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봉정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수봉선생이 구휼사업(救恤)및 육영사업(育英事業)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에 나선 곳으로 최초 1924년 서당인 비해당과 약국인 보인재를 갖춘 2층으로 건립하였으나 이후 1953년 현재와 같이 단층으로 개수됐다.
수봉정과 이곳에 있는 한옥들은 현재 원형으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집의 구조및 정원들의 경관이 뛰어나다. 때문에 수봉선생의 정신과 그때 독립운동 지원 본거지로써의 숨결이 이직도 남아 있는 듯 느껴진다.
수봉선생(1859~ 1936)은 조선조에서 일제치하까지 민족 수난기를 사셨으며 16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이때 수봉가의 재산은 약1백석 정도였다. 선생은 이때 학문을 계속할 것인가 실용적인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라가 수난의 위기에 처한 때라 재산(財産)을 모으는 것이 미래를위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치산(治産)에 힘썼다. 선생은 재산을 모으는데는 천번만번 근검하는 것이 제일이란 신념으로 평생을 살면서 환갑이 되던해에 5천석 부자가 됐다.
그전부터 인심(人心)좋은 괘릉 이(李)부자란 소문이 자자했지만 부자가 된 후 선생은 “의.식.주 를 제외한 나머지는 내것이 아니다.” 라는 경제관으로 재산의 사회환원 사업을 위해 구휼사업과 사회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기본금고(基本金庫)가 될 이수봉정 명의로 재산 등기를 계속해 나아갔다. 지금도 구 등기부 등본을 보면 경주,울산,포항에 걸쳐 이수봉정으로 등기된 증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선생은 수봉정을 1924년 완공하시고 약국인 보인재를 여는등 구휼에 정성을 쏟는 한편 서당인 비해당도 개설, 인재를 키우는 일에도 힘썼다. 또한 독립군을 지원하는 일에도 열심이었고 신돌석 의병장도 수봉가(家) 에 자주 내왕하였다.
선생은 민족정기를 살릴 구국의 인재를 키워낼 신식 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를 추진하다 일생을 마쳤다.
후손들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1938년 사립 경주 고등보통학교를 개설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경주 공립 중학교를 개교했으며 광복후 사학으로 환원해 오늘의 경주중고등학교가 되었다.
수봉정은 불국사역에서 입실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괘릉 표시판이 나오면 1km쯤 들어 가면 있다.
안재희(메리츠증권 경주지점 영업이사,본지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