공원이 여름철 바닷가의 시원한 힐링코스로 매우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에 김유신(金庾信) 전설이 서린 단석산(斷石山)이 있다. 산 능선에 4개의 바위가 둘러싸인 천연굴 상인암(上人巖:탱바위)이 있고, 바위굴 속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신선사(神仙寺:단석사)가 자리한다.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며 바위를 칼로 베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오악(新羅五岳)은 동쪽 토함산, 서쪽 선도산, 남쪽 함월산, 북쪽 소금강산 그리고 단석산은 신라의 중악(中嶽)으로 가장 우뚝하고, 단석산에서 발원한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해바다로 들어가는 태화강의 근원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1권,「경상도·경주부」에 의하면,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구해 월생산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1855년(철종6)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임명된 학음(鶴陰) 심원열(沈遠悅,1792~1866)은 울산 및 경주 여러 지역을 두루 탐방하고 「계림옥적기(鷄林玉笛記)」·「처용무서(處容舞序)」·「경주고도기(慶州古都記)」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학음은 노론 시파의 선봉 은파(恩坡) 심낙수(沈樂洙,1739~1779)의 손자로, 문장이 빼어났으며, 주로 시파계열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안타깝게도 벽파에 의한 조부의 삭탈관직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단한 삶을 살았고, 44세(1835년) 늦은 나이에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청양현감(靑陽縣監)·광흥창수(廣興倉守)·고양군수(高陽郡守)·공주판관(公州判官) 등을 역임하였지만 유배도 수차례 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서 『학음산고(鶴陰散稿)』는 소중한 지역학 연구자료로 평가받는다. 학음은 울산부사로 있을 때 일생산(단석산)을 유람하고 「일생산기(日生山記)」를 지었는데, 일생산은 월생산과 동일한 공간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마검굴(磨劍窟)에서 10년간 수도한 효험과 비법 그리고 삼국통일 위업의 연관성을 언급하였고, 한편으로 김유신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의 문인들에게 단석산은 김유신과 연관되어 망국의 신라가 아닌 전성기 통일신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에 대한 칭송의 문장이 주를 이룬다. 경주문인으로는 동곡(東谷) 이공상(李公祥,1787~1856)과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 등이 단석산의 장관을 글로 남겼다. 일생산기(日生山記) 경주부 서쪽 20리에 ‘일생산’이 있다. 일생산은 높은 봉우리 위에 있어서 편평한 들판이 10리쯤 된다. 그 위에는 천인탑(千人塔)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단석암(斷石庵)이 있으며, 신라장군 김유신이 기도하던 곳이다. 또 마검굴(磨劒窟)이 있는데, 수천 년이 지나도 오히려 그대로이다. 김장군은 단석암에 있으며 목욕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늘에 기도하며,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땅을 침범하여 소란케 하니, 주제넘게 일개의 작은 신하가 맹세컨대 화란을 깨끗이 없앨 것입니다. 오직 천신께서 강림하여 살피고 수단을 빌려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노인이 와서 “이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데, 귀소년(貴少年)이 혼자 어찌 이곳에 있는가?”라 하였다. 김장군은 재배하며 방술(方術)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청하였고, 노인은 비결을 주며 “삼가 망령되이 전하지 말고, 의롭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장군은 고구려·백제·말갈족이 번갈아 가며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평정할 뜻이 있었다. 밤마다 병서를 읽어 군대의 일에 밝아졌으니, 노인이 준 책 덕분이요, 또 칼로 큰 돌을 자른 것은 무용(武勇)을 익힌 덕분이었다. 돌이 잘린 자취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으니, 사람들이 마검굴이라 불렀다. … 일찍이 듣기에, 김장군의 묘소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 가운데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말의 다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는 사람들은 감히 말을 타지 못하고 내려서 지나갔다. 훗날 어떤 과객이 타던 말을 죽여 그 피를 김장군의 묘소에 뿌리고 나서부터 신기한 현상이 없어졌으니, 귀신은 말의 피를 가장 꺼린다고 하였다. 나 역시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며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고, 하마비의 자획이 아직도 마멸되지 않았다. 김장군의 자손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났으며,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고 일반 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황제나 요순의 성인도 그 후예들은 오히려 씨족의 자손들을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김장군의 후손은 오죽하겠는가? 김장군을 생각하니 매우 애석하였다. … 내(심원열)가 울산부에 있을 때 진양목(晉陽牧:진주)에 거주하는 김장군의 후손들이 뜰에 와서 하소연하며 군안(軍案)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청하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8, 9명이었다. 나는 김장군의 일에 감탄하여 아울러 군역을 덜어주고, 양반 가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지난 해 경주 흥무대왕릉을 안내해 본란에 올랐던 정윤영 선생이 최근 곤줄박이 가족과의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페이스북 감성을 폭발시켰다. 정윤영 선생이 곤줄박이 부부를 만난 것은 지난 4월 29일. 그러다 지난 5월 13일 정원 살구나무에 올려 둔 새집 구멍에 손녀가 손을 쑥 밀어넣으면서부터 그 집에 곤줄박이 부부가 포란 중인 것을 알았다. 몇 년 전에 쇠박새 부부가 알을 까고 이소한 적 있는 기록적인 새집이었다. 이때부터 정윤영 선생의 관찰이 페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포란 중이던 곤줄박이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날아든 것은 5월 23일. 부부의 보호아래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입 딱딱 벌리며 모이 받아먹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가 새집을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패친들을 긴장에 빠뜨렸다. 이에 정윤영 선생은 판자로 고양이가 함부로 못 뛰어들도록 벽을 설치하며 새들의 안녕을 빌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도 잠깐 뿐 이틀 후인 25일에 절망적인 소식이 올라왔다. 고양이에게 잡혀 먹힌 모양인지 어미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 다행히 새집 통로가 좁아 새끼 새들까지 해코지 할 수는 없었던 듯. 이에 본인이 직접 기를 것인지 자연의 선택에 맡길 것인지를 두고 난색을 표하던 정윤영 선생은 기어코 스스로 육추의 길을 떠맡았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둥지를 내렸을 때는 이미 새끼 두 마리는 죽고 세 마리가 살아있었다. 이때부터 정윤영 선생은 그물로 육추장을 만들고 돼지고기 다진 것과 삶은 달걀, 파리를 잡아 먹이기도 하다가 결국 새들이 즐겨먹은 먹이인 밀웜을 사 사육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또 한 마리가 죽고 곤이와 박이라 이름 지어진 나머지 두 마리가 끝까지 생존, 결국 새집을 떠났다. 이때까지 정윤영 선생의 육추일기는 350~850여 개의 ‘좋아요’가 달리는 등 그야말로 문전성시였고 정선생과 두 마리 곤줄박이를 응원하는 댓글들도 무수하게 이어졌다. 육추일기의 재미는 중간에 고양이에 대한 경계와 정선생 집 반려견 봄이의 경계로 긴장감도 충만했다. 그럴수록 새들을 향한 정성은 깊어만 갔고! 이런 정성과 응원의 결과, 두 마리 곤줄박이는 정윤영 선생을 알아보고 손가락과 머리위에 앉는 등 부부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며 성장했고 마침내 6월 6일 열흘 여의 지극한 정성 끝에 결국 새장을 떠났다. 날아 간 새들을 향한 정선생의 바람은 ‘다시 보고 싶다’와 ‘그래도 다시 오지 말라’는 이중성으로 표현됐다. 그리고 하루 만인 6월 7일 다시 날아와 자신의 손가락에 내려앉은 곤이와 뜨거운 재회를 기록하는 것으로 육추일기가 일단락됐다. 긴 여정을 짧게 요약하느라 감동의 순간들이 제대로 옮겨지지 못했지만 곤이와 박이의 쩨쩨거리는 울림이 긴 여운을 안고 뇌리에 남는다. 특히 곤이가 다시 돌아와 손에 내려앉은 것에 대한 페이스부커들의 찬사는 감동 그 자체다. 사람과 자연의 교감, 자신을 아끼는 사람에 대한 새의 친밀감은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십여 일 간 곤줄박이 아버지, 아니 엄마로 산 정윤영 선생의 바람대로 곤이와 박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기 바란다.
경주사람들, 배불리 먹고 누울 자리 등 따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해학으로 입과 귀에 익은 말, “조천(교촌) 최부자 눈 알(아래)로 보인다” 이렇듯 멀지 않는 이웃인 최씨가다. 신라궁궐터 옆 마을, 남천을 내다보는 천혜의 환경에 둘러싸여있다. 양 사방 유서 깊은 자취로 더욱더 돋보이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선비가옥이다. 과객들 붐비던 그 시절 연상되듯 고색창연한 고택 주위로 관광객 발길 여전하다. 긴 세월 양반집의 원형을 보존하고 명부의 격조와 품격을 갖춘 역사의 산실이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1972년 사랑채가 불에 타 소실되었다. 2006년 큰 사랑채는 복원되었고, 작은 사랑채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경주 내남면에서 터를 이루다가 ‘최언경’(1743~1804) 대에 교동으로 이주해 터전을 굳혔다. 건축당시 향교 유림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 뜻을 수용하여 향교보다 2단계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집을 지었다. 소통과 화합으로 지역민과 더불어 나아가는 삶의 겸손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1700년대 건립 된 조선한옥의 솟을대문은 그 당시 향교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쳐 원하는 취지에 맞게 지어졌다. 기존의 솟을대문 구조와는 달리 화려하지 않으며 평범함이 수수한 솟을대문 형식이다. 1970년대 필자 학창시절 서부리에서 노서동으로 굵은 대들보 한옥지어 이사했다. 아버지의 삼천리호자전거 바빴던 오남매 크던 집, 골기와 솟을대문 형식이었다. 문간채방 구조배치를 빼고 보면 최씨고택 솟을대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에 복원한 최씨고택 큰 사랑채는 명문집안의 역사를 대물림 하고 있다.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면암 최익현, 그리고 방문당시 스웨덴의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국왕, 의친왕 이강공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작은 사랑채는 1972년 11월, 불에 탄 흔적들로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그 당시 화재뉴스를 듣고 이모가 거쳐하던 마을이라 놀란 가슴 궁금증이 컸다. 겨울방학에서야 비로소 현장을 둘러보고 안타까움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안채는 남향의 ㅁ자 형태로 지어진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다. 붉은 벽돌 둘러친 마당 장독대로 큼직한 항아리들 장맛솜씨 담고 있는 듯하다.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고방마당, 작업마당, 사당마당 등 6개 마당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배치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방마당 동편엔 정면 5칸, 측면 2칸, 현존하는 전통 한옥의 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이 있다. 쌀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다. 국가와 민족을 살피는 애민정신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후하게 대접했다. 흉년이면 이웃들에게 나눔과 배품의 문을 활짝 열었던 곳간이다. 그 곳간에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자료가 발견되었다. 편지와 공문서, 명함, 서책 등 수 만 가지 경주의 보물급 문서들이다. 주요한 기록유산과 학술적 문서들이 큰 궤짝 세 개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동경통지』는 1933년 ‘최 준’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정인보’ ‘최남선’의 자문을 받아 집필했다. 목판본 14권 7책 중, 영남대학에 기증하고 남은 5권의 초고 원고도 나왔다. 독립운동관련자료, 경주국채보상운동문서 등, 보존된 무더기 귀중한 문서자료 발견은 최씨가의 명성을 더 실감하게 하는 세간 사람들의 관심사다. 발견문서 중 필자를 포함한 친정오빠, 남동생 4남1녀 모교인 <월성초등> 기사를 보면, 『경주시사』 제7편 교육 편에 경주월성초등학교연혁이 1927년이다. 개교식 당일 연설문이 수록돼 있는 새로운 문서기록에 ‘1911년 월성여학교 (월성초등학교전신) 설립자 ’최 준’이 경주군청 주사(오경수 전)에게 보낸 개교식 안내초청장’이 발견됐다. 16년을 앞당기는 월성초등학교의 설립자로 ‘최 준’선생을 다시 재조명돼야할 과제로 남았다. 계림·월성·황남, 경주시내권 초등학교 설립일자를 보면, 계림초등 1907년.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책에 등장하는 황남초등학교는 1940년이다. 우연한 기회에 창고를 열어 경주 최부잣집 정신의 보고(寶庫) 문서를 대거 발견한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이사는 “위대한 건축물이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전국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지만, 지난해(2019년 여름) 창고에서 발견한 기록유산들은 진정한 최부잣집의 정신적 보물입니다. 조선후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해제되지 않는 22~33년 전의 서류와 귀중한 문서만 해도 만 점이 넘습니다. 최부잣집을 더 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유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인 경주 자산을 제대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우선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라고 소명을 토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임시정부 땐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광복 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계림대학과, 전 재산을 기증해 현 영남대학을 설립했다. 300년 최부잣집 부의 명성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나눔의 봉사정신이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삶의 철학으로 민족운동의 뜻을 펼친 최씨가, 훌륭한 가문의 영광이 실감된다.
경주시 궁도협회(회장 성창용)는 지난 5일 양동초와 국궁교육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번 업무협약은 올해 궁도협회에서 추진 중인 호림정과 궁도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국궁교실 사업의 일환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전통 문화를 익히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궁도협회는 매주 월요일 양동초 전교생 52명을 대상으로 전통사법, 활쏘기, 활터 예절 등을 가르치게 된다. 성창용 회장은 “지역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궁도를 배움으로써 심신단련을 통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며 “육체적 정신적 건강은 물론 우리 전통문화를 익히고 배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동초에서 처음 실시하는 국궁교실이 경북도 모든 학교에 전파되는 계기가 돼 청소년 활쏘기 문화가 정착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활쏘기는 1928년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지난 4월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예정했다. 특히 활쏘기에서 배울 수 있는 궁도구계훈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인애로써 덕을 베풀며 성실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보건복지부가 오는 30일까지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집중 신청기간을 운영한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노인맞춤돌봄서비스는 노인의 욕구에 따라 맞춤형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기존 노인돌봄서비스를 통합·개편한 것으로 현재 약 30만 명의 어르신이 전국 647개 수행기관에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지역은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 공영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 하나노인복지센터, 경주노인복지센터, 참사랑노인복지센터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어르신은 각 읍·면·동 주민센터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신청자격은 만 65세 이상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또는 기초연금 수급자로서 유사중복사업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 자로 독거노인뿐만 아니라 고령부부, 조손가정도 신청할 수 있다. 직접 방문이 어려운 경우에는 읍·면·동 주민센터에 전화, 우편 또는 팩스로도 신청이 가능하며, 가족 등이 위임장 등 관련 서류를 준비해 대리 신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안내, 신청 방법, 신청 서류 등 자세한 정보는 관할 읍·면·동 주민센터, 보건복지상담센터(국번 없이 129) 또는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1661-2129)에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