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모 백무산 아이들 머리통만 한 배 하나 받아든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불룩한 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열매가 달려온 곳을 떠올려본다 터무니없을 만큼 큰 열매를 매달았을 나무를 간신히 떠올려본다 열매가 달려있던 자리를 바람에 몸을 흔들어보지도 못하는 나무 햇살에 머리를 풀어헤쳐보지도 못하는 나무 쇠파이프에 묶이고 쇠줄에 감긴 나무 자기 몸을 자기가 가질 수 없는 나무 열매의 무게에 찢어지는 팔을 가진 나무 겨울 언 땅에 발등이 터져 있을 나무 생식기만 있는 나무 나무를 기억하지 못하는 열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직 접시 위에 놓이기만을 위해 달려온 길 칼을 들다 나는 몇 번이고 망설인다 -‘멈추라’고 외치는 마음의 소리 시인은 방금 배달되어 온 ‘아이들 머리통 만 한 배’ 하나를 받아들고 칼을 들어 깎아먹을지 말지 머뭇거린다. 그리고는 떠올려본다. “쇠파이프에 묶이고 쇠줄에 감”기고, “열매의 무게에” 찢어진 팔을 가진 나무를. 바람에 몸을 흔들어 보지도, 햇살에 머리를 풀어보지도 못한, 자기 몸을 자기가 가지지 못한 어미를. 그렇구나. 그 나무는 햇살과 비에 가지를 통통거리면서 자기가 낳은 새끼, 열매들을 돌보는 그런 자유마저 빼앗긴 과목이었구나. 그래서 열매와 나무는 서로를 고마워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구나. 그 나무는 “터무니없을 만큼 큰” 새끼를 낳아주는, “생식기만 있는” 대리모였구나. 우리는 그런 과일들을 일등품이라고 접시에 올리는구나. 시인은 나무와 열매마저 대기와 우주와 함께 호흡할 수 없는 시대, 식탁에 놓이는 과일마저 그 근원이 의심스러운 시대를, 식탁에 놓인 과일을 통해 진단하는 게 아닐까? 이 점에서 시인의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의 힘」)는 전언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멈추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는가? 시인의 말대로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대기도 바닷물도 미세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 있어 인간과 지상 및 바다 생물들이 숨을 쉴 때마다 그 작은 것들이 폐에 빨려 들어 내장에 쌓인다고 한다. 이 시간에도 빙하는 녹아내리고, 한파는 몰아치고, 해일과 홍수는 늘어만 간다. 자세히 보면 ‘Covid-19’도 이런 자연파괴에서 유래하지는 않았을까?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칼을 들다 나는 몇 번이고 망설인다”는 시인처럼 우리도 이쯤에서 우리 행동을 머뭇거리며 회의할 순 없을까? 그 머뭇거림이 멈춤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일제강점기 숭복사지 주변에는 탑재들과 귀부와 비편, 건물의 초석 등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1929년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가 서쪽 돌계단 아래서 ‘국사대웅(國寺大雄) 개와대웅(蓋瓦大雄)’이라고 씌여진 평기와를 발견하였다. ‘국사(國寺)’라고 하는 것은 사격이 높았다는 것이고, ‘개와(蓋瓦)’는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는 의미이며, 대웅(大雄)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니 대웅전 지붕의 기와가 아니었을까? 숭복사지는 비교적 넓은 편으로 3단의 석축을 쌓아 맨 위에 법당과 탑을 배치하고 북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강당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금당 앞에 두 기의 탑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이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4호로 지정된 이 두 탑은 파괴되어 흩어져 있던 탑재를 수습하여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두 탑의 남은 부재가 서로 같지 않아 서로 다른 탑처럼 보이나 규모나 조각이 거의 같은 양식으로 2층 기단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동탑은 높이가 4.3m인데 2층 탑신과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이며 서탑은 약 3.2m의 높이로 2,3층 탑신과 3층 옥개석 및 상륜부가 없어 왜소해 보인다. 두 탑은 밑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을 올렸는데 하층기단은 하대석과 중대석을 합쳐서 만들었다. 면석에는 양쪽에 우주을, 가운데에 두 개씩의 탱주을 새겼다. 하층갑석은 네 장의 돌로 만들어 합하였는데 지붕면에 경사를 두었고 위에는 호형과 각형의 2단 괴임을 만들었다. 두 탑의 상층기단을 만드는 방식은 같지 않다. 남북으로 면석을 세우고 동서에서 끼우는가 하면 돌려가면서 세우기도 하였고 한 면을 두 개의 판석으로 만든 경우도 있어서 파손되어 복원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일관성은 떨어져 보인다. 두 탑 모두 2층 기단 각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팔부신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로 명중팔부(冥衆八部), 천룡팔부(天龍八部), 또는 팔부중(八部衆)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고대 인도의 신들로서 악마나 귀신에 속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교화된 후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이 되어 10대 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영산회상도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벽화나 조각으로도 많이 조성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석탑의 기단에 부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팔부신중은 사천왕에 버금가는 수호신으로 부처의 팔부중과 사천왕의 팔부중이 따로 있다. 사천왕이 거느리는 부하인 팔부중은 건달바·비사사·굼반다·벽려다(프레타)·용·부난다·야차·나찰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으로는 천·용·야차·아수라·건달바·긴나라·가루라·마후라가가 있다. 숭복사지 석탑 동쪽에는 용·야차, 서쪽은 천·가루라, 남쪽은 아수라·건달바. 북쪽은 마후라가·긴나라가 조각되어 있다. 이 탑 팔부신중의 조각 수법은 경주 서남산의 창림사지 석탑과 유사하다. 탑신부는 탑신, 옥개석 모두 1매로 되어 있다. 탑신에는 우주를 새기고, 초층 탑신에는 4면에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모두 4단인데 모서리에 풍탁(風鐸)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지금 두 탑은 보수 정비 중으로 철제 울타리에 갇혀 있다. 아니 탑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속으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편 저 산 위에 풍력발전기라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세차게 부는 바람에도 꿈적하지 않고 있다. 또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국도에서 내달리는 차량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보기 싫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새로운 석재를 첨가하여 수리 복원한 탑을 보면 낡은 옷을 새 천으로 기운 것처럼 영 어울리지 않았었다. 비록 몸의 일부를 잃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건립 당시의 당당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묵묵히 천년을 견뎌온 탑이 대견스럽다. 철제 울타리를 허물고 떳떳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다려 본다.
서울시가 지난 15일부터 시내버스 정규노선 370번에 첨단 친환경 교통수단이라 불리는 수소버스를 투입한데 이어 오는 22일에 3대를 추가로 투입, 모두 4대의 운행에 들어갔다. 수소버스는 달릴 때 공기 중 미세먼지가 포함된 산소가 버스 내부로 들어가 수소와 결합해 오염물질이 99.9% 제거된 깨끗한 물만 배출하는 반면 질소산화물 같은 오염물질과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는 배출하지 않아 ‘달리는 공기청정기’로 불린다. 수소버스는 1회 충전으로 하루 종일 운행이 가능해 상대적으로 충전이 잦은 전기버스에 비해 효용성이 좋은 것을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1회 최대 30kg이 충전되며, 이는 약 450km를 운행할 수 있는 양이다. 1일 240~250km를 운행하는 370번 버스는 연간 운행거리인 8만6000㎞를 운행할 경우 총 41만8,218kg(1km당 4.863kg)의 공기가 정화되고 이는 성인(몸무게 65kg) 약 76명이 1년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의 이번 수소버스 도입은 ‘서울형 그린뉴딜’의 핵심 세부사업 중 하나로 서울시는 지난 2018년 11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수소버스를 시범 운행한 결과 일반버스에 비해 급출발·정거, 진동 등이 적어 승객·운전자 모두 만족감이 높아 수소버스 운행 요청이 지속적으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이번 수소버스 도입으로 친환경 교통체계를 선도하는 동시에 시내버스 이동편의성·운행안전성을 높여 대중교통의 전반적인 서비스 품질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서울시는 2025년까지 수소버스를 1000대 수준으로 늘리고, 수소충전소도 11개소를 구축해 수소차 시대를 여는 마중물로 삼을 예정이다. 한편 서울시의 수소버스 운행은 경주를 비롯한 전국 지자체들이 주시할 만한 사업으로 특히 문화재가 많은 도시들은 수소버스의 공기청정효과를 감안해 적극적으로 도입할 만한 버스로 평가된다.
포스코 효자 주택 단지내에 감사둘레길이 조성되어있다. 2012년 6월 준공된 것으로 주택단지 연못에서 청송대, 전망대, 부덕사를 거쳐 영일대 호반 쪽으로 이어 있으며, 어느 쪽으로 들어가 나오든 자유롭다. 주로 대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이어져 황토길, 마사토 길, 대나무길 그리고 데크 나무길로 이어있다. 천천히 걸으면 2키로 미터에 1시간정도 걸린다. 둘레길이 굴곡있고, 다양하고, 오밀조밀해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둘레길 속의 주요 길을 따라가면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대나무 숲 속에 야산 허리를 휘감아, 데크 나무로 요리조리 길을 만든 대나무 숲길이 있다. 마치 대나무 긴 터널을 지나는 기분으로 상쾌함과 신선함이 있고 나무 가지들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맑아진다. ‘마사토 길’은 전망대로 올라와 청송대 쪽으로 가는 길로 450여 미터에 마사토를 깔아 놓았다. 부드럽고, 발에 닿으면 촉감이 뭉글뭉글해 사람들이 더러 이 길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발 케어를 하고 지나간다. ‘황토길’도 있다. 청송대에서 정구장 입구까지 내려가는 길은 흙으로 되어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영일대 호수 주변 꽃길은 영일대 호숫가를 돌아보는 길이다. 봄이면 벚꽃, 겹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등이 피어 어우러지는 곳이다. 특히 물가에 피어나는 신선한 노랑꽃 창포가 장관이다. 노랑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바람에 흔들릴때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연못 안에는 큰 잉어들이 물 반, 고기 반 득실거리고, 물위로 거위 한 쌍이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목을매다시피 따라다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작은 인공폭포도 괜찮다. 호숫가에 바위언덕을 만들어 놓고,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려 낙수를 만든다. 더운 여름, 쏟아 흐르는 물길은 좋은 피서 길이 되기도 한다. 이른 봄날이면 호숫가에 개나리꽃이 긴 벚꽃나무 아래로 군락을 이룬다. 쉼터 나무 의자에 앉아 호수 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세 줄기의 분수와, 새들의 율동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둘레길에 숨어있는 옛 건물들 이야기 둘레길 산 정상 쪽에 2층 철골건물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형산강이 보이고, 포항제철소 공장,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이름은 전망대이나 집 모습은 포항제철소 건설 때, 초기 건설 지휘 본부로, 가칭 ‘롬멜하우스’라 불렀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영웅 롬멜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와 흡사하다고 해서 애칭으로 부쳐진 것이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을 뜰 수 없던 모래벌판 공사현장, 안전모, 귀마개 방독안경으로 중무장을 하고 출입하든 건설 사무소로, 초기 전설 현장의 지휘소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 2층에 올라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남의 집 다 부셔놓고, 제철소가 되는 건가?’하고 근심어린 눈으로 허허 벌판을 응시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당시 건물 모양대로 지어 보존하고 있는데, 지금은 안전차원에서 출입이 금지돼 있다. 전망대 아래쪽으로 임원사택으로 두어 채가 포스코 역사 보존상 모델로 남아 있고, 근처에 건설당시 일본 기술자 숙소 1채가 있다. 벌써 50년이 넘은 2층 구옥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부덕사(婦德舍)란 집은 포철 주택단지 내 직원부인들이 모여 취미, 운동이나 생활 지혜를 배우든 곳으로, 부인들의 덕을 쌓는 집이란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호텔 영일대 이야기 1969년쯤 포항제철소건설시 외국 기술자나 자문단들에게 숙소가 필요하게 되자, 건설 현장이 보이는 효자지역 산언덕에 2층 건물을 짓고 그 이름을 ‘영일대(迎日臺)’라 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호텔 영일대로 용도 변경되어 일반인들에게 식당, 호텔로 사용되고 있어도, 당초에는 건설 중요인사의 숙소이며, 또 제철소 건설 상황실로 쓰였던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 한국 철강 산업의 산실인 이곳을 포스코 창업의 성지로 삼아 조경에 정성을 기우리고, 연못과 주변 길을 만들어 소위 영일대 호수공원으로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다. 주변에 내·외빈 손님들의 방문기념 식수들이 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1일에 포항 제철소 착공기념으로 심은 나무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잘 자라고 있다. -눈여겨 볼 꽃과 나무들 이 둘레길에는 40여종의 수종들이 자라고 있다. 봄이면 산수유에서부터 흰 벚꽃, 분홍색 겹벚꽃, 개나리, 진달래까지 꽃나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감나무, 모가 나무, 오동나무, 수양버들, 길 따라 메타스퀘어, 히말라시다 등 큰 재목들도 창공을 향해 뻗어 있다. 이중에도 이름이 재미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나무가 있다. ‘꽃 아그배나무’이다. 봄, 여름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흰색과 빨간색이 섞여 있다가, 가을에는 꽃 사과처럼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꽃에다 아그배를 합친 이름인데, 아그배는 아기배(돌배)랑 뜻으로 돌배처럼 작은 모양때문인 것 같다. 장미과에 속하는, 중국 서부가 원산지로 일명 서부해당화라고도 한다. 새들이 좋아하며, 오밀조밀한 열매, 상큼한 색상 때문에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흰 벚꽃이 지고나면 여러겹의 분홍색 잎으로 ‘겹벚꽃 길’이 생긴다. 청송대 뒷길을 주로 하여 벚꽃 터널처럼 보인다. 벚꽃송이 크기도 크거니와, 가지가 무거워 땅에 닿을 듯 휘늘어지고, 바람이라도 불면 꽃잎이 길바닥을 쓸며, 산책인의 얼굴도 덮친다. 5~6월이면 호수가에 창포꽃이 길게 군락을 이루어 피어난다. 노란색 창포는 약용으로 쓰이고, 씨앗은 여인들의 머릿기름 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우아하고, 신비스런 꽃이다. 그래서인지 이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정갈해진다. 이 둘레길은 야간에도 길가에 조명 등을 설치하여 걸을 수 있게 되어있다. 야간 조명이 있는 숲속 둘레길, 군데군데 산돼지 출몰 위험 경고판이 섬뜩하게 하지만, 그만큼 나무들이 신선하고 분위기가 한적해서 좋다. 이 둘레길 지역은 포항제철의 역사가 새겨진 제철산업의 성역이다. 그리고 자연 박물관이다. 착공 기념비가 있고, 건설 현장 지휘소가 있으며, 그리고 제철 역군의 씩씩한 혼과 땀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후세들에게 좋은 힐링 공간과 교육의 장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할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김치는 어떤 의미일까?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16세기라고 하니 지금의 김치는 길게 보면 500년 정도 짧게 봐도 2~300 년은 족히 넘을 역사가 있을 법하다. 특히 김장김치는 겨우살이를 위한 중요한 필수품목으로 자리 잡아 겨울철 가가호호의 당연한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중요한 김장 김치 담그기 행사가 다소 느슨해졌다. 배추생산 기능의 향상과 함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중국에서 수입된 지도 오래 됐다. 여기에 한국에서 유일한 김치냉장고이 보급으로 한겨울에도 싱싱한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자 어느 순간부터 김장김치의 풍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태에 정면으로 맞서기라도 하듯 최미해 씨의 페이스북이 이 근래 김장김치 담그는 과정을 알차게 담았다. 김장의 규모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사진 상으로 언뜻 보기에도 통배추로만 50포기, 무도 수 십 개 가깝다. 이 많은 배추를 일일이 숨죽여 씻고 양념 버무리고 파, 고추, 마늘, 양파···, 갖은 채소들로 속 재료 만들고 치대는 과정이 얼마나 힘 들었을까만 최미해씨는 이걸 혼자서 씩씩하고 재미나게 밀고 나간다. 간간이 사진까지 찍어 페이스 북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말이 쉬워 50포기 김장이지 이건 실상 보통 일이 아니다. 최미해씨 말처럼 ‘하얗다 못 해 온 몸을 불싸질러야’ 이룰 수 있는 험난한 숙제다. 사흘에 걸쳐 이 많은 김장김치를 끝낸 최미해 씨가 수육을 곁들여 스스로 자축한 모습은 그래서 아주 큰 의미가 있어 보였다. 가족을 위해 이 많은 김장을 자임한 최미해 씨의 아름다운 고역이 빛나 보인다. 그런 최미해 씨가 12월 14일자로 김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포스팅 하나를 더 했다. 바로 가족들의 열화 같은 성원···, 페이스 북에서 따온 사진에는 최미해 씨 가족들의 열렬한 응원이 올라왔다. 엄마가 고춧가루 공수해주시고 아버지가 재료비에 수고비까지 쏴주시고 오라버니도 통장으로… 힘든 일은 혼자서 삭이면 병이 되지만 누군가 그 힘든 일을 응원하고 칭찬해 준다면 기꺼이 고래까지 춤추게 한다. 최미해 씨의 가족 돌봄이 해피엔딩으로 보여 페이스북 중계를 보는 즐거움도 크다. 그리고 이 끝이 참 재밌다. “옆지기는 입 가지고 먹기만 하고··· 머 없냐??”
서면 천촌의 한 농가 황토방 앞 뜨락에는 잘 난 메주가 익어가고 있다. 직접 농사지은 콩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정성껏 메주를 만들어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낼 생각에 아낙은 마냥 행복하다. 메주를 건조대에 널기까지 새끼를 꼬고 가마솥에 장작을 짚이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된장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전선자 씨는 “겨울동안 잘 말리고 잘 띄운 메주는 봄이 되면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며 “좋은 햇살과 차가운 바람에 잘 말라 가족과 지인들의 밥상에서 찌개와 국, 쌈장 등으로 행복해 할 그들을 생각하면 기쁘다”고 말했다. 메주가 익어가는 옆 가마솥이 걸려있는 뜨끈한 황토방에는 지금도 아낙들의 수다가 이어지고 있다.
참사랑노인복지센터(소장 박경복)와 카페 어마무시(대표 박상언)가 사회공헌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MOU를 체결했다. 카페 ‘어마무시’는 이미 SNS를 통해 ‘티라미수 맛 집’으로 호평을 받는 업체로, 티라미수 1개를 구매하면 연탄 1장을 독거어르신께 기부하는 ‘어마무시 12월 연탄 기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2월 티라미수 판매량으로 2021년 1월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대상자 중 에너지 빈곤층에게 연탄을 기부할 예정이며, 연탄 기부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독거어르신들에게 따뜻한 겨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경복 소장은 “카페 ‘어마무시’와 참사랑노인복지센터의 MOU 체결을 발판으로 노인 돌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두고 지역사회 내 지속적인 사회공헌활동의 활성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상언 대표는 “참사랑노인복지센터와 협약을 통해 주변 상인들이 사회공헌활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따뜻한 일상이 필요하실 어르신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라며 MOU 체결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참사랑노인복지센터는 다양한 어려움을 이유로 홀로 일상생활 영위가 곤란한 노인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 지역사회 내에서 건전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원조하며 소외된 계층을 위한 복지사업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도심에서 사육하는 개가 새벽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경주예술의 전당 옆 한중우호의 숲에는 아침운동을 위해 많은 사람이 오간다. 그러나 최근 목줄 없이 나돌아 다니는 개가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12일 새벽 6시 30분 목줄도 없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덩치 큰 개가 아침 산책 나온 시민들을 향해 짓고 달려들 듯 위협해 119를 부르는 소동이 일어났다. 곧 바로 대원들이 왔지만 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119대원은 “신고를 몇 차례 받았지만 직접적으로 개를 볼 수 없었다”며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는 개의 특성상 포획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포획을 원하면 101로 긴급전화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119대원들 덕에 안전하게 귀가는 할 수 있었지만 한중호국의 숲 정자 바로 옆에는 꽃 정원(LED꽃25000여송이)이 곧 개장을 앞두고 있다. 코로나19로 실내 활동이 자제되고 있는 시민들은 산책도 할 겸 빛의 아름다움을 보기위해 많은 나올 것이다. 반려견의 목줄을 과도하게 늘어뜨리거나 목줄을 푸는 등 다중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의 팻-티켓을 꼭 지켜 줄 것을 당부한다. 반려동물을 통제하고 관리할 의무는 견주에게 있다. 안전수칙 혹은 팻-티켓을 철저히 준수하는 인식제고가 필요하다.
경주로타리 클럽의 한용주 씨와 회원들이 지난 12일 대자원에서 직업봉사활동을 펼쳤다. <사진> 용강동에서 아재축산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 씨는 이날 대자원 아동들에게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비롯한 200만원 상당의 점심 식사를 제공했다. 특히 직접 식당에서 판매하는 된장찌개, 채소를 비롯한 음료 등 다양한 곁들이 음식을 준비해 코로나19로 인해 외식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대자원 조영제 원장은 “힘든 시기에 선뜻 아이들을 위한 직업봉사 활동을 펼쳐 준 한용주 대표와 경주로타리클럽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며 “이러한 따뜻한 마음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전해져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경주를 눈물겹도록 그리워했습니다. 나의 한국행은 곧 경주행입니다. 내 삶은 언제나 경주에서 출발하고 경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나의 원점은 경주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한국의 사회정치적 변혁기 등을 목격한 가장 주목해야 할 재미작가가 고향 경주를 찾았다. 회화, 조각, 직물, 도자기, 설치 미술에서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복합적이고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최일단(崔一丹·84)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머리와 가슴, 손과 발로 빚어낸 열정 가득한 노년의 대가는 평온해 보였다. 미술평론가 이규일은 최일단 화백의 미술 세계를 ‘발바닥 예술가의 전천후 미술’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아프리카만 빼고 대강 다녔노라’는 최 화백은 오랜 세월 예술을 위해서라면 세상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 지난 시간들이 서예, 조각, 회화, 공예 등에서 망라된다. 그러나 이 대가는 완성의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매일 스타트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꽉 채우는 것이지 구멍이 나거나 기포가 있는 일은 하기 싫어요”라면서 평생 해 온 화업과 화가라는 소리도 듣기 거북할 정도라며 몸을 낮춘다. 최 화백은 자신의 화업과 작품에 대해 집안에 유전(遺傳)해 온 ‘문기(文氣)’에서 연유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최 화백은 구한말 과거제 폐지 직전, 문과에 급제한 수헌(修軒) 최현필(崔鉉弼) 선생의 후손이다. 그래서일까. 화백에게서도 한일병합 격동기 경주에서 선비의 지조와 유학적 전통을 지킨 수헌 선생 집안의 결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84세라는 연륜에도 진술에 능숙한 목소리는 뚜렷하고 명쾌했다. 도야(陶冶)한 대가의 영감의 발원지가 경주라는 대목에선 왠지 모를 자부심마저 느꼈다. 옹색한 지면에 최일단 화백의 화업을 소략할 수밖에 없음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지만 선생과의 인터뷰는 무척 행복했다. 뉴욕을 떠나 2주간 자가격리 기간을 거쳐 이곳 경주에 온 최일단 화백과의 만남이 성탄절 선물마냥 이뤄졌다. 행운이었다. -“집안에 유전해 오던 수헌 최현필 선생과 그 후손들의 문기(文氣) 이어받은 것과 ‘경주’라는 유산 있어 언제나 행복합니다” “경주와 비교 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중국 3대 석굴을 다 준다고 해도 석굴암과 바꾸지 않을 만큼 훌륭합니다. 6학년 겨울방학때까지 경주에서 보낸 내 삶은 언제나 경주에서 출발하고 경주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안압지에서 그림을 그린 기억, 첫사랑이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 종일 걸렸던 석굴암 가는 길,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 찾던 일 등을 기억 저편에서 소환해 내는 선생의 얼굴엔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교육관이 남달랐으며 은행장이셨던 선친의 낭만적 유산이라는 자양분에다 ‘경주’라는 유산이 있어 언제든지 저는 행복합니다” 최 화백은 어린 시절 편견과 불평등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집안에 유전해 오던 수헌 선생과 수헌 선생의 초서를 읽기 쉬운 필체로 바꿔 써 모두 8권으로 묶었던 후손 최영우 선생, 늘 책상에 앉아서 수헌 선생의 글들을 직접 필사하면서 수헌문집 발간을 주간한 후손 최상협 선생 등의 문기를 이어받은 것이 오늘의 자신이라고 했다. “집에도 늘 지필묵(紙筆墨)이 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산들이 제 척추뼈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억들은 모두 경주라는 큰 유산에 기반합니다” -“이응노 화백은 나의 스승이자,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 최일단 화백은 1936년 출생으로 어린 시절 선친의 고향 경주에서 자랐다. 계림국민학교 6학년일때 서울로 이주해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미대 회화과(서양화)에 입학하였으나 조각과로 옮겨 김종영 선생에게 배우며 1960년 졸업한다. 1958년 국전(조각부문) 특선을 수상했고 10여 년의 교편생활을 거쳐 1968년 베트남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가려던 도중, 프랑스에 살고 있던 고암 이응노 선생을 찾아간다. 이응노 선생은 최 화백의 재능을 간파했고 당시 고암 선생의 조언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한다. “‘너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 재능을 마치 만들어서 가진 재주인줄 알고 갈고 닦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다. 타고 난 재주는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내팽개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에게서 일생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씀을 들었어요” 1972~1975년 스승의 말에 대오각성해 미국행은 연기되었고 이응로 선생 문하에서 3년여 동안 수학한다. 이로써 동양화에 본격적으로 처음 입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고암으로부터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특유의 여성적 섬세함이 나타나는 동양적 공간을 구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지 조각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후 한 땀씩 실로 꿰맨 그의 작품은 글씨와 그림, 회화와 조각을 오가며 실험적인 방식으로 동양화의 영역을 넓힌다. 파리에서 세계관이 달라졌고 더 큰 동양화의 세계로 진입하고 싶었다. 중국 갈 생각을 파리에서 결심한 연유다. 이어 1986년~88년 중국 북경중앙미술학원 산수화계에서 유학한다. 이응로 선생 이외에도 서세옥, 김종영, 장욱진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서 사사 받는다. 서울, 캐나다 몬트리올, 미국 뉴욕 등지에서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수 차례 그룹전을 가졌다. 유럽과 미주· 동남아· 소련· 중국 등 고대 문화예술 유적지를 탐방하였으며 특히 중국은 일곱 번이나 방문해 1991년 ‘발바닥 문화예술기행-정중동(靜中動)’ 출간했다. 1992년 소장전 ‘중국 묘족(苗族) 복식전’, ‘1993년 중국 조선족 화가 한낙연 유작전’ 유치, 2005년 이응노미술관개관 5주년기념 첫 외부작가 초대전, 2013년 뉴욕문화원 갤러리코리아에서 ‘채색된 시간: 재미한인작가 아카이브 1부 1955∼1989’전, 2014년 뉴욕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에서 한인여성미술가 15인 특별기획전, 2019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현대수묵전 등 개인전 및 단체전에 다수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중·동』이 있으며 2018년 이응노미술관에 후원금 10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현재 연중 한 두 번은 뉴욕 등지에서 전시에 참여하며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靜)·중(中)·동(動)’ 3권 발간...5천매의 원고, 고행 같은 기행의 추억 현장감 있게 담겨져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靜)·중(中)·동(動) 3권(융성출판, 1991)’은 기행문집이자 견문록이다. 중국 전 지역 문화 유적지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스케치한 풍물, 문화예술에 관한 사진자료다.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느낀 갈등과 환희, 문화예술에 관한 사진자료집들을 모아 엮어냈다. 그렇게 세상을 탐색한 것이 몇 만리나 되었고 이는 5천매의 원고로 집대성됐다. 몇 만장의 사진작업도 함께였다. 천하를 여행하며 얻은 견문과 수집한 자료는 소동파가 간파한 ‘독만권서(讀萬卷書, 만 권의 책을 읽고) 행만리로(行萬里路, 만 리를 여행하라)’에 닿아있다. 열정에 가득찬 이 작업은 필사적인 노력 끝에 탄생한 집필이었다. 이 원고와 자료를 혼자서 수집정리하는데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여행가요, 저술가의 면모도 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늘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노트마다 모아둔 기록이 있었는데 1988년 ‘수헌 문집’ 발간 소식을 듣고서 저도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 책 발간도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상들이 함께 한 것입니다” -‘통섭(通涉)’이 가장 큰 줄기...“제 일생을 투과해 나온 작품들을 굳이 한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석좌교수가 도입인용한 ‘통섭(通涉, 지식의 융합, 사물에 널리 통함)’ 이론을 너무 좋아합니다. 어떤 것이든 섭렵하는 것이 통섭이라면, 대학2년 조각가로 전과 한 것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조각과로 전과 하면서도 서양미술 전체를 동양화의 거름으로 써서 크게 밭을 갈아엎을 작정이었습니다. 통섭이 제가 하는 일의 가장 큰 줄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선생은 통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범예술적 접근을 지향해왔다. 개척자적 자세였다.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내는 다이내믹한 과정을 즐겼던 것이다. 여전히 선생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수년전부터는 세라믹(도자기) 작업에도 몰두한다. 회화 근작들은 주로 동양화의 가장 근본적인 지필묵 세 점을 사용한다. 지필묵이라는 근원적인 조건과 도구만으로 색이나 형태, 형식에 전혀 의지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느린 걸음으로 쉬지 않고 붓질을 하면서 마드리드에서 콜도바로, 돈황에서 이스탄불로, 대족(大足)에서 석굴암으로, 이집트에서 경주로 정신없이 뻗어나갑니다. 이렇게 밖으로 흩어지는 생각을 단순화하고 휘어잡기도 합니다. 나의 예술은 나의 삶입니다. 석굴암에서 그리스 조각의 향취를, 이집트 신전의 기둥 꼭대기 장식에서 신라와당을 연상하며 감동받습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을 놓고 장르를 넘나든다고 합니다만 결과만 놓고 한 분류일 뿐 내게는 장르 개념 즉 회화니 조각, 공예 등이 아예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선생의 통섭을 통한 다면성에 탄복한다. 그래서 허병렬 뉴욕한국학교 교장은 ‘선생이 지니는 깊이와 넓이, 다채로움을 아직도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영역을 알 수 없노라’고 했다.
셔블&서울·경주사람들을 연재한 이후 99회를 맞았다. 그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경주와 인근 지역을 망라하며 각계의 인사들을 초대하며 경주와 수도권을 아우르는 중요인사 소개 코너로 자리 잡았다. 100회를 전체 리뷰로 기획하면서 99회 특집으로 미도교역 이주태 회장을 초대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다. 전국을 망라해 경주출향인사들이 포진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신라천년의 기상을 전하는 진취적이고 쟁쟁한 인사들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문화계, 정·관계, 경제계, 사회봉사 방면 등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인사들이 곳곳에서 활동 중이다. 그 중에서도 이주태 회장은 이런 각 방면을 아우르며 남들은 한 분야에서도 이루기 힘든 최고의 경지를 곳곳에서 이룩해 온 출향인의 모범적 인물이다. 뛰어난 학문적 성과로 한국무역학회 학술상, 자랑스러운 고려대 문과대학인상, 서강대 경제대학원 명예의 전당 헌액 등을 이루었고 산업훈장 2회 수훈과 이탈리아 국가훈장, 베트남 국가공로장 등을 받았다. 대통령 표창, 장관표창, 수출탑 등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13일 이주태 회장은 서강대 경제대학원 개원30주년을 맞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사를 맞았다. 경주고를 나와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 회장이 서강대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사연이 있다. “1990년에 서강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경제대학원이 생겼어요. 대학에서 경제관련 강의를 관심 있게 들으면서 이 분야 공부를 해보고 싶어 1기로 지원했지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실용분야인 경영대학원을 보통 택하는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진짜 경제공부를 해보고 싶은 욕구로 경제대학원을 진학했다고 회고한다. 모집 첫 해 이 학과가 인기 있어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어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고. 뒤에 이 회장은 이 경제대학원의 동문회 회장으로 4년간 봉사하며 동대학원 동문화합과 발전에 기여한다. 대학원 졸업 후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은 이 회장은 경희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무역경영론’과 ‘글로벌경영전략’ 두 과목을 만 10년 동안(미국 워싱턴대에 방문연구원으로 간 1년을 포함) 매년 주당 3시간씩 강의해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 그 강의가 100명 넘게 수강하는 인기과목이었지요. 일반 교수들이 대게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는데 비해 제 강의는 다양한 사업경험과 무역위원회 위원으로서의 공직경험, 업계의 통상외교활동 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학생들이 큰 호응을 보였지요” 이 회장은 학문적 실력과 다양한 현장지식을 기반으로 2005년 한국경제학공동학술제에서 한·칠레 FTA 효과분석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2007년 미국 워싱턴대(잭슨국제대학)에서 한·미 FTA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국내외 학술활동으로 한국무역학회에서 수여하는 학술상을 받았다. 특히 국책 연구기관에서 보유한 데이터와 미리 설계된 변수를 통계처리해 보고서를 쓰던 예측치들에 비해 업계 분석을 보강한(1차 자료) 데이터를 구축해 쓴 이 회장의 논문은 통상마찰시 피해 산업액의 예측치와 결과치를 줄이는 측면에서 독창성과 접근방법 면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주요학회인 한국무역학회의 학술상(영문학회지는 국제학술지)은 학자로서 매우 큰 명예다. 이 같은 기업과 업계, 정부 및 사회봉사에 더해 성실한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이 회장은 2015년 서강대 경제대학원 총동문회가 실시하는 2015 서강경제대상에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 11월에는 서강대 경제대학원이 개원 30주년 기념으로 처음 실시한 명예의 전당 헌액 3인 중 1인으로 당당한 이름을 올렸다. -정권 망라한 공직활동 및 외교부정책자문, 한국수입협회 회장 맡아 수입 및 통상외교에 대한 인식전환 계기 마련 이 회장은 2005년~2008년까지 3년 임기로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소속 ‘무역위원회’ 비상임 위원으로 활동한 특별한 공직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산업의 불공정을 심결하는 곳이라면 무역위원회는 국가 및 국제기업 간 불공정무역 행위를 심결하는 곳이라 국내외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엄중한 심판기관이다. 각종 세밀한 심사를 거쳐 장관이 재청하고 대통령이 직접 위촉하는 막중한 자리. 상당한 전문 지식과 통찰력이 필요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도 있어서 보통 쟁쟁한 학계 법조계 인사들이 이 자리에 선임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중소기업인으로서는 이 회장이 처음 위촉된 독특한 이력을 가진 것이다. 특히 당시가 한창 FTA(자유무역협정)와 관련하여 국가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절이고 이에 따른 로비와 외압도 극심하던 때라 이주태 회장의 노고는 다른 시기에 비해 훨씬 컸었다고 회고한다. “자칫하면 판정 하나로 인해 국가 간 갈등이 고조되고 어지간한 대기업 사업부 하나가 휘청거릴 만큼 중요한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어요. 자칫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되면 그로 인한 인적 시간적 손실도 컸고요. 그러니 공정한 심결을 위해 정말 혼신을 다해 관련 자료들을 살피고 각국의 현황과 관련 기업이나 산업 관련 보고서 및 법령을 꼼꼼히 살펴봐야 했지요” 그 결과 이 회장이 출석한 위원회 및 공청회에서의 활약은 정부,학계 등에 깊은 인상을 남겨 후일 이명박 정부 때도 대통령실 정책홍보 자문위원과 외교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이 회장은 2010년 제 18대 한국수입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우리나라 무역업, 특히 수입업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쳤다. 이전까지 수출에 비해 수입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던 시절이었지만 이 회장은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질 좋은 원자재 및 기계류 수입 없이 건실한 국내산업이 존재할 수 없고 양질의 수입에 기반해서 더 활발한 수출의 활로가 만들어진다는 인식 개선에 힘쓰는 한편 수출강국인 한국에 대한 상대국의 통상마찰 방지활동에 주력했다. “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때 이명박 정부가 경제외교를 기치로 해외 순방이 많아졌어요. 수입협회 회장으로서 공식 정부사절단에 속해 대통령 전용기로 미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누비며 국가대계를 위한 통상외교에 일조한 것이 큰 보람입니다” 수입협회장 시절 업계, 학계 및 기업 활동으로 이주태회장은 2006년 석탑산업훈장을 2011년 은탑산업훈장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3년 임기 수입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오랜 기간 양국통상 발전과 친선의 공을 인정받아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다. 회장 재임시 회원 간 오랜 대립 구조를 해결하고자 특유의 화합력을 바탕으로 협회의 발전에 매진한 결과 심지어 수입협회장 선거 당시 그와 경쟁했던 후보조차 나중엔 그의 팬이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학문적 열정과 사회봉사가 좋아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사업. 후배들, 동문회와 출향인 모임에서 세월 뛰어넘은 미래 자신 찾기를…! 사업적인 부분에서 이주태 회장은 스스로 한계를 긋고 그 힘을 학문과 봉사시간에 나눈 특별한 기업가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지금의 SK그룹 무역회사인 ‘선경’과 삼성물산 등에서 5년 간 이른 바 ‘상사맨’으로 근무한 후 퇴직하고 지인의 추천으로 미국 오리건 소재 KC-인더스트리사로 스카우트되어 현지에서 마케팅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한국과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6년 미도상사를 창업하고(나중 미도교역으로 법인화) 무역업에 뛰어 들었다, 처음에는 특정품목에 집중하지 않고 이것저것 품목을 가리지 않고 수입했으나 한 고향 선배를 통해서 섬유직물 원료인 면사, 나일론사 수입을 자문 받으면서 원사 아이템에 집중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르게 된다. “처음 원사를 수입할 무렵 우리나라 섬유업은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특수 섬유 등 질적으로 상당히 발달했어요. 시장의 특성을 제때 파악하고 수입시장을 다변화 하면서 이 분야를 선도할 수 있었지요” 이 회장은 그러나 한창 사업에 집중할 무렵에도 학구열과 업계, 사회 봉사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회고한다. “성공여부를 떠나 그때 사업에만 전념했다면 어쨌거나 좀 더 다양한 사업을 했거나 사업규모를 훨씬 더 넓힐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믿으면서부터 학문적 열정과 업계활동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이 회장이 얼마나 공부에 ‘미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하나. 이 회장은 사업을 한창 영위하던 1996년 서울대학교가 파리정치대학원과 협력해 개설한 ‘파리정치대학원’에 국내 유명인사들과 입학하면서 1년간 파리와 서울대학교에서 수업과 논문을 통해 최우수졸업생으로 전문학위(DIPLOMA)를 받는다. 이 후 파리8대학 정치학과의 박사과정에 합격하고 등록까지 했으나 먹고사는 가장으로서 결국 포기하고 대신 경희대에 경영학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한다. 입학 후 논문제출 필수과목으로 영어와 제2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하여 시험에 합격했는데 40대 나이에 두 과목 모두 통과한 경우가 이 후로도 첨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공부가 좋아 한계를 설정했다는 사업이지만 사업규모가 적지도 않다. 중견기업으로 년 매출 규모가 7백억 원 규모가 될 만큼 국내 수출입시장에서는 적지 않은 비중이다. 지난 2015에는 서울 근교에 3천 평 규모의 물류창고도 개장했는데 그 넓은 창고를 자신의 미도교역 물량으로 다 채우고 오히려 모자라 경산에 제2물류창고를 다시 열었으며 2개 관계사를 갖추고 있을 정도다. 이 회장은 사회봉사활동에도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자신의 모교인 경주중고와 고려대, 서강대 경제대학원, 경희대 박사과정 등 학교의 동문회는 물론 예의 수입협회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은 이들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오랜 기간 특별한 관심과 협조를 기울였다. 단순히 회원으로 활동하거나 형식적인 회장단에 머물지 않고 이들 대부분에서 회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솔선수범해왔다. 이중 2016년에 맡은 제 27대 경주중고 서울동창회 회장직은 공교롭게 직전 회장이 친형인 이지태 회장이었기에 고사를 거듭했으나 동기회와 동창회를 막론한 주변의 간곡한 바람으로 회장에 추대되었을 정도다. 회장을 맡은 그는 동창회 재원을 안정시키고 젊은 동문들의 동창회 참여를 유도하며 동창회 중흥에 괄목할 기여를 했다. 그런 이주태 회장에게 이처럼 다방면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글쎄요. 저를 믿어준 가족과 열심히 일해 준 회사 직원들 덕분이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사업을 하면서 일찌감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운과 여유를 주었습니다” 이 회장은 젊은 시절에는 무슨 일이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중년 이후에는 무리하지 않고 주변과 화합하고 조화롭게 참여했을 뿐이라며 다방면의 성공에 대해 겸양한다. 그런 그가 한때는 젊은 열정과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진 적 있었으나 그 분야만큼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 길 자체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처음 본지의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정중히 사양하기도 한 이면에는 이런 고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젊은 후배들, 특히 서울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하든 고향선후배들이 모이는 동창회나 향우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것을 당부한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대세이고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에게서 세월을 뛰어넘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타산지석으로 많이 배울 수 있지요” 중고 시절부터 평화봉사단으로 경주에 와 있는 미국인들에게 영어를 배운 덕분에 남다른 행운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개방된 국제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이주태 회장은 그런 만큼 경주가 신라 때도 국제도시고 자신의 추억에서도 다른 도시와는 차별화된 국제도시였다고 평가한다. 지금은 또 다른 차별된 국제화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라 믿는 만큼 경주의 정치 지도자나 경주시민들이 보다 넓고 개방된 마음으로 경주를 이끌어주기를 희망한다. 언제나 마음의 고향인 경주를 품고 지금도 세계를 향해 언제든 달려 나가는 이주태 회장은 우리 시대 신라인, 타고난 세계인이다.
건천애향청년회(회장 최병섭)는 지난 15일 건천읍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성금 100만원을 기탁했다. <사진> 이번 성금 전달은 ‘희망2021 나눔캠페인’에 참여하기 위해 청년회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았으며, 성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힘든 환경에 처한 노인과 장애인 등 지역 소외계층에 전달 될 예정이다. 최병섭 회장은 “적은 성금이지만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의 이웃들에게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하루 빨리 이 상황이 종식돼 다시금 활기찬 건천이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임경석 건천읍장은 “항상 건천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의 단체인 건천애향청년회에 감사를 드린다”며 “소외된 이웃들과 지역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한편, 건천애향청년회는 평소 환경정리, 성금기탁 등 지역 발전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가 만연한 올해에는 자체적으로 방역소독기를 구입하고 방역단을 구성해 방역활동을 펼치는 등 지역 확산 방지에 앞장서고 있다.
진사 도자기의 강렬한 붉은색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더욱 따뜻하게 연출한다. 최용석 도예가의 열여섯번째 도예전 ‘진사를 품다’가 20일부터 31일까지 작가의 작업장인 고도도예 야외 마당에서 펼쳐진다. 이번 전시에서 최용석 도예가는 항아리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氣+器 진사 2020’ 시리즈 3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질 좋기로 유명한 진사백토를 섞고, 시행착오를 겪어 얻어낸 유약들을 발라 가마에 넣고 긴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다보면 씨앗이 피워낸 꽃눈을 꽃봉오리가 감싸듯 도자기들은 저마다 새로운 기욕을 입는다. 진사도자기는 가마의 불에 따라 요변이 심해 가마에서 꺼내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 산화동, 산화철, 산화망간의 각각 비율에 따라서 색 농도 변화가 다양하며, 온도가 높으면 진사색에서 녹색으로 변화하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만큼 까다롭고 예측하기 어려운 공정과 실패율이 높기 때문에 맑게 잘 나온 진사도자기는 더욱 가치가 높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감과 질감을 내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 연구하는 최용석 도예가는 해마다 신선한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도예가의 기량과 숙련이 조합돼 탄생한 진사도자기. 작가는 “1270도 이상에서 자화된 소지의 색과 그 위에 입혀져 이중 결합돼 비치는 색은 유별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면서 “겉보기에는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그 표면과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자연의 맛에 금세 친숙하게 된다. 그런 촌스러운 모양 속 숨겨진 도자기의 참맛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예술인들은 물론 많은 분께 힘든 한해였을 것이다. 이런 2020년을 보다 의미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상서로움과 경사로움을 상징하는 붉은색 진사를 테마로 작은 전시를 마련했다”면서 “전시를 오픈해도 물리적으로 관객과 교류가 어려운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전시관이 아닌 작업장을 전시 공간으로 꾸며 진행하게 됐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셔서 차 한잔 나누며 작업공간도 둘러보시고 작품도 관람하시면서 지친 일상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예가 최용석은 홍익대 세라믹공학과(도자)를 졸업하고 개인전 16회, 초대전, 단체전 및 해외교류전 470회에 참여했다. 제25회 경주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도자기공예로 경북최고장인에 선정, (사)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제20회 신라미술대전 대상, 초대작가상, 세계창작탈공모전 대상, 경북도지사 표창, 경북기능경기위원회 표창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현재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 (사)한국예총 경북연합회 부회장, 한국미술협회 현대공예 이사, 경상북도문예진흥기금 심의위원, 공공미술프로젝트 경주도자벽화예술인창작소 대표, 고도도예를 운영하고 있다. 전시 문의는 010-3511-0134.
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가야금병창이 울려 퍼진다. 경주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제11회 월은 임종복 가야금병창 독주회를 비대면 무관중 공연을 온라인으로 송출한다. 당초 25일 오후 3시에 예정됐던 공연이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무관중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한 것. 경북무형문화재 제19호 장월중선류 가야금병창 전수 조교인 임종복 선생은 장월중선 선생으로부터 판소리에 가야금 반주를 입힌 가야금 병창을 사사했다. 임종복 선생은 “장월중선 선생님의 유업을 잇고 장월중선류 가야금병창 심청가의 확장을 위해 어머님인 장월중선 선생님의 소리를 올곧이 이어받으신 정순임 선생님께 박동실제 심청가를 전수하여 가야금 병창으로 새롭게 편곡했다. 이번 공연은 제가 새롭게 편곡한 곡과 기존 전승 곡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장월중선류 심청가 눈대목 완창을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은 심청전의 줄거리에 따라 △단가 사철가(중모리) △주과포혜(진양) △조객들게(중모리) △날이차차(중중모리) △강두를 당도하니(자진모리), 범피중류(진양), 이곳은 어디냐 하면(중모리), 어이듸여차(자진모리) △행화는(진양) △뺑덕어멈 심술타령(자진모리) △화초타령(중중모리) △일일은 천자님이(세마치) △천지신명(자진모리), 예 소맹이 아뢰리다(진양), 심황후 이말듣고(중모리), 얼씨구나 절씨구(자진모리)로 구성돼 선보이며 고수는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판소리고법 이수자인 혜원 이재진 선생이 맡는다. 임종복 선생은 “오래전부터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지인들을 모시고 작고 정겨운 독주회를 마음에 그려왔다”면서 “코로나 상황에 힘든 모든 분들에게 저의 공연이 작게나마 따뜻하고 의미 있는 공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임종복 선생은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불교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경북 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금병창 전수교육조교, 장월중선류 가야금병창 보존회 회장, 포항여성예술인연합회 회장, 포항국악원 원장, 포항민속예술단 단장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장월중선류 가야금병창 음반 ‘심청’을 제작·발매했으며, 올해는 ‘장월중선류가야금병창 가사집’을 펴내는 등 장월중선류 가야금병창의 레퍼토리를 넓히고 계승·발전에 이바지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다.
경주 행복만당 서화평생교육원 회원들의 ‘삼호서숙(三乎書塾) 창립전’이 오는 21일부터 26일까지 경주서라벌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경북최초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한 도홍 김상지 선생의 문하생들의 전시로 회원 30여명이 참여해 한문서예, 한글서예, 캘리그라피 등 12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경주 서화평생교육원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천년 경주에서 전통서화계승발전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도홍 김상지 선생과 여러 제자들이 뜻을 모아 3년 전 설립했으며,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서예, 캘리그라피, 바른 글씨(악필교정)를 통해 느림의 미학을 선물하고, 지역민들에게 서예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는 단체다. 회원 중 취산 박양훈 회원은 올해 대한서화예술대전에서 수상(부산광역시장상), 가은 설송이, 심허 김선애 회원은 한국추사서화예술공모대전에서 우수상, 신라미술대전 특선을 수상 하는 등 전국 서예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혜전 김현숙 회원은 “서예는 나이 들어 혼자 놀기 딱 좋은 취미인 것 같다. 일상의 무력감, 우울감과 불면증에서 삶의 새로운 활력이 생긴 것 같아 너무 감사한 마음”이라면서 “손가락의 아픔으로 글씨를 포기했는데, 스승님의 칭찬에 힘입어 용기가 생겼고,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힘이 생겼다. 세상에 하나 뿐인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힘써주신 스승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지도를 맡고 있는 도홍 김상지 선생은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개막식을 따로 하지 않는 대신 전시장을 찾아주신 관람객 분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이름 써드리기 행사를 진행하려한다”면서 “편하게 오셔서 관람하시고 회원들의 열정에 따뜻한 격려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도홍 김상지 선생은 제1회 개인전(김상지 지학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전국서도민전 대상, 청남서예전국휘호대회 대상, 대한민국서예술대전 대상, 솔거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대한서화예술대전 대상을 수상했으며, (사)한국미술협회, (사)한국서도예술협회, (사)청남문화재단, (사)대구경북서예가협회 초대작가다. 현재 경주 행복만당 서화평생교육원 원장, (사)한국추사서예가협회 경주지부장 및 (사)대한서화예술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제9회 경주문학상 수상자에 김민정 시인과 조현태 수필가가 각각 선정됐다. 경주문인협회(회장 한순희)는 지난 12일 웨딩파티엘에서 제9회 경주문학상 시상식을 진행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시 부문은 김민정 씨의 ‘시간, 그 꽃밭의 적막을 어쩔 것인가’가, 산문 부문에는 조현태 수필가의 ‘구멍과 돌담’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가 주최하고 경주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 한국수력원자력(주)이 후원하는 경주문학상은 경주 문단을 활성화시켜 경주문학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며 또한 경주가 대한민국 문학의 중심지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도록 2012년에 제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국내 문예지 및 ‘경주문학’에 발표된 전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를 펼쳐 수상작을 선정했다. 정수자 시조 시인은 심사평에서 “김민정 시인의 시는 시적 해석과 통찰이 남다른 깊이를 지닌 인생의 농축이었으며, 조현태 수필가의 ‘구멍과 돌담’은 삶의 모서리를 잘 다듬어 앉히는 인생의 큰 그림을 한 장으로 담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경주문인협회 회장이자 경주문학상 운영위원장인 한순희 회장은 “경주는 한국문학의 시원이며 발상지다. 한국의 수도 서울은 이곳 서라벌에서 뿌리를 내렸으며 천년 왕도 도시 경주문학상 제정은 6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주 문협의 자부심이며 경주인의 사명”이라면서 “경주문학상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지역문학인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경주시와 한수원 관계자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어 “문학의 발상지와 문학의 뿌리인 경주에서 더 좋은 작품을 만나고 집필을 하며 문학의 본향임을 알려 나가는 것 또한 우리 경주 문학인의 의무이자 사명”이라면서 “우리 가슴에 잠재돼있는 문학의 영혼을 깨워 문학과 문화의 완성품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덧붙였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완벽하지 않은 노래 실력에 더욱 정감이 간다. 경주문화재단의 치유공감프로젝트 ‘내 인생의 노래’가 누적 조회 수 1만회를 돌파했다.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선사하기 위해 기획한 ‘내 인생의 노래’는 고영일 경북약사회장을 시작으로 주낙영 경주시장, 서호대 경주시의장, 손지익 새마을회장 등 각계 대표를 비롯해서 김미루 조각가, 김상용 예총회장 등 예술가, 이선우 숙영식당 대표, 정용하 중앙상가협회장, 최남수 석로다원 원장 등 경주를 대표하는 다양한 명사 50여명이 참여했다. ‘내 인생의 노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이 되어 준 노래 한 곡씩을 직접 부르고, 코로나19를 함께 극복하자는 메시지로 구성된 5분 분량의 유튜브 프로그램이다. 지난 7월 시작 당시에는 방송 PD 출신인 오기현 경주문화재단 대표가 직원들과 직접 제작했고, 9월부터는 LG헬로비전 경주방송과 공동제작해 송출하고 있다. 경주문화재단 오기현 대표이사는 “갑자기 도래한 언택트 시대에 시민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유튜브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면서 “감사하게도 시민들의 관심이 높다. 모든 경주시민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목표로 해가 바뀌어도 계속 제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영상은 유튜브 ‘경주문화재단 내 인생의 노래’ 검색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최근 요양병원에 가족을 둔 보호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발간됐다. 오랜 시간 요양병원 봉직의로, 또 개원의로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던 의사 수필가 김민섭 씨<인물사진>가 요양병원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들을 모아 신간 ‘요양병원의 밤(메디안북)’을 발간했다. 저자는 “왕비의 부정을 본 왕이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죽여버리자 이를 막기 위해 끊이지 않는 영원한 이야기를 천 일 동안 했다는 영원한 인류의 베스트 셀러가 아라비안나이트다. ‘요양병원의 밤’이라는 제목도 그 아라비안나이트에서 탄생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요양병원의 특징과 정의, 일반적인 다른 병원들과 차이점, 요양병원에서 주로 사용하는 처치, 약, 서류 등 환자와 보호자들이 알아두면 좋을 만한 내용과 함께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32편의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나열돼 있다. 저자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의사, 교사, 사업가 예술인, 공무원, 공기업 직원, 세일즈맨, 무속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환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수많은 사연을 듣게 됐다”면서 “그들은 저마다 기나긴 인생이야기를 온몸에 품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많은 이야기를 얻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엿보고 싶은 독자들과 요양병원에 가족을 둔 보호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추천해 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의사 수필가인 김민섭 씨의 저서로는 ‘세상에서 의사는 모두 사라져야한다’ ‘인문학을 안은 의학이야기’ ‘현대차로 간 의사’ ‘닥터김의 전원생활 10년’이 있으며, 현재 경주요양병원 원장, 경주대 간호학과 외래교수, 건강강좌 강연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봉관(인물사진·출향인) 서희건설 회장이 (사)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에 취임했다. 이 회장은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12층에서 진행된 제10·11대 회장 이·취임 감사예배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에 취임했다. 임기는 이날부터 2022년 11월 23일까지 2년간이다. 이날 행사는 국가조찬기도회 명예회장 노승숙 장로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감사예배는 김삼환 명성교회 원로목사가 설교했다. 이어서 정세균 국무총리의 축하 메시지, 국가조찬기도회 명예회장 김영진 장로와 대한민국국회조찬기도회장 김진표 장로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축사는 소강석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총회장과 신정호 예장통합 총회장이 맡았다. 이 회장은 “전통과 명망 있는 (사)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에 영예롭게 생각한다”라며 “정기적인 사회정화운동과 봉사활동 등으로 임원 및 회원들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우리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먼저 솔선수범하는 등 기도회에 흠이 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오늘날 서희건설을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출향 기업인으로서 오랫동안 고향 경주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여 왔다.
지난해 10월 경주 문화재 연구소는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 44호분 발굴 조사에서 신라시대 행렬도가 그려진 토기 조각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토기 조각은 호석(무덤 둘레에 쌓는 돌) 북쪽 바깥에서 부서져 있는 채로 발견됐다. 그림은 칸을 구획하여 4단으로 그려져 있었다. 맨위 1, 2단에는 규칙적으로 문양이 그려져 있고, 3단에는 여러 인물과 동물이 등장하고 있다. 아래 4단에도 기하학적 문양이 반복되어 있다. 이들 그림에 대해 여러 연구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행렬의 제일 뒤 쪽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맨 앞에 기마 행렬이 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춤을 추고 있다. 활을 들고 있는 사람 둘은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영혼을 인도하고 무덤을 지키는 개다. 춤을 추고, 수렵하는 그림의 구성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 의견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향가와 만엽가 연구자인 필자가 보기로 행렬도는 향가와 만엽시대 사람들의 저승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교가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기 전 그 시대를 살던 고대인들의 토착 문화에 의한 장례 행사를 그리고 있었다. 앞에 제시된 의견에는 이런 점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었다. 그림 위쪽 1,2단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은 밤하늘의 별이었고, 맨 아래 4단째 다이아몬드꼴 문양은 바다의 파도를 그린 것이다. 3단의 맨 앞에는 말을 탄 장수가 길을 열고 있다. 이들은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저승사자이다. 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저승사자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특히 만엽집에는 저승사자가 예외 없이 장수(將)라는 문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두 명 이상의 저승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갔었다. 이들을 호위하는 기마무사들로 볼 수도 있겠으나, 만엽가는 확고하게 장수(將)를 저승사자라 하고 있다. 그 뒤에 줄지어 선 남녀 3명의 그림을 연구자들은 춤추는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춤추는 것이 아니라, 노 젓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남자 2명, 여자 1명으로 이루어진 뱃사공 팀이다. 고대에는 여자도 배를 저었음을 알 수 있다. 향가와 만엽에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애(乃, 노젓는 소리 애)’라는 글자가 나와 이 그림이 노를 젓고 있는 모습임을 증명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 한 사람이 밤에 사망하였다. 저승 사자 두 명이 그를 데리러 왔다. 밤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빛나고, 바다에는 파도가 잔잔하였다. 망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저승으로 출발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바다 건너 저승으로 간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이 토기 그림의 배경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경주땅 고대인들은 이렇게 믿고 살았다. 뱃사공들 뒤에 두 명의 궁사가 나와 활을 쏘고 있다. 행렬의 앞쪽이 아니라 뒤를 겨누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겨누고 있는 대상은 사슴이다. 향가와 만엽에서 활은 수렵이 아니라 ‘목표가 바로 저것’이라고 가리키는(指, 가리키다 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살상을 위한 동작이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동작을 문자로 고정하였는데 향가에서는 ‘의(矣, 화살로 맞추다 의)’, 만엽에서는 '호(弖, 활 소리 호)’라는 글자였다. 본 그림의 하이라이트, 주인공은 사슴이다. 사슴은 제위(帝位)를 비유한다. 만엽에서는 천황이거나 천황의 아들 딸들이 사슴으로 비유된다. 이렇게 귀한 신분의 사슴을 향해 궁수 두 명이 활을 겨누고 있다. 천지 귀신에게 ‘저승으로 가는 분이 바로 저기 사슴’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주인공인 제위(帝位)가 있는 방향으로 살상을 목적으로 활을 겨눈다는 것은 일단은 상상하기 어렵다. 활 쏘는 두 사람 아래 또 하나의 기하학적 무늬가 있다. 필자는 이를 만장으로 본다. 만엽을 보면 상당수의 작품에 붉은 색의 만장이 죽음의 표지어로 등장하고 있다. 만장이 긴 막대에 이삭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에 착안하였는지 이삭(穗, 이삭 수)이라는 글자로 은유하고 있었다. 사슴의 주변에 개와 뱀 닮은 동물 그림이 있다. 만엽에서는 주인공이 개들을 데리고 다니고 있다. 그 개는 갈(獦, 주둥이가 짧은 개 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망인이 여러 마리의 개를 데리고 저승길에 나서고 있다. 명백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뱀 닮은 동물은 뱀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크다. 그래서 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신라향가 헌화가와 처용가의 배경설화에 동해용이 나오고 있다. 용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조금 더 많은 사례발굴이 필요하다. 맨 뒤에 기마무사도 일행을 호위하고 있다. 이 장수 역시 저승사자다. 말은 신라향가 처용가에도 나온다. 물론 아직 파악하지 못한 의미가 다수 있다. 행렬도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향가와 만엽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까지 나간 다음 일시 멈추어야 했다. 행렬도 그림과 쪽샘지구 현장에 서로 충돌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쪽샘 지구에는 4~6세기 무렵 신라귀족 무덤 800여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44호분은 왕릉이 아니고 자그마한 귀족 무덤으로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발굴된 행렬도의 주인공은 사슴이었다. 사슴은 제위를 비유하는 동물이다. 만엽에서는 천황이나, 황자, 황녀를 뜻하고 있었다. 매장된 이가 최소한 왕자나 공주로서, 신라 왕실과 혈연 관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행렬도 그림 내용과 한 단계 아래인 귀족급 인물들의 무덤이라는 쪽샘지구 현장이 서로 부딪힌 것이다. 레고(Rego)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단 하나의 조각에서라도 불일치가 나온다면 전체 결과는 맞을 수가 없다.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지난 한 해 코로나19로 남녘땅 경주까지도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쪽샘지구 발굴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20년 12월 7일 44호분에 대한 온라인 설명회가 있었다. 목 빠져라 기다리던 행사였다. 경주 문화재 연구소 연구원들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몸짓까지도 주목을 받았다. 무덤에서는 금동관, 귀걸이, 바둑알, 돌절구 등 귀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비단벌레 날개로 제작된 금동장식 수십 점이 관심을 모았다. 최상층의 무덤에서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소측은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44호분은 신라 최상층의 무덤이고, 매장된 이는 10대의 여인으로 보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님께서도 피장자의 신분이 공주일 것 같다고 했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최고위층의 여인, 그녀가 공주였다면 필자가 서있던 막다른 길에 출구가 될 수 있다. 발굴 결과는 왕의 혈족이어야 한다는 행렬도의 사슴그림이 의미하는 신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행렬도는 수렵도가 아니라, ‘장례행렬도’였다. 그렇다면 장례행사에 신라를 대표하는 불교적 색채가 왜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을까. 행렬도에는 망인의 영혼이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저승에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배를 타고 고해의 바다를 건너 아미타불 극락으로 간다는 불교적 세계관은 토기의 행렬도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공인 이후라면 왕실 사람들은 당연히 솔선수범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장례의식을 그린 이 그림에 불교적 색채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문화재 연구소측이 밝힌 44호분은 5세기 후반(450~500)에 축조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답을 주었다. 행렬도는 향가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토착 신앙에 따른 장례행사 모습이었다. 450년에서부터 불교가 공인된 527년 사이에 죽은 공주의 장례식 그림이었을 것이다. 경주문화재 연구소의 축조시기 분석은 서기 450년에서 500년 사이로 시간적 범위를 더 좁혀 준다. 재위년도로 미루어 그녀의 아버지를 추적해보면 자비 마립간(458~479)과 소지 마립간(479~500)으로 압축된다. 그들이 5세기 후반에 재위했던 왕이다. “피장자 신장은 150㎝ 전후로 추정되는 데다 금동관, 귀걸이, 팔찌 등 장신구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 10대 공주의 무덤일 가능성이 큽니다. 150㎝라는 키가 갖는 상징성보다 부장품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은 것을 보고 이렇게 추정했습니다” 국립경주 문화재 연구소 심현철 연구원이 온라인을 통해 발표한 내용이 귀에 쟁쟁 울려온다. 10대의 소녀공주는 누구일까. 이번 주말 쪽샘에 가 그녀를 만나볼까 한다. 공주는 긴 세월동안 매일 아침 황오동 쪽샘에 와 쪽빛 하늘 빛보다 더 푸른 샘물을 마시고 있었다. 공주가 우리에게 왔다. 사슴공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