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는 지난 10일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2기 진실화해위)’ 출범에 따라 이날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과거사 문제 진실규명신청을 받는다.진실화해위는 지난 6월 개정·공포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1기 활동이 종료된 지 10년 만에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앞서 1기 진..
경주 척사항이 해양수산부 주관 2021년 어촌뉴딜300사업 신규대상지에 선정됐다. 선정에 따라 경주시는 국비 47억원 포함 총사업비 68억원을 확보했다.어촌뉴딜 300사업은 낙후된 어촌의 혁신성장을 위해 선착장 등 어촌의 필수기반시설을 현대화하고 지역자원을 활용한 특화개발을 추진해 어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업이다..
모든것은 비워야지만 채워지고 채우려면 비워아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채우는 것의 연속이다 탄생 또한 마찬가지다
매년 최하위권(5등급)을 벗어나지 못하던 경주시 청렴도가 2020년도 평가에서는 2단계 상승한 3단계로 나아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공공기관의 청렴수준 및 부패요인을 진단해 자율적 개선노력을 유도하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청렴도 평가에서 2020년도 경주시 청렴도는 지난해 평가보다 2단계 상승한 ‘종합 3등급’을 받았다. 권익위에 따르면 경주시는 ‘2020년도 청렴도 종합평가’에서 전국 75개 시 중 ‘종합 3등급(7.83점)’을 받았다. 시는 2018년 5등급(6.72점), 지난해 5등급(6.80점)을 받는 등 2016년부터 매년 최하위등급인 5등급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나아진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시가 민선 7기 출범 이후 강도 높은 반부패 청렴 정책을 집중적으로 실시해온 결과로 보여 진다. 주낙영 시장도 2018년 7월 취임 이후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청렴도 향상을 위해 고강도 조치를 천명하는 등 청렴한 공직사회를 만들기 위해 매진했었다. 그리고 취임 2년째를 맞아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평가를 살펴보면 종합청렴도 3등급은 여전히 전국 대상 시의 평균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민원인 상대로 평가한 외부청렴도(특정인에게 특혜제공, 갑질관행, 부정청탁에 의한 업무처리, 업무처리의 투명성과 공정성, 금품 및 향응, 편의 경험률 등)가 향상된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직원들 상대로 평가한 내부청렴도는 아직 전국 시의 평균에도 못 미쳤으며, 특히 업무 청렴은 전국 평균과 큰 차이를 보여 조직 내부 관리와 직원들 간 소통, 업무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주 시장은 이번 평가결과에 대해 “민원인이 평가하는 외부청렴도에서 전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그간 시가 노력해 온 부패 예방 노력 등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하고 “아직 만족할 수준이 아니어서 갈 길이 멀다. 시민에게 봉사하는 청렴한 경주시로 거듭나기 위해 강도 높은 청렴시책을 지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주시의 청렴도는 공공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도시 수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시 청렴도가 과거에 비해 향상되고 있는 만큼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말고 개선에 매진해 최고의 청렴도로 최상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주시라는 평가를 받길 바란다.
경북도와 경주시가 지난 1일 0시 기준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1.5단계로 높인지 불과 8일 만에 2단계로 격상하는 등 경주지역 코로나 확산세가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이달 들어 경북도내에서 경주에서만 거의 매일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어 비상이 걸렸다. 경주지역은 지난 9일 0시 현재 133번 확진자가 발생했다. 지난 1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1.5단계로 높였지만 이 기간 20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발생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높였지만 이미 늦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겨울철 실내 활동이 많아지면서 감염 위험이 높아지는 환경이지만 지난 1차, 2차 확산 때보다 무증상 확진자들이 바이러스를 옮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경주 확진자들은 대부분 다수와 접촉했으며 노래연습장, PC방, 숙박업소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방문해 동선을 파악하기도 어려워 앞으로 확진자가 얼마나 많이 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현재로선 검사 후 확진자가 나오면 확진자 수를 발표하고 수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경북도는 지난 8일 0시부터 28일 1시까지 경북형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다른 광역자치단체와는 달리 유흥업소와 방문판매, 노래연습장, 카페, 음식점 등 여러 업종별 운영 방침 등을 공표하고 모임·행사와 종교시설 참석 인원 제한 등 1.5단계 수준의 운영을 유지하면서 2단계 방역의무를 당부하고 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선 마스크 착용과 주기적인 시설 환기와 소독 등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출입자 명단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향됐지만 아직 업종별로 출입자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번에 경주지역에 무증상 확진자가 많고 감염경로가 불분명한 환자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출입자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로 높인 경주도 앞으로 일주일이 매우 중요할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낮추는 것도 결국 시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경주의 현실이다. 코로나 확산위기를 막기 위해선 경주시의 철저한 관리, 감독과 시민들이 방역의무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 정부가 확진자와 접촉하지 않았거나 증상이 없어도 진단 검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확대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검사를 받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사회적 안전거리 준수 단계 강화와 자영업자 한숨. 요즘 들어 어제 보다 적은 재료를 준비하여 손님응대를 하고 있지만 오늘도 손님에게 팔지 못한 재료들이 쌓이고 있다. 이 긴 터널이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고 억지 추측과 예측으로 희망고문을 하고 있다. 왜 자영업자들이 코로나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는지 국민청원이 올라와 단 하루 만에 1만1000명의 동의를 얻어 사회적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자영업자의 사업정리와 폐업을 지원하는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위탁사업 희망리턴패키지 재기교육을 6년째 시행을 하고 있다. 2019년도 36년간 경영해 온 음식점 식당을 폐업지원하기 위하여 참여하신 자영업자의 폐업 사연은 “가족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해주고 싶어 폐업을 합니다”라고 하여 주변을 밝게 만든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이후 참여하는 폐업자분의 이구동성 폐업 사연은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개업 한지 1년 미만의 자영업자의 한숨 속에는 70%이상 매출 감소이며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저곳 자금을 빌려와서 개업한 자영업이 매출 급감으로 이윤이 추구되지 않는 악순환 상황이 7개월째. 임대료와 공과금, 대출 이자 등 직접적인 생업 경제 애로를 이야기 하면서 온 정성을 드려 조성한 나의 점포를 차마 내 손으로 정리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정부의 점포 철거 비용이 지원된다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563만 자영업자는 99.5%가 자기 자본 또는 대출 융자 상환의무가 있는 창업 자금으로 개업을 하여 투자와 경영을 함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출 감소에 의한 경영어려움을 극복 할 방법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재기 교육 수업 시간에 가장 강조하는 것은 투자 받아 점포를 경영하자라고 한다. 제발 자신의 돈으로 창업하고 경영 하려고 하지 말아 달라고 강조 한다. 또한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하는 고정 관념을 버리라고 이야기 한다. 정말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공짜는 있다.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면 우선 상환 의무가 있는 것은 융자와 대출, 차입 자금이다. 하지만 일정 구비 요건이 충족되는 지원 사업은 상환의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요건 충족에 의한 지원으로 사업 목적에 부합한 행위를 하면 된다. 정부와 지자체 등 수 많은 예산이 일자리와 관련 예산이고, 각종 지원 정책을 쏟아 내고 있지만 정작 참여하는 소상공인 자영업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정책을 살피고, 찾아 하고자 하는 점포 경영에 접목하고, 운영 할 수 있도록 주목 하여야 한다.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원받아 창업 하여 개업 하신 분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과 예비 고객에게 점포 경영에 필요한 내용을 여쭙고, 참여 할 수 있도록 하여 투자 받아야 한다. 왜 우리는 건설업과 운수업, 여행업 같은 직종은 선지급에 의한 상품을 수령하고 이용하면서, 판매와 유통, 음식업은 후 정산으로 자금 압박을 받는지 이해 할 수 없다. 우선, 나의 점포 경영 업종에 소비자들이 참여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투자로 전환 하고, 투자자에게 서비스 하며, 재화와 용역을 제공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모두 팔 수 있는 사업, 그것은 바로 투자하시는 고객, 이용자의 참여와 제품 이용에 있다. 그리고 이들이 경영 어려움에서 홍보와 판매 사원으로 동참하여 준다. 사업의 성과가 나올 때 세금과 각종 준조세(국민, 건강, 고용, 산재, 장기요양보험)로 인하여 원천 징수 납부자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매출이 없고, 오늘 하루 당장 먹고 살길이 암담하다. 그렇다면 매출이 없는 지금 수익이 없는 지금 국가는 개개인에게 부족한 순이익만큼 지원하여 보전 하여야 하지 않는지? 참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나도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하루 텅 빈 거리를 살피면서 초라한 하루살이의 꿈을 접고, 발걸음을 잠을 잘 수 있는 곳으로 돌려 본다. 자영업 하시는 분에게 힘과 위로를 드리는 글 보다 살아남는 방안을 찾아 제언하는 이 글이 요즘처럼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다. 어서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지인에게 투자 받고, 지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오늘의 이 위기를 하루 빨리 탈피하기를 소원한다.
어느 나라이든지 간에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되짚어 보면, ‘모두가 다 가난한 나라였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소위 말해서 오늘날 부자나라, 선진국 나라, 그리고 정말 잘사는 나라들도 어느 특정한 시대의 변곡점 이전 까지는 그냥 고만고만하게 살았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퉁 쳐서 이야기하자면 중세시대에는 보편적으로, 계몽기 시대는 선별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냥 그렇고 그렇게 사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산업혁명’과 ‘근대’라는 ‘결정적 변곡점’을 지나면서 오늘날의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전체적인 윤곽과 틀이 잡혔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류의 모든 조상들은 어느 한 시절 가난한 ’그때의 그 시절’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가난 했던 그 시절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의 조상뻘 되는 인류는 ‘먹고 또 마시는 일’에서 나름의 아픔과, 가슴 아린 기록의 편린들이 있었을 것임에 당연하다. 그래서 음식은 사는 이야기가 녹아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삶의 일부분인 것이고, 생활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 사회학자들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그 어려웠던 시기 먹고 사는 일들을 어떻게 해결을 하고 살았던가? 첫째, 서로 돕고 살았다. 둘째, 최악의 먹거리로 생명을 유지 했다. 셋째, 굶주려 죽는 일들이 허다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로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어떻게 돕고 살았을까? 서구 유럽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국가이다. 따라서 통치 철학이나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람들의 정서적 뿌리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나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세의 수도원이나 계몽기 시절이후 청교도와 복음주의 운동은 엄청난 역할을 했다. 우리의 조상들 또한 ‘환난상휼’의 유교적 이념이나 불교의 ‘이타행위’ 혹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치에 입각해서 서로 돕고 살았다. 둘째, 최악의 먹거리로 목숨만 연명했다. 유럽 사람들은 ‘humble food’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오늘날 미식의 최고봉에서 군림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도 개고기를 먹었던 시절이 있었고,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들도 보리죽을 먹고 동물들 내장까지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들이 허용할 수밖에 없는 먹거리의 경계는 사실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어떠했던가? 초근목피로 생명을 유지했고, 보릿고개란 말도 엄연히 역사에 남아 있다. 배고픈 시절에는 누구나 ‘개죽’이라도 먹고 살아남아야 했던 그 시절이었다. 흰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반쪽의 한반도 저 너머에 있다. 마지막으로, ‘기아’로 인해서 죽어야만 했던 일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나 통계는 대부분 숨기고 있거나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아일랜드의 경우 거의 800만 인구 중 400만 정도의 인구가 기아로 인해서 죽었거나 난민으로 모국을 떠났던 인류 역사상 최악의 먹거리 대참사로 기록되어 있듯 먹지 못해서 죽은 사람들은 질병으로 죽는 사람만큼이나 많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인간의 생존’과 ‘음식’에 대해서 이렇게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바로 ‘더불어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서로 돕고 살았다. 둘째, 최악의 먹거리로 생명을 유지 했다. 셋째, 굶주려 죽는 일들이 허다했다’ 이 세 가지로 전개 된 필자의 ‘생존’과 ‘음식’의 상관관계 논지는, 사실 ‘첫째, 서로 돕고 살았다’에서 끝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최악의 먹거리로 생명을 유지할 일도, 굶어서 죽는 일도 우리도 더 많이 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향땅 경주시의 ‘사랑의 김장 김치 나누기’ 행사 소식을 보면서 참 기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이 행사가 시청에서, 자치단체, 면, 동, 기업 심지어 조그마한 식당업주까지 릴레이로 전개 되는 과정을 보면서, 필자는 내심 탄성을 질렀다. 이 시즌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경주처럼 ‘범시민적으로’ 축제처럼 하는 곳은 어느 곳에도 없다. 하물며 겨울철 먹거리로 김장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경주신문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필자가 원고의 방향으로 천명한 것이 ‘브랜드 경주와 음식’이었다. ‘사랑의 김장 김치 나누기’ 행사는 현재의 진행 상황만을 놓고 볼 때 ‘브랜드 경주’를 더 한층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멋진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음식 사회’를 통해서 본 필자의 진단이다. 먼저 해야 하고, 기왕지사 할 바에는 확실히 해야 한다.
잊혀져가는 소방 역사를 짐작케하는, 오래된 장비를 간직한 소방서가 건천에 있습니다. 경주시 건천읍 모량1리 경로당 바로 옆, 작지만 단단한 옛 건천소방서(건천모량의용소방대)가 바로 그 주인공 입니다. 지금의 규모로 따지자면 읍면동에 있는 119지역대 정도가 될까요?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지만 모양새가 단단하고 야무집니다. 큰 글씨로 쓴 ‘불조심’이라는 경구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가동되지 않고 건천읍 내서로 1065에 있는 경주소방서 건천119안전센터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칠해진 셔트문을 드르륵 올리면 1990년대에 출시된 작은 소형 소방 트럭 한 대와 놀랍게도,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던 옛 소방기구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남아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기물들이었습니다. 소방차가 없던 시절 사용했던 완용소방펌프(수레형 소방차)는 그 모양새가 참 독특했습니다. 벽면에는 소화기구인 각종 쇠스랑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완용소방펌프는 지금의 소방차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때 사용하던 완용소방펌프는 사람이나 소, 말이 끌고 다니며 불을 끌대 사용하던 지금의 소방차였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까지 실제로 사용됐다고 하니 그저 신기하고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올해 초 문화재청은 근현대문화유산 목록화 사업을 시작했고 소방안전 분야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아도 관련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이 소중하기만 합니다. 그 가치를 주민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수 년 전 소방박물관 측에서 이 유물을 기증해달라는 요청을 뿌리쳤으니까요. 이곳은 모량리 의용소방대 대장과 대원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약 70년 된 건물입니다. 요즘은 소방서에서 출동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 일대 소화를 담당했었지요. 쇠스랑들은 예전에 초가집들이 많아서 볏짚을 끄집어내고나서 물 뿌리고 할 때 사용하던 기물입니다. 불을 끌 때 완용소방펌프(수레형 소방차)가 실제로 출동하기도 했어요. 약 50여 년 전, 동네서 불이 나면 어른들이 이 수레를 끌고 밀며 불을 껐던 기억이 납니다” 인근 주민의 회고입니다. 이 소방서에는 첨탑이 하나 있는데 그 꼭대기에 사이렌이 장착돼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사이렌이 이곳 맞은편 고목위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려야만 사이렌 소리가 났기 때문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 울리곤 했습니다” 겨울 짧은 하루 해가 ‘까무룩’ 저물어가는 모량1리에도 저녁은 오고 70여 년간 수많은 저녁을 함께 맞이했을 이 소방서도 주민들 곁을 지켰을테죠. 시골마을 작은 소방서와 옛 소방기물들이 앞으로도 주민들의 옛 시절을 소환하고 소방의 역사를 보여주는 추억의 장치로 잘 보존되기를 바라봅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 그림=김호연 화백
경주에 수많은 의병장들이 활약하였고, 곳곳에 그들의 넋을 숭모하는 사당이 건립되었지만, 아쉽게도 주요 관광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찾는 이의 발길은 한산하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천북 소재의 성남서사를 찾아 차를 타고 골목 곳곳을 누비며 지난 행적을 쫓았다. 경주시 천북면 성지리에 위치한 성남서사(聲南書社)는 의병장 운암(耘庵) 최봉천(崔奉天,1564~1597)을 모신 공간으로 경주의 의기(義氣)가 서린 곳이다. 1789년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이 지은 행장을 참고하면, 황오리에서 태어난 운암은 어려서 재종형 최신린(崔臣隣)에게 글을 배웠고, 15세(1578)에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1585년 22세 때에 아들 최계량(崔繼良)이 태어나고, 군위에 있는 남계서당에서 예조판서 서애 류성룡을 찾아가 만났으며, 견위수명(見危授命)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1588년 무과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종종 이태립(李台立)·김석견(金石堅)·백이소(白以昭) 등과 함께 무예를 익혔다고 기록한다.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부산에 와서 일본이 장차 변란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온 나라가 소란하자, 운암은 경주부윤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비의 글을 올렸다. 29세 때 왜란이 발발하자 붓을 던지고 4살 아래인 조카 최진립(崔震立,1568~1636)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주성 탈환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최계종(崔繼宗) 등과 함께 문천회맹에도 참가하였다. 항상 선봉에 나서 타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전술전략이 빼어나 공을 세웠다. 1594년에 선략장군 훈련원첨정, 1595년 경상좌도 수군우후, 1596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우후 등을 지냈으며, 1597년 34세 되던 정유재란 때에 또다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백이소 등과 영천 창암진(倉巖陣)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사후 1605년 선조 38년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권(錄券)되었고, 4월 26일에는 부모에게 2품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1607년에 아들 최계량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세월이 흘러 1821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사당 부조묘가 세워졌으며, 1984년 부조묘 오른쪽에 성남서사를 창건하기에 이른다. 이에 후손들은 화재로 소실된 운암의 사적을 다시 모아서 『운암실기』를 편찬하였는데, 1959년에 권상규가 서문을, 최영우가 발문을 지었으며, 운암의 12대손 최해구(崔海九) 그리고 최세목(崔世睦)·최수민(崔壽民) 등이 힘써 도왔다. 성남서사 사우(祠宇)에는 상충사(尙忠祠), 강당은 경의당(景義堂) 그리고 추모정(追慕亭)·유정재(由正齋)·탁충문(卓忠門)·덕수재(德修齋)·진경재(愼敬齋)·한탁헌(澣濯軒) 등이 있다. 현재는 찾는 이가 드물고 의병정신의 혈기는 퇴색된 채 세월의 무상함만 가득할 뿐이다. 운암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는 경주의 자랑이며, 후세에게 전해져야 할 소중한 정신문화 공간이지만, 아직까지 운암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실정이다. 다만, 공의 7대손 최주곤(崔柱崑)이 묘지명을, 귀연(歸淵) 김근순(金近淳,1772~?)이 묘지명을,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1795~1875)가 묘갈명 등을 지으며, 그의 자취를 남겼다. 운암은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요충지를 지킬 책무는 없었지만, 선비의 도리를 지킨 절의(節義)의 인물로, 문무를 겸비하며 선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스스로 개척하였고, 가문과 지역사회 그리고 나아가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실천하였다. 한문학자 이가원(李家源,1917~2000)선생은 1986년에 성남서사 기문을 지으며, “공의 12대손 최해구가 선대의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고, 집안 어르신의 뜻을 계승하는 것에 감동하였다.”라며 후손 최해구·최문철·최수순 등의 노력을 치하하였다. 『운암실기』 중에서~ *운암실기 간행위원회 정유재란 2월에 운암은 경상좌도 수군우후의 직위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구는 다시 14만 대군을 이끌고 거제도와 서생포 등으로 침입해오자, 수군통제사 원균은 패하여 죽고, 여러 고을 사람들은 왜구의 풍문만 듣고도 도망하여 숨었다. 승세를 올린 왜구는 7월에 총공세를 펼친 끝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점령하였다. 당시 왜장 가등청정(加籐淸正,가토 기요마사)과 부장 희팔(喜八)은 군위-신령-영천-안강-경주 등을 거쳐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마침내 9월에 영천 창암에서 경주와 영천 등의 관군과 의병들이 연합하여 일대 총격전을 벌였다. 당시 아군의 숫자는 적고 왜군이 월등히 많았다. 이 전투에서 운암과 백이소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졌다.
발레음악하면 연상되는 작곡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1840-1893)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베토벤이나 바그너가 발레음악을 작곡했던가? 금시초문일 것이다. 19세기의 발레음악은 이류 작곡가의 몫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작곡가들은 발레곡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당시에도 정상급 작곡가였지만 발레음악에도 손을 댔다. 그의 작곡으로 발레음악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에겐 ‘발레음악의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이른 바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 작품(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은 오늘날에도 고전발레의 대표작품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아는가?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이 작품들의 흥행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대체로 의상과 안무였지만, 음악에 책임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 후 13년이 흘러 1890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래도 백조의 호수 만큼의 실패작은 아니었다. 문제는 세 번째 작품이다. 오늘날 12월의 효자상품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호두까기인형은 1892년 마린스키 초연에서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발레를 한 단계 후퇴시켰다는 참담한 혹평까지 들었다. 차이콥스키의 불멸의 발레곡 세편의 시작은 이렇게 미미했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가 죽은 후 마린스키 극장의 프티파와 그의 조수 이바노프(L.Ivanov/1834-1901)의 새로운 안무로 화려하게 부활(1895년)한다. 2막과 4막의 호숫가 정경을 안무한 이바노프의 공이 특히 컸다. 초연이 비교적 좋았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1921년 런던 공연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한편 호두까기인형은 1934년 바이노넨(V.Vainonen/1901-1964)의 수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1954년 러시아발레단의 후예인 조지 발란신이 뉴욕에서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유행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이콥스키가 주로 발레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다재다능한 작곡가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인 예브게니 오네긴(Evgenii Onegin/1879년 초연)을 작곡했고, 교향곡이나 협주곡 작곡도 수준급이다. 6번 교향곡 비창과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늘날 널리 연주되는 차이콥스키의 작품이다.
겨울초입에 들어섰다. 코로나 똬리 튼 겨울입김이 싸늘하다. 천지강산 단도리 하는 경계의 선들이 날카롭다. 어디쯤 주춤하는 기색이 엿보이면 좋으련만, 자고새면 더욱더 조심조심 무장해야하는 일상이 살얼음판이다. 서로를 안정시키며 위로하고 위로 받는 존재의 품성이 각별한 요즘이다. 악귀를 물리치고 재앙을 막기 위해 추던 신라때 춤, 처용무(處容舞) 불러와 한바탕 질펀하게 추고나면 코로나 몹쓸 역병이 달아날려나! 그 춤은 신라왕경 달 밝은 밤에 번뇌를 떨치려 절실했거니 포석정은 신라 49대 헌강왕(875~886)이 산신으로부터 춤을 배운 터다. 신라의 왕들이 사시사철 맑게 흐르는 포석계에서 계욕을 하고, 헌강왕에게 춤을 가르친 산신 상심(詳審)이 살고 있다고 믿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조상과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서러운 유적지다. 【삼국사기】 55대 경애왕(924~927) 가을 9월, 견훤이 고을부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 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병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훤은 또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비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갔다. 견훤은 왕을 협박하여 극단적 선택을 하게하고, 왕비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포석정은 경애왕이 신하들과 흥청망청 즐기다가 신라를 패망으로 이끈 비운의 장소로 치부된다.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삼국사기(1075~1151)·삼국유사(1206~1289)가 엮어진 시기는 신라가 패망한 후 긴 세월이 흐른 뒤다. 전깃불도 돋보기도 우리글도 없던 무명(無明)의 시절이다. 필기구도 암울했기에 빼고 덧 씌워진 구전(口傳)으로 전해진 역사서다. 필자는 불 밝고 돋보기 흔한 세상, 컴퓨터로 글을 써도 시 한편 짓는데 천 번을 퇴고 한다. 그러한데 무명의 신라적 책 쓰기는 오자 탈자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충이리라. 또한 역사의 기록은 승리한 자의 몫이기에 고려시대 기록 된 신라의 기록은 흠집이 새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삼국사기】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위웅이며 경명왕의 동복아우이다. 원년 9월,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유사】 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고좌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삼국사기】 경순왕(56대 신라 마지막 왕, 927~935)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읽으면 경애왕은 외교활동도 진취적이고, 조상을 섬기는 예의범절, 어눌하고 소외된 계층을 살피는 어진 왕임을 알게 된다. 23대 법흥왕 시기 공인한 불교를 숭상하고 더 높고 넓게 깊이를 가하는 종교의 성찰도 짐작하게 된다. 견훤에게 무참히 주검을 당했거늘, 경순왕으로 하여금 신하들과 통곡에 이른 것은 재위 기간 업적이 훌륭했으리라는 공명이 아닐까. 헌강왕 시절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 때 홀연히 산신이 내려와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다. 왕은 신하들에게 한동안 연회를 멈추게 하고 춤을 지켜보았다. 그 동작이 신하들에겐 보여 지지 않았다. 춤이 끝나자 신하들이 여쭈었다. 헌강왕이 “산신이 춤을 추고 갔다”고 했다. 신라의 국운을 살펴주는 상서로운 춤으로 어무상심(御舞詳審)·어무산신(御舞山神)이다. 이후에 나라 안에 널리 퍼져 고려 때까지 추어졌다고 전한다. 신라인들의 성지인 남산 입구에 위치한 포석정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을부(지금의 영천, 경주에서 차(車)로 20분) 가까운 거리에서 신라를 공격하려 주둔해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리고 태조 왕건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한 상태다. 과연 한 나라의 왕이 적군이 쳐들어오려는 긴박한 현실에서 신하들과 흥청망청 즐길 겨를이 있을까. 그리고 견훤이 침범해온 음력 11월은 양력 12월이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기엔 살얼음이 끼어서 불가능이다. 포석사(砲石祠)의 사(祠)자는 절 사(寺)자가 아닌 사당 사(祠)자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는 포석사에서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려 남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다 경애왕은 적군에게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50대 어름. 그 이상 기성세대, 특히 경상도 사람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묻는다면 비슷한 대답이 나올 법하다. 무뚝뚝하고 고집스럽고 때로는 꽉 막혀 답답한 존재쯤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경상도 아버지를 특정 짓는 가장 큰 이미지일 것이다. 반면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자녀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다. 이런 점이 어머니가 각별하게 여겨지는 반면 아버지에 대해 살가운 추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아들들은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못 해 보고 오해 속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안 계시면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커 보인다고들 한다. 과묵하고 엄하게 보였지만 가정을 돌보느라 등골이 다 휜 아버지의 말없는 은근한 온정을 느끼는 것은 그 아들들이 차곡차곡 아버지의 긴 행로를 따라 자신의 인생을 밟아가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고 무뚝뚝하고 꽉 막힌 모습, 아버지의 모습이 됐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짧은 글이 지난 8일 김영우 씨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김영우 씨는 생전의 아버지가 쓰던 라도 시계를 올리며 아버지를 추억했다. 시계방 가서 물어보니 50년은 족히 되었다는 아버지 시계, 멈춘 줄 알았는데 몇 번 흔들어 보니 신기하게도 시계가 갔다며 좋아했다. “이걸 손목에 차고 있으니 내 앞으로의 시간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듯하다” 아버지에 대해 이보다 더 정겨운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김영우 씨의 짧은 한 문장의 말이 그 어떤 수식어보다 진하고 큰 감동으로 심장에 박힌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스위스 명품 시계 라도의 글자판이 누렇게 변했다. 어쩌면 아버지 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투명했던 아버지 마음을 쉰 살 어름, 오래전 아버지 나이에서 보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과 서로 통하는 이치 아닐까? 그러고 보니 시계에 가 있는 자잘하게 긁힌 흔적들이 더 깊게 보인다. 세상을 온몸으로 견딘 아버지들의 힘들었지만 묵묵했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위덕대 외식산업학부 로타랙트 클럽(지도교수 이인숙) 동아리 회원들은 지난 2일부터 4일 직접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고 대자원과 위덕요양병원에서 재능봉사활동을 가졌다. <사진> 주말마다 시행 되고 있는 봉사활동이 코로나19 영향으로 잠정적으로 미루어지다 코로나 19가 재확산 되면서 방문을 금하고 준비한 물품을 전달했다. 로타랙트 외식 동아리 13명의 회원들은 학교에서 전날 전달할 재료 밑 준비를 해 케이크와 쿠키를 만들어 대자원과 위덕 요양병원을 방문해 케이크와 쿠키를 전달했다. 로타랙트 학생들은 “아이들에게 옷이나 책도 필요하지만 간식도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전공을 살려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쳐나가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인숙 지도교수는 “학생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해줘서 대견하다. 비록 직접 만나서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는 봉사였지만 학생들이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책임과을 느끼고, 간접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참 보람 된 날이었다”고 전했다. 한편 위덕대 외식산업학부 로타랙트는 지난 10년 동안 대자원과 요양병원 협약을 맺은 후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경주시 청년센터는 지난 8일 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 교육장에서 ‘청년고도’ 청년기자단(서포터즈) 역량강화 교육 및 발대식을 개최했다. <사진> 청년기자단은 경주시 청년센터에서 진행되는 청년지원 사업을 지역 청년들에게 홍보하는 목적으로 경주시 청년센터가 기자단 인력풀을 구성해 청년지원 사업의 시민참여를 유도하고, 지역 청년들의 경제적 활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날 발대식에는 청년기자들에게 위촉장을 전달하고 기자단으로 활동하게 될 단원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진행됐다. 청년기자다원들은 “기자단 활동을 통해 경주가 정말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도시이고, 지역에서 청년들이 잘 모르고 있는 지원사업 등을 소개해 지역 청년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기잔단 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기자단 활동과 함께 지역도 홍보해 대한민국 최고 관광지인 경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청년기자들은 몇 차례의 역량강화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지역 청년사업을 홍보하는 유투브 동영상, 브이로그, 기사 등을 개인 SNS와 블로그, 청년센터 홈페이지에 기재할 예정이다. 가경사회서브스센터 관계자는 “2021년 2월 개관 예정인 경주청년센터를 통해 경주시가 청년들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들을 시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에 청년기자단원들이 지역 청년들에게 지원사업을 홍보하고, 참여를 유도할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전했다.
경주노인복지센터(소장 김경태)는 지난 2일 어르신들의 따뜻한 겨울나기 지원 사랑의 김장김치나누기 사업을 진행했다. <사진> 경주시알천봉사회, 한전KPS(주) 월성권역(월성1사업처, 월성2사업처, 월성3사업소)과 함께 진행된 사랑의 김장김치나누기 행사를 통해 400포기의 김치를 소외된 계층에 전달했다. 이번 김장김치나누기 행사는 한전KPS(주) 월성권역(월성1사업처, 월성2사업처, 월성3사업소)에서 김장식재료구입비용을 후원했다.
새마음인성개발교육원 주최, (사)새화랑청소년연합이 주관한 ‘온라인 주부 투머로우 말하기대회’가 지난 5일 줌(ZOOM)에 접속해 3분 분량의 스피치로 진행됐다. 온라인 주부 투머로우말하기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으로 열렸으며 참가자 중 16명이 최종결선에 올라 진솔한 이야기로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석기 국회의원은 축전을 통해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비대면으로 바뀐 상황에서 일과 가사를 병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주부들의 도전의 장이 소통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또 주부의 한 사람으로 박차양도 의원은 격려로 참가자들에게 큰 공감을 자아냈다. (사)새화랑청소년연합 박재홍 회장은 환영사에서 “솔개론을 통해서 어느 순간 한계가 왔을 때 과감하게 자기의 발톱과 부리, 깃털을 뽑아 버리고 미래의 30년을 준비하는 솔개처럼 의미있는 도전을 환영한다”면서 “어느 때보다도 소통과 교류가 필요한 시기에 온라인으로 치러진 행사는 행사 이상의 의미가 있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참가들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뀌는 멋진 모습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행사는 ‘밝은 내일을 여는 교양지 투머로우 매거진’을 선정해 읽은 후 느낀 마음의 변화와 가족 간의 소통, 부부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해소 등 집콕시대에 걸맞는 맞춤형 주제로 선정하여 독서하고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나아가 다양한 갈등해소와 가정문제 해결법 등을 솔직한 표현으로 참석자들과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번 대회 대상은 김정숙(47) 씨가 ‘내가 행복을 찾는 이유’라는 주제로 발표해 수상했다. 김씨는 오래전 출산하는 날 진통을 겪으면서 힘들었을 때 무심한 남편의 말이 깊은 상처가 되어 오해하고 마음을 닫고 살았는데 서로 마음을 알고 소통하면서 오해가 풀어지고 행복한 부부로 돌아온 생생한 스토리를 발표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최우수상은 이인정(37) 씨는 ‘자녀를 사랑한다면 마음에 브레이크를!’이란 주제로 진정 자녀를 사랑한다면 마음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부분을 발표했다, 우수상 서현선(60) 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주제를 통해서 이혼 후 재혼한 남편의 안 좋은 점만 보다가 갈등했는데 장점을 보기 시작하면서 가장 행복한 부부로 바뀐 모습을 차분하게 전했다. 우수상 류난희(45) 씨는 ‘내 마음속 이기적 유전자’란 주제로 발표했는데 마음을 나누지않고 답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교통사고를 통해서 가족의 사랑을 발견하고 화목하게 된 이야기로 큰 공감을 얻었다. 이번 대회에는 월간 Tomorrow 속의 마인드를 읽은 후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가족 간의 소통과 사랑, 부모와 자녀, 부부문제 갈등해소 사례, 자녀와의 갈등해소, 자잘하지만 꼭 해결해야 인생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등 집콕 생활로 지친 주부들로부터 소통과 교류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원고가 접수됐으며 심사 후 예선을 통과한 주부들이 온라인 줌 화상회의 앱을 통해 발표하며 결선대회를 진행했다. 최종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박창규 새마음인성개발교육원 대표고문은 마인드강연 시간에서 ‘마음은 열고 표현하고 나누는 것’이란 주제로 마음이 바뀌는 데에는 커다란 사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한마디의 말에 있다는 부분과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기에 언어를 통해서 서툴지만 표현할 부분을 강연해 호응을 받았다. 박귀룡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심사평에서 “주부님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마음이 다른 사람, 남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의 표현을 하는데 서툴러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자유롭게 말하기대회를 통해서 표출하는 부분을 높이 평가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심사위원을 맡은 안강인성개발교육원 민웅기 고문은 “한 분 한 분 자신의 삶을 말로 표현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소망을 주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투머로우총괄본부 이상한 본부장은 “삶은 조금씩 도전하면서 1%씩 좋아지는 것”이라고 전했다. 참가자들은 “코로나로 인하여 집콕 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갈등,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고 또한 오해와 갈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말하기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갔다”고 소감을 밝혔다. 새마음인성개발교육원(회장 신경식)은 다수의 마인드강사들이 어린이, 청소년, 군부대, 기업체, 실버대학, 해외 마인드강사 파견, 해외 인성아카데미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시기에는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해 온라인으로 인성교육을 펼치고 있는 단체다.
-세속의 번잡함 끊어버린 과감한 탈속성 돋보이는 미공개작 첫 선... “공개되는 그 순간부터 작품은 이제 제가 평가할 영역이 아닙니다. 온전히 관람자의 몫이지요” 이 화백은 현재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형태의 보다 이상적인 삶을 찾아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의 삶과 작품에는 무엇보다 세속의 번잡함을 끊어버린 과감한 탈속성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3년~5년전부터 준비해 최근까지 공들여 완성한 작품도 있는데 구작 3점을 포함해 16작품이 출품됐다. 모두 미공개작으로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화가의 상상력은 경계가 없어 뵌다. 어떤 작품에도 단정 지어 화제를 달지 않는 이유의 근간이다. 그래서 얼핏,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들에서 탑은 왜 기울어져있는지 왜 인왕상이 출현하는지, 풍탁으로서 물고기는 왜 공간에서 유영하는가에 대한 여러 장치에 매몰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꿈을 꾸지 않으면 구태를 탈피할 수 없다며 자유스러운 발상과 상상에서 시작한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모래와 안료를 섞은 기법도 선보인다. ‘꿈에서 꿈이로다’ 라는 이번 전시명도 화가가 직접 지었다. 일상을 지탱하다가 지루하면 꿈을 꾸고 꿈꾸다가 다시 굳건하게 현실을 꾸려가는 삶의 모습을 표현했기에..., 분황사를 배경으로 우주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선 오로라가 피어오르며 무수한 별들을 크레용으로 마구 휘감아 올리듯 표현해 한층 몽환적이다.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극복해 살아가는 여인에게서는 삶의 굳건함이 전해진다. 탑신에 표현된 풍탁에서는 구애없이 유영하거나 비상하는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취매향’에는 잡스러운 것에서 벗어난 듯 찬 공기가 가득하다. 영양 신사리 고추밭 석탑은 화가 자신의 수작으로 꼽는다. 가히 독보적이다. 석탑을 배경으로 피어난 사계의 아름다움은 연작으로, 혹은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된다. 영양의 화천리 폐광촌에서 석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상처투성이의 삶에서 건져 올린 삶의 희망을 고요하게 승화시킨다. 부모님께 바친 헌화(獻畵)였던 ‘운주사 소견’은 약 한 달간 운거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작품 경향도 달라지고 표현기법도 달라져서인지 보는 이들도 편하게 봅디다” 이 화백은 작풍이 바뀌었다는 평에 대해 “항상 색을 직접 연구하고 제조해 사용해왔어요. 예전보다 힘의 완급이 조절됐어요. 아직도 미완이긴 하지만 이전의 직접 개발한 천연안료와 밀랍 작업이 무척 고단했었어요. 그때보다는 힘을 빼고 편안한 방법으로 그렸지요. 아크릴 물감에 수성이나 유성 페인트 등 공업용재료를 혼합해 보다 간단한 기법으로 시도했습니다. 작품 보존 문제는 검증돼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어 혼합재료는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긴 합니다. 작품 경향도 달라지고 표현기법도 달라져서인지 보는 이들도 편하게 봅디다”라고 했다. 표현기법과 재료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이전보다 담백하고 붓질의 움직임도 훨씬 여유롭게 보이는 대목이다. 이 화백은 변함없이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다. “생래적으로 경주에서 자라서겠지요. 경주 산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체화된 연유인 듯합니다. 표현의 기법이나 재료에서 자유롭기를 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법을 늘 궁구합니다. 화력, 화업이 쌓일수록 아이의 마음이 됩디다. 보는 대상이나 시각이 선명해지고요. 조희수 선생(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이며 유일한 생존 작가)도 ‘태태야 잘 그리려고 하지마라. 생각이 시키는대로 해라’고 하십니다. ‘잘 그리려고 껍데기에만 신경쓰지마라. 공갈빵 된다’라는 가르침을 늘 새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신작들에선 한층 더 가벼워진 탈속의 기운이 넘친다. -“제2의 황술조, 김만술 같은 후배들이 배출돼야지요.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존중해 준 적 있는지도 반추해 보아야” 현재 경주작가들의 위상과 경주 1세대와 2세대 작가군에 대한 조명이 집중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는 “안타까운 이야기 입니다. 경주 작가 1세대와 그 다음 세대에 대한 연구와 화업의 정립은 매우 중요하고 잘 마무리 돼야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후배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하는 몫이 남아있습니다. 제2의 황술조, 김만술 같은 후배들이 배출돼야지요. 젊은 지역작가들이 경주다운 색깔을 내고 경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터전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후학들이 혹독한 현실의 장벽을 견뎌내고 자존심을 견지하며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존중해 준 적이 있는지도 반추해 보아야 합니다. 그 자존심을 존중해줄 때 수단으로서의 경제적 부분은 극복할 수 있겠지요. ‘옳은 풍류’를 구현할 수 있도록요. 그렇다면 적은 무대일지라도 자긍심을 가지며 진지하게 작품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지역작가와 후배작가들이 존립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전시공간 확보와 미술관 설립은 만시지탄” 이어 최근 지역의 핫 이슈인 경주시립미술관 건립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우선 미술관의 성격과 정체성부터 명확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수집해 보관하고 연구하는 곳이고 전시장은 발표의 장(場)으로 무대와도 같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가난한 지역작가와 후배작가들이 존립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의 전시공간과 미술관 설립의 당위성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주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경주를 빼고는 대한민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만큼 위상이 우뚝한데 시립미술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미술인이 작품을 기증하고 싶어도 기증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이 지금의 경주시입니다” -“제 인생에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꿈을 꿨으면 알맹이를 내보여야 하겠지요. 작가가 붓을 들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않고 농부가 농시 짓지 않으면 안 되듯 계속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화가지요. 조희수 선생께서 ‘이봐 태태야. 긴 외도(작품활동을 잠시 미뤄두고 1983년, 경주와 대구서 ‘이가 화랑’을 운영했고 서울 인사동에서도 화랑을 운영하는 등의 시기)끝에 돌아와 시작했으니 단단하게 쌓은 네 집을 지어야 되지 않겠나. 내가 뒤에서 못도 챙겨주고 기둥도 세워줄게’라고 하십니다. 멋진 선배를 두어서 저는 참 행복해요. 저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됩니다” “제 인생에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후회 없었고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이 되겠지요” -에필로그...취재를 마치면서 ‘통시(通時)’, ‘태태’. 이태희 화백을 수식하는 호이자 별칭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화백은 그 흔한 포트폴리오(portfolio) 하나 가지지 않았다. 온갖 화업과 경력과 수상내역을 빼곡하게 정리한 자료로 화가를 먼저 이해하고 인지해 온 기자에게는 그런 이 화백이 다소 생경할 정도였다. 전시자료라고 건네준 건 달랑 작은 엽서 크기의 안내장 한 장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화백이 좋았다. 그런 날것의, 그림 이외엔 아무것도 관심 없는 듯한 선생의 비효율적인(?) 성품이 참 좋았던 것이다. 작품으로는 조용히 웅변하지만 선생의 거침없는 언어는 때론 직격탄을 쏘아 올리기도 하고 적확하게 꼬집는 통렬함이 있어 탄산수 같이 속시원했다. 카페공간을 겸하는 갤러리 화(龢)에서 만난 이태희 화백은 ‘옳은 풍류인’으로서 화가들이 자긍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 기저에는 화가에 대한 예우와 존중이 기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2020년 올 한해 우리는 코로나로 우울해지고 심신이 지쳤다. 마치 축복과도 같은 이 전시를 보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확고히 해 온 이 화백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이며 유일한 생존 작가인 조희수 화백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있어서일까. 조 화백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하고 화우들인 최용대, 강민수 화백과의 교류를 통한 시너지에 대해서도 수차례 언급했다. 연륜과 연단된 정신을 통해 더욱 내밀해지고 깊어진 작가정신으로 돌아온 그의 작업은 여전히 굵은 힘줄과 긴장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선후배 화우들과 교류하면서도 상상을 달리하고 시각과 방법에서 자유로우며 어떤 것이든 수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태희 식’이라고 한다. 이 화백은 그래서 누구보다 젊다. -사진촬영/제공 : 신광사진관 김상범 대표.
-“저희 힘으로 저희보다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을 돕고 싶어요. 저희 가슴에 담긴 희망의 빛을 함께 나누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해보고 싶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공연한 노력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보통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공연한 오지랖’이라 오해와 질시의 대상도 되지만 그 일을 해내고 나면 그 가치는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것도 ‘아무려면 이 친구들이···?’라는 의문부호를 달만큼 여러 연령대의 어린 친구들이다. 초등학생부터 중고교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이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보고 어려운 친구들에게 희망의 빛을 전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쳤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그들 자신. 불과 얼마 전까지 혹은 어쩌면 이 순간에도 따듯한 가정의 혜택을 온전히 누려보지 못한 채 메마른 사회와 현실에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보다 더 소외되고 더 힘겨운 친구들을 위해 뜻을 세우고 마음을 모은 채 달리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응원하고 힘을 보태야 할 어른들이 아직은 드물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들과 함께 훨씬 큰 희망의 메시지를 쏘아 올릴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하는 의문과 보이지 않는 질시와 냉소, 그마저도 아닌 무관심 등으로 인해 이들의 도전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지켜줄게 너를-마음을 담은 노래2’라는 앨범을 제작하고 ‘콘서트’를 여는 일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앨범에는 ‘아동학대예방캠페인’의미가 담겼다. 수록될 10곡의 곡들은 이미 작업을 마쳤지만, 앨범 만들 비용을 아직도 다 마련하지 못했다. 또한 앨범의 의미인 ‘아동학대예방캠페인 콘서트’를 하려면 함께 하는 마음들이 더 필요하다. 다행히 이 일에 결연히 뛰어들어 함께 가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아 이들의 발걸음이 7부 능선에 오른 모습이다. 이제 조금만 더 나가면 이들의 아름다운 도전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뒤에 오래도록 후견인이자 어쩌면 아버지처럼 이들을 보살피며 ‘죽을 동 살 동’ 혼신을 다해 함께 달려온 송경호 목사가 있어 그 가능성이 조금 더 밝아 보인다. 송경호 목사는 동천동에 있는 ‘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로 지역아동보호센터인 ‘푸르른지역아동센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지난 5년 간 학대로 사망한 어린이가 무려 157명에 이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심의 벽이 두텁고 높아져 세계적으로 2배 이상 아동학대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미쓰백’이라는 아동학대를 주제로 다룬 영화를 보고 센터 아이들이 송목사에게 전한 카톡 메세지는 아직도 송목사의 가슴을 찌를 듯 남아있다. “저 영화 보면서 목사님이 안 계셨으면 저희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메시지 이후 아이들과의 대화하다 ‘우리도 무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나온 것이 다소 무모하게 보이는 이 여정의 시작이었다. “저희 지역아동센터는 2014년부터 ‘드림아이 중창단’이라는 만들었어요. 그 결실로 2016년 아이들이 참여해 만든 앨범 ‘마음을 담은 노래1’이 있었어요. 스토리 펀딩을 통해 뜻 있는 분들의 후원을 받아 제작부터 판매까지 원활히 마칠 수 있고 아이들에게도 많은 자긍심을 주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노래가 아이들의 정서를 한결 아름답게 순화한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앨범을 만들어 보자고 착안했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활동을 넓혀 직접 캠페인 콘서트까지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 “가해자와 피해자를 근본적으로 막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웃들이 무관심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관심만 가진다면 아이들의 소중한 목숨을 구할 수도 있고 어려움에서 구해낼 수도 있겠지요” 이를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 참여해 학대받는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동영상도 제작했다. 동영상에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발견했으면서도 불편하고 번거롭다며 외면하려는 순간 “잠깐 주변의 아이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세요” “ 잠깐 혼자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주세요” “잠깐, 의심될 때 아동학대 체크리스트를 확인해주세요” “잠깐, 고민하지 말고 지금 바로 신고해주세요”라며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고 확인해보고 신고해 달라’는 아주 쉽지만 누구나 어려워하는 숙제를 내주고 있다. -송경호 목사,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 중 한 명만 없어도 아동학대는 현격히 줄어듭니다. 선한 오지랖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동영상에는 자신들에게 지금까지 행해져온 무관심의 서러움이 묻어 있는 것 같아 동영상을 보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 중 한 명만 없어도 아동학대는 현격히 줄어들 것이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래를 통해 세상의 많은 어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지켜줄게, 너를’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아이들과 송경호 목사의 바람은 이렇듯 그 속을 들여다볼수록 간절하다. 송경호 목사는 자신의 2007년 푸르른 지역아동 센터를 연 이래 지금까지 13년간 지져본 경험상 가출 청소년이나 거리의 아이들 중 60~70%가 가정 내 학대로 인해 지옥 같은 거리로 뛰쳐나온다며 이웃의 관심이 아동학대를 줄이는 원동력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필 지난 12월 2일 ‘냉장고 아기 유기’ 사건이 보도되었고 그나마 이웃의 관심으로 두 어린이가 학대로부터 구조된 소식이 전국을 강타한 뒤였다. 이미 목숨을 잃은 아기에게 아연하면서도 구조된 두 아이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바로 그 세상 사람들은 너도 나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 푸르른 지역 아동 센터의 아이들은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 주십사고 간절히 손을 모으는 것이다. 송경호 목사는 이번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 ‘텀블벅’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지난 11월 중순부터 펀딩을 시작해 다행히 최소 금액인 1000만원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펀딩의 최저 조건일 뿐 앞으로 들여야 할 비용을 고려하면 태부족이라 뜻있는 분들의 후원을 갈망하고 있다. 텀블벅에 참여하는 방법은 인터넷 https://tumblbug.com/byyourside 으로 검색하면 시작할 수 있다. ‘[지켜줄게, 너를] 음악으로 10대가 아동학대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펀딩에 참여하면 펀딩 금액에 따라 ‘마음을 담은 노래2 앨범(15000원)을 기본으로, 금액이 높아질수록 머그잔, 컬러 버킷 백, 뱃지 세트, 일회용 카메라, 초대 콘서트 등이 추가되는 소정의 답례품도 마련되어 있다. 선물을 선택하는 옵션 외에도 더 아이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싶다면 선물 필요 없이 밀어주는 1000원 이상 원하는 금액만큼도 참여 가능하다. 펀딩 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후원자들은 아래 계좌로 송금해도 좋다. 352-1549-7756-53 (농협/송경호) 마침 이 따듯한 소식을 듣고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도 찾아왔다. 걸 그룹 ‘샵’ 출신 가수이자 유명 유튜브 방송인 이지혜 씨도 인스타그램에 ‘텀블벅 펀딩’을 포스팅하며 자신도 후원하는 동시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촉구, 지난 12월 8일 현재 인스타그램 3만4000여 조회를 기록하고 있다. 김민수 씨는 자신 역시 어린 시절 가정폭력의 중심에 있었다고 소개하며 페이스북에 이 펀딩을 포스팅 했다. 펀딩 소식을 들은 많은 SNS 활동가들이 속속 자신들의 계정에 이 소식을 전하며 펀딩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하고 나섰다. 이들이야말로 송경호 목사가 늘 강조하는 ‘선한 오지랖’을 행하는 오지라퍼들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번 펀딩에 사용된 포스터가 이 펀딩이 왜 필요한지를 아프게 보여준다. 포스트에서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과 바로 그 아이들의 멍든 얼굴이 함께 실려 있다. 우리가 보는 아이들은 겉으로는 다른 아이들과 평범해 보이는 그저 일상의 아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그 아이들의 얼굴 깊숙이 자리 잡은 아동학대로 인한 아픈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아픔에서 벗어난 푸르른 아동지역 센터 아이들이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친구들을 위해 부를 노래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울리도록 도울 수 있다면 조금 더 자랑스러운 어른들이 되지 않을까? 우리게 숨겨진 선한 오지랖을 지금 꺼내자!
본지 5월 14일자 1439호에 ‘스몸비’를 막는 똑똑한 신호등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스몸비란 스마트 폰(Smart phone)과 좀비(Zombie)의 합성어로 스마트 폰에 머리를 숙인 채 아무런 생각없이 걸어 다니는 사람을 경계해서 부른 신조어다. 1439호에서 서울시 강남구가 이런 스몸비들의 안전을 위해 신호와 상관없이 횡단보도에 진입하면 경고음이 나오면서 LED광선을 쏘아 건너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설치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스마트 폰 앱을 내려 받는 사람이 예상외로 적고 스몸비들은 지역을 막론하고 창궐한 탓일까? 이번에는 훨씬 강력한 스몸비 차단 횡단보도가 등장했다. 특히 스마트 폰 사용자들이 스마트 폰과 함께 무선 이어폰이나 무선 헤드셋을 쓰다보니 신호음을 보내 봐야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새로운 스몸비 차단 장치를 낳게 했다. 미사 신도시에 새로 설치된 미사강변역 근처 교차로에는 신호가 바뀌면 숫제 바닥에 빨간 전광라인이 자동 점멸되는 횡단보도가 등장했다. 이 전광라인은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 함께 빨갛게 켜져 있다가 파란 불로 바뀌면 꺼진다. 빨간 선 밖에 있던 좀비들이 자칫 발을 함부로 내딛으면 타죽기라도 하는 듯 빨간 선을 넘어가지 못하다가 신호가 바뀌고 선의 불이 꺼지면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것이 마치 윌스미스 주연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 등장하는 좀비견(犬)들이 태양빛에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몸을 낮추고 있다가 태양빛이 사라지자마자 와짝 달려 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마침 이날 스마트 폰을 들고 횡단보도 밖에 있던 최모 씨는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횡단보도가 있다는 것이 일반 횡단보도 보다는 훨씬 편리하다”고 말하며 “붉은 선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는 횡단보도로 내려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 횡단보도에서는 모두 횡단보도 위에서 기다린다”며 뜻밖의 효과를 설명하기도 했다. 함께 신호 대기중이던 박모 씨는 “이곳만 시범적으로 운행되고 있어 일반적인 횡단보도에서의 습관이 남아 붉은 선에 익숙해지는 것이 훈련되면 조금 더 편리할 것 같다”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스몸비는 갈수록 늘어나고 이로 인한 교통사고 위험률도 점점 높아가는 만큼 눈에 띄는 신호체계를 고심하는 교통신호 정책 입안자들의 아이디어들도 계속될 전망이다.
오색 찬란한 빛깔과 영롱한 자태를 머금은 유리는 1000℃가 넘는 불길 속에서 태어난다. 1500년 전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동쪽 끝 신라에 도착한 유리 제품들은 그 험난한 여정만으로도 귀한 가치가 담긴 보배들이었다. 신라에 도착한 유리는 다양한 애호품으로 사용됐으며 불교가 유입되면서부터는 사리병으로도 사용되면서 새로운 상징성을 더해가게 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내년 3월 1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한국 고대 유리를 주제로 한 최초의 대규모 전시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특별전을 개최한다. 한국 고대 유리의 전반적 흐름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특별전은 국보 제193호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황 모양 유리병을 비롯한 국보 3건과 보물 8건 등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리 제품 1만8000여점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전시는 2019년 초부터 서양의 고대 유리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의 미호 미술관, 오카야마 시립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국제교류 순회전으로 시작됐으며,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중 추진했던 역점사업 가운데 하나로 기획됐다. 출품된 유리 제품들은 대부분 백제, 가야,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불국사 박물관 등 국내 31개 박물관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4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서 탄생한 유리는 기원전 1세기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되면서 로마 제국에서 널리 사용됐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유리는 서역에서 온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으며, 오색을 띠며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주로 장신구에 활용됐고, 서방보다 그릇류는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라 능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유리그릇은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 사례다. 이제까지 7개의 능묘에서 제대로 형태를 갖춘 유리그릇으로는 15점이 발견됐으며,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8점에 이른다. 이들은 세계 다른 지역의 유리기와 비교해보아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색과 기형을 보여준다. 최근 조사에서는 생산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됐다. 이집트,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신라로 전해진 유리그릇은 신라인의 국제적 감각, 높은 심미안, 특별한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전시는 고대 유리의 유형 중에서 주류를 이루는 구슬의 무궁무진한 변주를 선보인다. 각양각색의 단색 유리구슬 이외에 상감이나 금으로 장식해 한층 화려한 모습을 띠는 유리구슬을 제작방식과 함께 설명한다. 또한 삼국시대 대표작을 중심으로 나라별 특색도 살펴본다. 예를 들어 백제의 다채로운 색, 가야의 수정과 유리의 조화, 신라의 청색 물결이라는 키워드로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유리를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서 유리를 직접 생산한 증거들도 소개한다. 기원 전후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거푸집은 유리구슬을 청동기, 철기를 제작하던 방식과 같이 틀을 사용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부여 쌍북리와 익산 왕궁리 등에서 발견된 유리 도가니와 납유리 파편은 모래에 납을 섞어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늦어도 6세기 말에는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불교 유입으로 인해 유리에 부여된 종교적 의미도 살펴본다. 황룡사 구층목탑, 구황동 삼층석탑 등에서 발견된 다량의 유리구슬은 유리가 부처에게 바치는 귀한 보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유리 사리기의 대표작인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병(국보 제123호)과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병(보물 제325호)에서는 다중 사리기의 가장 안쪽에서 사리를 직접 담는 용기로 사용된 유리 사리기의 특별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한국 고대 유리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 고대 역사와 유리를 둘러싼 여러 의문점의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편 국립경주박물관은 코로나19 감염증 예방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온라인 사전예약제 운영 (http://www.gyeongju.museum.go.kr) △박물관 입장 시 개인정보동의서 작성 및 발열 확인 △전시 관람 시 안전거리 유지(2m 이상) 준수 △고열(37.5도 이상) 증상자, 마스크 미착용자 입장 불가 등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