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동물복지연대 공감은 유기동물의 입양활성화와 보호수준 향상을 위해 13일 10시부터 황성공원 타임캡슐 광장에서 유기견분양 행사를 한다. 경주동물복지연대 공감에 따르면 유기동물 입양자는 질병진단비, 치료비, 예방접종비, 중성화 수술비 등 발생하는 비용 2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민병찬)은 2019년 여름방학 교육프로그램으로 오는 26일‘국립경주박물관 탐험대’를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이 박물관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박물관의 기능을 이해하고 미래의 큐레이터를 꿈꿔볼 수 있도록 마련됐다. 먼저 현재 재발굴 조사 중인 금령총 발굴 현장을 방문해 박물관에서 이루어지는 학술발굴의 과정과 그 내용에 관해 직접 보고 배워보는 경험을 가질 예정이다.
한국수력원자력(사장 정재훈)이 다음달 2일까지 협력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취득 지원사업 공모를 한다. 이번 공모는 심사인증에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으로, 한수원과 공사, 용역 분야 계약실적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한수원은 서류심사를 통해 20개 기업을 선발해 총 소요비용의 75% 이내로 기업당 최대 300만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수원 동반성장 홈페이지(www.khnp.co.kr/scom)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한수원은 2017년 처음으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취득 지원사업을 실시해 총 6개사를 지원한 바 있으며, 이번이 두 번째 공모다.
경북문화관광공사와 경북도는 일본 특수목적관광단 30명을 유치해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경주 및 안동 일원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렸다. 일본인 관광객 증대를 위해 유치한 특수목적관광단은 조선도공 후예 15대 심수관(본명 심일휘) 및 문하생 등으로 구성됐다. 일본에 뿌리내린 조선 도공의 적자이자 일본 3대 도자기를 대표하는 장인인 심수관과 함께 경북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체험한 것으로, 공사는 일본 현지여행사의 경북관광상품 개발 활성화를 위해 추진했다. 심수관은 G20 정상회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개최한 오사카 동포간담회에서 백자그릇을 선물했으며, 청송에 2014년 3월 개관한 심수관도예전시관에는 투각과 부조, 금채 등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사)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이사장 조문화)는 지난 10일 자원봉사자를 위해 현대병원과 경상북도자원봉사할인가맹점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자원봉사자의 건강 증진 및 자원봉사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과 함께 자원봉사할인가맹점 현판전달식도 가졌다. 자원봉사할인가맹점은 경주지역 자원봉사자의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자원봉사자증을 소지한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약정된 할인혜택을 제공해주는 나눔 경영실천 업체다.
외동읍 지역사회보장협의체(위원장 강기순, 이하 상생복지단)는 지난 10일 외동읍 발전협의회(위원장 김일헌)의 후원으로 독거노인세대에 사랑의 집수리사업을 실시했다. 이번 사업은 상생복지단의 특화사업 중 하나로 장마철을 대비해 외동읍 활성리에 거주하는 도거노인세대에 배수로 작업을 하고 집안의 도배와 장판을 교체했다. 특히 집수리 사업에 사용된 200만원 상당의 비용은 외동읍 발전협의회가 후원했으며, 외동읍 상생복지단 회원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새로운 주거환경을 제공하게 됐다.
양남면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설진일)가 지난 10일 양남면 행정복지센터 소회의실에서 위촉식을 갖고 주민 중심의 생활자치 실현과 주민 행복증진을 다짐하며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날 제1기 주민자치위원으로 위촉된 15명의 위원에게 위촉장이 수여됐으며 위원들의 호선을 통해 위원장에 설진일 위원, 부위원장에 김상덕 위원, 감사에 왕상조, 박지영 위원이 선출됐다.
경주엑스포가 6월 한달간 진행한 ‘네잎클로버를 찾아라’ 이벤트에 3000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참여해 큰 호응을 얻었다. (재)문화엑스포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행운과 감사를 전하는 특별이벤트를 진행했으며 모두 2914명이 참여해 성황리에 종료됐다고 밝혔다. ‘네잎클로버를 찾아라’는 경주엑스포공원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오면 유료전시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행운이벤트.
계림고(교장 이현재)는 지난 10일 전교생과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번 캠페인은 교육급식 차원으로 급식실에서 학생회 학생들과 함께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자’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학생과 교직원들이 직접 개인컵 또는 텀블러를 가져와 음료를 배식 받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번 캠페인을 통해 개인컵 또는 텀블러 사용을 생활화하는 것은 물론 지난 환경부에서 발표한 공공부문 일회용품 줄이기 실천지침을 중심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실천가능한 실천지침을 함께 교육해 학생들에게 앞으로도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두리C&S(대표 김이현)는 지난 9일 경주시청을 방문해 연간 1800만원 상당의 누룽지를 기부했다. 천북면 오야리 소재 두리C&S는 지난 2016년부터 매달 150만원을 기부하던 사회적 기업으로, 올해 4월부터는 매달 150만원 상당의 누룽지를 생산해 읍면동에 기부해오고 있다. 김이현 대표는 “항상 지역주민들에게 감사하고 사회에 환원하자는 의미에서 기부를 시작했다”며 “지역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고민하다 보니 단순 현금 기부가 아닌 누룽지를 생산해 기부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주한수원이 오는 13일(토) 오후 5시, 경주축구공원 3구장에서 창원시청과 경기를 갖는다.경주한수원은 지난 12라운드에서 김해시청에 뼈아픈 패배를 당해 이번 13라운드에서 승리해야 선두권 진입에 대한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다.경주한수원 입장에서는 15승 12무 10패로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리그 최하위에 머무르고 ..
유기동물 무료분양 ‘사지말고 입양하개‧냥’ 일시 : 7월 13일(토) 오전 10시 ~ 오후 1시 장소 : 황성공원 타임캡슐광장 경주동물복지연대 공감은 유기동물의 입양활성화와 보호수준 향상을 위해 유기견분양 행사를 한다. 유기동물 입양자는 질병진단비, 치료비, 예방접종비, 중성화 수술비 등 발생하는 비용 2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 입양 방법은 현장에서 분양확인서를 발급받은 뒤 동물병원에서 해당 항목에 대한 처치를 받고 그 비용을 증명하는 영수증과 입양비 지원 청구서를 제출하면 된다. 현장에서는 동물보호와 등록율 향상을 위해 경주시 축산과 가축방역팀에서 발행한 동물등록(내장칩) 2만원 상당 교환권을 반려동물 동반 참가자에게 현장에서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문의) 경주동물복지연대 공감 사무국장 010-2524-1515.
경주가 인구가 줄어들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라고 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국가통계포털의 주민등록인구를 활용해 2013∼2018년 전국 시군구 및 읍면동의 도시 소멸위험지수를 계산한 결과이다. 영남과 호남, 강원의 대부분 지역이 소멸위험지수 0.5 미만으로 나타났다. 경주 인구는 1997년 29만2173명을 최고의 정점으로, 2016년에는 25만9492명으로 26만명이 무너졌다. 2019년 6월 말 현재 경주 인구는 25만6141명으로 22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다. 또 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20.94%(2019년 6월 현재 총인구 25만6141명 중 65세 이상이 5만3622명)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21% 이상)에 진입하여 경주지역의 새로운 문제로 직면해 있다. 경주는 지금까지 인구 30만 달성이란 목표를 세우고 교육환경 인프라, 경제활동인구 유입을 위한 기업 유치와 일자리 창출, 신도심권 개발, 생활환경 정비, 결혼하기 좋은 환경, 특목고 유치 등 수많은 정책 수립을 했지만, 결과는 인구 소멸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인구 감소는 소비 감소가 뒤따라 세수가 감소하고, 경쟁력 약화에 의한 양질의 서비스 혜택이 줄어들고, 부동산가치 하락으로 빈집이 늘어나고, 학생수가 감소되어 문을 닫아야 하는 지역 대학이 생기는 등 지역사회의 공동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지방 도시는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구 감소가 계속될 것이고, 속도도 점점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날 지방 도시의 인구 유출은 기정사실이며, 인구 증가를 위한 특별한 대책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18년 경주의 전출입 현황을 살펴보면, 30세 이하는 전입보다 전출이 많고 특히 22세에서 26세까지의 전출이 대단히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전출보다 전입이 많은 연령은 44세에서 64세까지로 중년 세대의 유입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구감소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중년 세대의 유입이며, 중년 세대의 유입에 따른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새로운 1000년의 도시 경주를 위한 인구 대책으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실버세대를 위한 유인책과 정주 대책이 필요하다. 경주로 전출입하는 인구 중에서의 50대에서 60대 층인 실버세대가 유일하게 전출보다 전입이 많다. 제2 인생을 경주에서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실버세대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 정책과 거주환경 대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둘째, 인구 감소에 의한 도심지역의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도심지역과 과거 주거단지의 기반시설을 개선하여 친환경적인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는 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일본 도쿄 인근 지역은 빈집이 늘어나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2016년 우리나라의 빈집률도 경상북도 10%, 전라도가 13.5%로 나타나고 있어 빈집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가 예상된다. 고령화 사회는 기반시설이 갖추어진 도심권을 선호하여 변두리 집의 가치가 하락하여 빈집이 생겨난다. 이를 대비하여 도심권의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한 선택과 집중, 구조조정 등의 도시재생 사업에 노력해야 한다. 셋째, 미래세대의 삶의 첫째 조건인 주거지의 자연환경 보존대책이 필요하다. 최근의 황성공원을 지키기 위한 정책 결정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노후에 거주하고 싶은 곳으로 경주를 선택하는 이유는 경주 주변의 문화유적과 함께하는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며, 과거 천년을 이어온 친환경 유산과 정신문화 유산이 웰빙과 힐링을 초월하여 칠링(재미있게 놀자)자원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경주의 인구정책은 지역성, 시대성과 현실성을 반영한 새로운 패러다임인 ‘인구 지키기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은 시대성에 부응하지 못하여 투자한 만큼 결과가 없었다. 지방 도시의 인구감소는 선진국들의 보편적 현상이며, 지방 도시의 고학력 청년층들이 양질의 사무직, 고급 직군을 찾아 대도시로 떠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현실이다. 경주는 과거 선배들의 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하고, 한수원 본사를 유치하면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인구증가는 미비했고, 오히려 친환경 경주건설에 짐으로 남아 있다. 과거 선배들의 몸부림 결과로 얻은 아픈 결과물을 잘 활용하여 미래 경주건설에 보탬이 되게 하여야 한다. 손쉬운 경제력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원자력을 더 이용하지 말고, 시민과 함께 친환경 도시 경주 건설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경주에서 제2의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실버세대들이 살고 싶어 하는 경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기업, 천연의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정책, 시범적이고 실험적인 사업은 더 하지 말아야 한다. 즉 경주의 정주 여건을 나쁘게 할 가능성 있는 것들에게 경주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의 대도시 유출은 시대적 대세이므로 받아들이고, 이 세대들이 다시 경주로 귀향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버세대들을 배려한 실버 도시의 길을 찾는 것이 새로운 천년을 이어가는 경주의 주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2.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자왈 관중지기소재라. 혹왈관중검호아? 왈 관중유삼귀하며 관사불섭하니 언득검이리오? 然則 管仲知禮乎? 연즉 관중지례호아?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왈 방군수색문하니 관씨역수색문하며 방군위양군지호하여 유반점하니 관씨역유반점이라. 관씨이례면 숙부지례리오? <주석> 管仲 :성은 관, 이름은 夷吾. 제나라의 대부. 제나라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였다. 器小 : 국량이 좁고 얕다. 器識이 협소하다. 三歸 : 包咸이 말하기를 세 성의 여자에게 장가감이라고 하였다. 朱熹가 말하기를 삼귀는 臺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兪樾의 <群經評議>에서 말하기를 집에 세 곳이 있다. 오늘날 三座公館이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攝 :兼職이다. 邦君 :한 나라의 군주이다. 樹塞門 :문에다 병풍을 치고 안과 밖을 차단하는 것이다. 樹는 병풍을 새우는 것이다. 塞은 遮蔽이다. 好 :友好이다. 反坫 :坫은 흙을 쌓아 만든다. 옛날 두 임금이 서로 만남에 주인이 술을 부어 손님에게 드리면 마신 뒤에 빈 잔을 坫上에 놓는다. 이를 反坫이라 한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의 그릇이 작도다. 어떤 이가 물었다. 관중은 검소하였습니까? 관중은 세 개의 공관을 가졌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일만 시키고 겸직시키지 않았다. 이런데 어찌 검소하였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이 궁궐의 문 앞에다 병풍을 세우니 관중도 자기 집 문 앞에다 병풍을 세웠다. 임금이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하여 잔치할 때 正堂 양 옆에다 술잔을 놓는 坫을 만드니 관중 또한 자기 집에다 이와 같이 坫을 만들었다. 만약에 관중더러 예를 안다고 하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묵상> 먼저 본문의 내용을 잘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자 당시 관중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 부정적이었다. 공자의 왕도 정치적 처지에서 보면 관중의 폐도 정치는 맞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라고 한들 공자의 이상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생각을 바로 말하는 것이다.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좀 더 큰, 그리고 더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관중의 그릇이 작았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혹자는 그래도 관중은 검소하지 않았느냐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아주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그가 세 개의 공관을 가졌고, 또는 다른 해석을 하면 세 여자에게 장가들고 또 한 사람이 여러 사무를 보게 하면 경비가 절약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검소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자 그래도 관중이 예는 알지 않았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어디까지나 관중을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단호하였다. 임금이 안채를 안 보이게 하려고 안 채 앞에다 병풍을 치니 관중도 그렇게 하였고 임금이 다른 나라의 임금을 맞아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며 술을 마심에 필요하여 궁궐에다 반점을 두었는데 관중도 자기 집에다 반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얼른 보면 검소하다는 앞의 문제와 연관되는 듯 한제 그렇지 않다. 이는 참람한 일이니 검소의 대상이 아니라 예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월권이라는 것이다. 이러고도 예를 안다고 하면 어느 누가 예를 모르는 사란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지없이 관중을 폄하하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의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렇게 제의 관중을 욕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공자를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폐도정치를 펼친 관중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역시 같은 논어인데도 憲問篇에서는 관중을 아주 높게 추켜세웠다. 곧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관중의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에게 있어서 관중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조금 더 큰 그릇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 능력으로 왕도 정치를 한 번 펼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愛憎이 교차되는 것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경주는 최근 인구자연감소와 출산인구, 전입인구 감소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은 경주를 떠나가고 장년층들이 전입되는 현상을 보이면서 도시 경쟁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인구는 경주를 떠나고 있으며 유입 인구 다수가 50대 이상인 것으로 집계돼 경주시의 인구정책 수립에 철저한 분석과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경주시 인구는 25만5533명, 10년 전 2008년 27만775명보다 1만5242명이 줄어들었다. 이는 경주시로 들어오는 전입 인구보다 경주를 빠져나간 전출 인구가 많은 것도 원인 중에 하나다. 지난 10년간 경주 전입 인구는 34만3012명으로 전출인구 35만9111명보다 1만6099명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2018년 전입 인구 총 1만4999명 중 울산에서 온 전입자가 4121명으로 가장 많고 경북 3349명, 대구 1530명, 부산 1446명, 서울 1104명 순으로 집계됐다. 반면 전출자는 1만5120명으로 경북 다른 시군이 3746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울산 2474명, 대구, 부산, 서울, 경기 순으로 나타났다. 지난한 해 전출입을 보면 전출이 120여명 많은 것에 불과하지만 경주지역 순이동자는 2~30대 인구는 경주를 빠져나간 반면 40대 이후 중장년층은 경주로 유입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늘어난 5~60대 전입자가 2~30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고 있는 형국이다. 전출사유는 주택문제가 34%로 가장 많았으며 가족 24%, 직업 24% 순이다. 전입 사유 역시 주택과 가족, 직업의 이유였다. 이는 젊은 층이 바라는 주택과 일자리 상황이 좋지 않고 상대적으로 중장년층은 경주가 살기에는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현재 경주의 2~30대 인구 전출 추세를 보면 경북 인근 도시나 경주를 둘러싼 대도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들 도시가 경주보다 일자리나 주택확보 여건, 사회환경 등이 좋기 때문일게다. 우리사회의 중요한 생산가능 연령층인 젊은 층의 인구 감소는 지역사회의 성장역량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앞으로 인구증가는 기대치보다 점점 더 낮아질 것이다. 따라서 생산 연령층인 젊은 층의 인구유입 대책마저 제대로 수립하지 않는다면 경주의 도시경쟁력은 점점 더 쇠퇴할 것이다.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가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을 비롯한 9곳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키로 최종 결정했다. 경주는 이미 석굴암·불국사(1995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양동마을(2010년)이 등재돼 있어 이번 옥산서원 등재로 국내 세계유산 14곳 중 4곳을 보유하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위상을 세우게 됐다. 1572년(선조 5년)에 건립된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됐다. 안강읍 옥산리에 자리한 이곳은 회재가 42세 때인 1532년(중종 32)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오히려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파직된 후 낙향해 기거하던 곳이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죽은 지 19년이 지난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을 비롯한 문인과 유림의 주도로 건립됐다. 1573년 임금에게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구인당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원래 아계 이산해가 썼으나 1838년(헌종 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지으면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썼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회재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돼 있다. 지난해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 완질을 오랫동안 보관했고,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인 ‘사마방목’, 이언적의 ‘수필고본’ 등이 보물로 지정됐다. 1835년에는 목판을 소장하는 문집판각(文集板閣)을 조성했다. 옥산서원은 국내 어느 서원보다 많은 고서와 고문서, 문집 등 문헌자료들이 보관돼 있고 보존상태도 좋다. 이는 소중한 책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옥산서원 책은 서원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뜻의 서원서책불출문외(書院書册不出門外)라는 이황의 글을 적은 편액을 경서각 앞에 걸었다. 또 정조도 옥산서원의 책을 밖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어명을 내린 적이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책과 유품이 잘 보존돼 있는 소중한 서원이다. 경주시는 내년부터 옥산서원 인근 부지에 ‘옥산서원 교육관 및 역사문화관광단지’를 조성해 세계유산인 양동마을 및 주변 서원 등과 연계하는 특화된 경주의 전통 유교문화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경주 북부권인 양동마을에 이어 옥산서원의 세계유산등재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경주의 조선 유교정신문화 유산이 가치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이번 기회에 선조들의 훌륭한 유산인 옥산서원을 잘 보존하고 정신을 계승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고 전파하는데 정성을 모으기 바란다.
유기(遊記)는 기록의 단상(斷想)으로 그 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필자는 KCI논문 2017년도 『동방한문학회』에 게재된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유기(遊記)의 특징 고찰」,『동방한문학』71집을 통해 19편에 해당하는 경주유기의 소재 발굴과 유기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찾았지만, 방대한 한문학 자료를 분석해서 경주유기자료 집성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1865)는 1828년 벼슬길에 올랐고, 185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경상도에 큰 재해가 발생하자 급히 조정에 보고해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였다. 1856년에는 경주를 찾아 공무(公務)를 우선으로 하면서도 틈틈이 경주의 곳곳을 탐방하고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기행문과 봉황대·첨성대·반월성·황남전·계림·숭덕전·태종무열왕·옥적·여러 왕릉·상서장 등 10곳을 「동경회고(東京懷古)」로 읊조렸다. 당시 경주부윤은 우암의 8대손 송근수(宋近洙,재임1855.12~1857.5)였다. 그는 경주 유람에 대한 기록을 쓰면서 일부는 지역학 자료를 참고하였고, 나머지는 직접 본 사실을 담았다. 주로 인용한 『동경지(東京志)』는 편저자 미상의 경주읍지로, 1669년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이채 등과 함께 증보한 것으로, 『동경잡기』·『동경통지』로 불린다. 「동경방고기」의 특이점으로는 경기도 장단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57왕릉이 동경에 있어야 한다는 신라 58왕 주장이다. 이계 남몽뢰·화계 류의건 역시 신라 55왕을 말하였고, 특히 청장관 이덕무는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지칭해서 뺀 55왕 만을 언급한 것을 보면, 현재 신라 56왕은 재고될 소지가 다분하며, 여기에 관해 깊이 있게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 반월성의 석문(石門) 그리고 계림정(鷄林井) 등 설명은 당시의 문화재 현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만약에 신석우가 본 반월성의 석문이 1738년 축조된 석빙고를 오인(誤認)한 것이라면, 이는 조선의 석빙고를 신라의 축조물로 보는 등 문화재를 바라보는 조선선비의 심각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으며, 예나지금이나 문화를 보는 무지(無知)의 소치(所致)가 매우 안타깝다. 게다가 경주부윤 송근수의 형은 바로 수종재 송달수로, 1857년 총 64일간 여행을 떠나며 4/19~5/20 32일간 경주에 머물렀고, 송달수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더불어 옥산·인산서원을 찾아 도통연원을 확인하는 등 뚜렷한 유람배경이 있었다. 본 자료는 앞서 선행 연구된 경주유기 19편 목록에서 빠진 자료로, 단편적인 경주의 유람기록을 담고 있으며, 동일 제명으로 앞서 1760년 석당 김상정이 지은 「동경방고기」가 있다. -1856년 동경 고도를 방문한 기록(東京訪古記) 동경은 신라의 고도이다. 고적(古蹟)을 두루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공무(公務) 때문에 객지에 머물며 여러 날 돌아다닐 수는 없었고, 또 고사에 의거해 글을 짓고자 하였으니 동경지(東京志)·전(傳)과 대부분 같았다. 다만 열람한 자료와 무열왕·최치원 등의 고사를 모아서 절구를 짓고 그것을 엮었다. 봉황대는 경주부의 남쪽 몇 리 작은 언덕에 있다. 부의 지세는 평평하고 넓어 그다지 험하고 높지 않고, 산천과 마을을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세상에 전하길 ‘동경의 북쪽은 허결(虛缺)하여 여인들은 북상투(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로 그 기운을 누르고, 개와 가축은 꼬리가 짧다.’고 전한다. … 봉황대 아래에 큰 종이 있는데, 종각이 대종을 덮고 있다. 동경지(東京志)에 ‘본래 봉덕사 종이었는데 훗날 영묘사(靈竗寺)로 옮겨다 걸었다.’하였으니, 이곳은 필시 영묘사(靈妙寺)의 터일 것이다. 지나는데 첨성대가 평야 중간에 보였다. 벽돌처럼 다듬은 돌로 대를 쌓았고, 모양은 동글고 뾰족하였다. … 그 둘레는 17보가 되고, 높이는 3장(丈) 쯤 되었다. 대의 중간에 모난 문이 설치되었는데, 내가 “첨성대 중간에 돌사다리가 마치 나선처럼 있다면 오를 수 없겠는가?”라 하니, 고을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하였다. 내가 “중간에 나선형 사다리가 없어서 땅의 평평한 곳에서 모난 문에 이르기까지 또한 잡아당길 것이 없어 이를 수가 없다. 이곳에 사다리를 설치해서 오르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황남전 경순왕상(敬順王像)을 참배하였는데, 그곳은 부의 황남리에 있다. … 숭덕전은 신라시조를 배향한다. 사릉(蛇陵)은 그 위에 있다. 나정(蘿井)은 그 곁에 있고, 우물이 나온 곳이다. 능은 장사지낸(歸藏) 곳이요, 여러 왕릉의 대부분이 사릉의 경내에 있다. 신라는 58왕으로 능원(陵園:왕족의 무덤)은 동경지에 다 기재되지 않았다. 지금 부의 바깥 들판에 우뚝하게 쌓은 것이 여럿이다. 혹자가 “이곳은 모두 능묘(陵墓)입니다”라 하였다. 경순왕은 고려조에 몸을 의지해 지냈고, 장단(長湍:경기도)에 장사지냈으며, 비록 그곳을 알지는 못하지만 경주에는 당연히 57곳이나 된다. 반월성은 탈해가 차지하고, 파사왕이 쌓은 곳이다. 긴 언덕은 초승달 같고, 앞의 큰 시내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성 안에는 녹음이 짙고, 돌을 쌓아 만든 문이 있다. 그 안의 제도는 마치 성문은 돌무지개문 같았다. 문미의 돌에는 ‘崇禎紀元後再辛酉(1741) 移基改築’이라 각석되었지만, 본래 어디에 있었고, 어떤 연유로 옮겨와 건축되었는지 모른다. 돌비석이 있는데 완악해서 읽을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월성의 남쪽에 인산서원이 있는데, 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곳이다. 첨알하고 물러났다. … 오늘 70리 떨어진 반구[언양]에서 자고자 하였으나, 고적을 방문하느라 날은 이미 포시(晡時.오후3~5시)에 가까웠다. 마침내 길을 떠나 한 쇠락한 곳을 지나는데, 종자가 “이곳은 포석정입니다. 마음이 두려워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밤이 되자 황옥적(黃玉篴)·황옥적(黃玉篴)을 보고는 불어 볼 것을 부탁하였는데, 청옥적은 더욱 청량(淸亮)하여 가늘고 긴 알운(戛雲)의 울림이 있었다. 신라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중국의 세상을 바꾸려 한 노력과 원수를 갚고 강토를 개척하는 공적은 무열왕이 성대하였고, 고운 최치원은 황엽청송(黃葉靑松)의 글을 지었지만, 비록 신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또한 동도회고(東京懷古)의 말미에 부친다. 상서장은 금오산 북쪽에 있다고 전한다.
경주에는 ‘국당’이란 마을이 두 군데가 있다. 옛 부터 나라님이나, 신령께 굿을 하며 복을 비는 사당들이 있든 동네로, 그 이름이 굿당→국당(菊堂)으로 변해왔다고 한다. 둘 다 형산강 물의 좋은 기운을 받아. 인심 좋고, 평온하며, 특히 효심이 넉넉한 마을로 전해 오고 있다. ▼강동면 국당리의 칠자교(七子橋) 이야기 강동면 사무소에서 앞 형산강을 건너 천북쪽으로 가는 큰 다리(국당교)가 있고, 그 강 뚝 오른쪽으로 400여 미터 올라가면 물 높이만한 낮은 보(堡)가있다. 주변에 돌더미가 있고, 갈대들도 무리 지어 너울거린다. 이곳 국당리(菊堂里) 일대가 조선말 전국에서 이름난 큰 시장인 ‘위 부조장터’로 알려져 있다. 옛날 이 마을 에 과부와 아들 칠형제가 살고 있었다. 언제 부터인가 어머니는 밤이 되면 몰래 마을 앞개울을 건너, 저쪽 마을 남자를 만나러 다녔다. 어느 날 밤 칠형제는 냇가로 나가 어머니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몰래 보고. 모두들 그녀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자고 했다. 어머니의 수고와 위험을 걱정해서였다. 밤이 이슥해 어머니가 나가시면 그들도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몰래 돌다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마음 한구석에 깔려있지만 아버지 없이 고생하며, 자기들을 길러준 어머님의 정성이 우선 앞선 것이다. 어느 늦가을 쌀쌀한 밤이었다. 어머니는 보통 때보다 일찍 귀가하다가 개울에서 물을 첨벙거리며 사람들이 돌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았다. 풀 섶에 숨어 그들의 동태를 살폈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좀 더 빨리 서둘러라,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가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저 소리는 틀림없이 큰 애 목소리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해요. 그래야 어머니가 추운 날에 고생을 안 하지’ 저 소리는 막내의 소리였다. 갑자기 어머니는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마움의 눈물이요, 죄스러움의 눈물이었다. 이튿날부터 어머니의 건너 마을 밤길은 뚝 끊어졌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완성될 때까지는 전(前)과같이 그 시간대에 개울에 나갔다. 자식들의 갸륵한 효심의 돌무지를 중도에 허물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일이 지나 징검다리는 완성되었지만 정작 어머니는 그 다리를 한 번도 밟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도 불렀는데, 아버지에 대해서는 자식으로서 불효였지만, 어머니께는 효도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선행이야말로 어머니께 그릇된 행동을 일깨워준 진정한 효심으로 보았으리라. 그래서인지 훗날 그 어머니와 아들들을 칭송하고, 이 다리를 효성이 지극한 일곱 아들이 쌓은 다리인 ‘칠자교(七子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정동 국당 마을 오천정씨 효열비각 이야기 오릉 뒤편 흥륜사 건너 도로〔국당길〕변에 ‘최진간’과 그의 열부 ‘오천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각이 있다. 효열각(孝烈閣) 앞에는 큰 무궁화가 서있고, 태극 대문에 돌담이 사각으로 비각을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남천물이 형산강(서천)으로 유입되는 주변 논밭지역이다. 마침 비각을 관리하는 분의 도움으로 그 안에 들어가 조언도 듣고, 찬찬히 살필 수가 있었다. 비석에는 ‘고 독효 처사 월성 최공 열부오천정씨 기적비(故 篤孝處士月城 崔公烈婦烏川鄭氏記蹟碑)’라고 적혀있다. 이 비문속의 ‘최진간(崔震幹)’은 임진왜란 때 크게 공을 세운 경주 ‘최진립’ 장군과 인척이 되는 ‘최신린’의 둘째 아들이요, ‘오천정씨(烏川鄭氏)’는 그의 아내이다. 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최신린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병환중인 할머니를 잘 모셔야한다는 당부를 하고 싸움터로 떠난다. 왜적이 쳐들어오고 주변 사태가 위험하자, 평소 효성이 지극한 최진간이 할머니를 엎고 깊은 산 골로 피신한다. 그러나 왜군에게 발각되고 할머니를 헤치려하자, ‘나는 죽어도 좋으니 할머니는 헤치지 마라’고 외치며,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할머니도 칼을 맞아 죽는다. 포항 영일에서 시집온 그의 부인은 왜군이 퇴각하자, 남편과 할머님의 시신을 묻고 통곡한다. 두 분 다 잃고, 전쟁에 나간 시 아버지의 유언마저 지키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에, 난들 살아 무엇 하랴?, 정 씨는 충효가문의 현숙한 부인답게 자기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임란 후 조정에서는 정씨부인을 칭송하고, 효열각을 세우도록 했다고 한다. 효열비는 효녀, 열녀, 열부에 대한 통칭비로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결혼 후 남편이나 시댁 어른에게 부도(婦道)를 다한, 타의 모범이 되는 여자에게 내리는 포상으로 여성 최고의 미덕이며, 양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차이콥스키(P.I.Tchaikovsky/1840-1893)는 오늘날 발레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교향곡도 잘 썼다. 전부 여섯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마지막 세곡이 걸작이다. 이중에서 4번 교향곡은 사연이 많다. 1877년에 차이콥스키는 제자 밀류코바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하게 된다. 마침 이때는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4번은 결혼실패의 충격과 미망인에 대한 연심이 얽힌,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곡은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되었고 이듬해 초연되었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준 여유로 4번처럼 완성도 높은 창작을 계속 이어갔다. 마지막 6번 교향곡 비창(1893년)은 조금 독특하다. 2악장이 빠르고, 3악장은 마치 피날레처럼 끝난다. 그래서 3악장이 끝나고 박수가 터지는 경우가 많다. 악장과 악장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클래식계의 불문율을 무의식중에 깨뜨리게 된다. 반면에 4악장은 아주 조용하고 음울하기까지 하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차이콥스키는 6번 초연 후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음악의 불모지였던 러시아에 서양음악을 들여와 이식한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다. 그의 강점은 아름다운 선율이다. 러시아에는 그를 빼닮은 추종자가 있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S.Rachmaninov/1873-1943)다. 그는 평생 세편의 교향곡을 만들었는데, 1번 교향곡의 처참한 실패 후 정신치료를 받다가 피아노협주곡 2번을 만들어 재기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간 사람은 누가 뭐래도 쇼스타코비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국 출신 스타음악가들의 망명을 촉진했다. 혁명 당시 중장년이었던 라흐마니노프(44)와 스트라빈스키(35)는 망명 후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타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편 26세였던 프로코피에프는 망명 후 귀국했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당시 11세에 불과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아예 떠날 수도 없었다. 쇼스타코비치(D.Shostakovich/1906-1975)는 인민예술가로서 꽃길을 걸었다. 적어도 스탈린이 그의 오페라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1936년)까지는 말이다. 숙청의 위기에 몰린 쇼스타코비치는 이듬해 5번 교향곡 ‘혁명’으로 위기에서 탈출하게 된다. 5번은 본인의 내심과는 무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이때 소련 지휘계의 전설인 므라빈스키(Y.Mravinsky/1903-1988)가 도움을 줬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과 관련된 일화 하나! 이곡은 1978년 세종문화회관의 개관을 기념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프로그램에 들어있었다. 당시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권시대여서 공산국가의 음악은 연주될 수 없었다. 가요 ‘아침이슬’이 금지곡이었던 시절이니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곡 변경요청을 무시하고 연주해버렸다. 다행히 아무 일없이 끝났지만 공연관계자는 공연 내내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했고, 반전(反戰)의 메시지가 담긴 이곡은 서구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켰다. 7번은 이어지는 8번, 9번과 함께 전쟁 3부작으로 불린다. 한편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이 또다시 공산당의 비판을 받자 창작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곧 10번 교향곡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의 쇠퇴기인 20세기에 무려 15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9번 교향곡을 쓰기만 하면 죽는다는 ‘9번의 저주’를 넘어선 것도 놀랍지만, 예술을 정치의 도구로 쓴 스탈린 치하에서 이룬 업적이기에 더욱 대단한 것이다. 이처럼 인고의 삶을 살다간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리목월기념사업회(회장 김봉환)가 운영하는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학장 손진은)은 오는 20일 오후 2시 동리목월문학관 영상실에서 ‘현실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를 주제로 이승우 소설가<사진>의 초청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동리 문학상을 수상한 이승우 작가는 이번 강연에서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라는 두 개의 화두를 들어 ‘소설 창작과 이해의 관점’과 ‘소설에 메타포와 상징을 넣는 방법’을 소개할 예정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그가 사는 사회와 역사를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으며, 독자는 작가에 의해 포착되고 그려진 현실을 소설을 통해 읽는다. 이때 ‘구석진 세상의 이치나 주눅 든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소설가 지망생들은 현실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 모조리, 충실하게 그려내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말 것을 주문하며 우리가 소설을 통해 반영하는 현실은, 우리가 보는 현실 즉, 의식이 동반된 정신 활동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이승우 작가는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은유, 또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승우 작가는 동리문학상을 비롯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다수의 작품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특강은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생 및 경주시민 등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의 054-741-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