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열면 밝은 세상
아침부터 오락가락 하는 빗방울에 우산을 챙겨들고 옛 벗이 소개한다는 전통 찻집으로 향하기 위해 미리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승용차에 오른지 불과 몇 분만에 우리는 시내를 빠져 나와 남산을 옆으로 하고 울산 방향 산업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찻집을 찾아가는 길은 불국사역에서 불국사쪽으로 300m쯤 가면 왼편에 경주 온천관광호텔이 있고 맞은편 골목 입구에 전통 찻집 간판이 안내를 한다.우측으로 들어오면 좌측 편에 큰 골기와 집이 나오는데, 대문 앞 현판에 "門열면 밝은 世上" 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 온다.
활짝 열려진 소슬 대문을 들어서면 확 펼쳐진 넓은 마당에 정돈되지 않고 자연스레 가꿔진 백일홍과 봉선화, 방아 등 수십여 종류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담벼락을 휘둘러 서있는 감나무와 대추나무들이 한창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정면으로 우뚝한 전통 한옥 일자 집이 넉넉하게 앉아 긴 세월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집을 세운지가 100년은 족히 넘는 집으로 예전에 진사를 지낸 양반 집`이라고 주인장이 귀뜸했다.
석축 봉당을 올라 댓돌 위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올라서면 널찍한 대청마루가 나오고 제다실인 정지, 안방인 세심방(洗心房),건넛방인 삼락실(三樂室)이 있고 대청마루 뒤편엔 화실로 쓰는 화우실(畵友室)이 있는데 늘 은은한 묵향이 손님들을 맞고 있다.
우리는 주인의 안내로 대청 마루에 가로놓인 노송 탁자위에 둘러 앉았다. 실내는 전혀 인위적인 꾸밈이 없이 고가(古家)가 갖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옛 정취를 잘 활용했다. 벽과 곳곳엔 주인이 직접 그린 소나무 그림과 시화 등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솔숲에 와있는 착각이 든다.
단아하고 정갈한 대청마루 한켠에서 들려오는 우리 전통 음악은 전시된 그림과 시를 감상하며 인생을 토론하는 장소로는 제격인 것 같다. 마주앉은 사람의 눈길이 더욱더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주인의 마음에 고향집과 같은 푸근함과 맑은 차 향, 묵향으로 인해 더욱 편안함을 주는 것은 아닐까.
주인인 김동삼씨는 그림을 전공했고, 계간지"시"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시인이기도 하며, 현재 여러 단체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김 선생은 특히 소나무에 심취해 글과 그림들이 소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예전에 통도사 일대의 소나무가 좋아서 몇 년을 살면서 솔밭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이번 경주 일대의 소나무를 대상으로 그림 그리기에 들어가 내년 5월 초순에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고 솔거 그림 연구회를 만들어 뜻을 함께 할 동호인을 찾고 있기도 하다.
특히 지난 여름 방학에는 경주 문화유적 탐방과 체험 학습장을 찻집에서 열고 2박3일간씩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잊혀진 신라향기를 찾는 모임을 만들어 숨어 있는 신라의 문화유적 등을 찾는 모임을 열고 뜻 있는 회원을 모집중이다.
차림표는 전통차와 점심때는 우리밀 수제비를 할 예정이라는 주인장의 말에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찻집 운영은 차와 먹거리를 드시고 작은 성의 표시로 후원금을 내고 있다. 따라서 주인장이 자리를 비울때도 찻집은 늘 문이 열려져 있고 누구든지 각자가 알아서 준비된 차를 드시고 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또 좋은 글귀나 달마 등을 직접 쓰거나 그려서 오시는 분들께 나눠주며 자칭 신라 경순왕 셋째 아들 석(錫)자 할아버지의 34대 손으로 부끄럽지 않는 신라의 후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야무진 꿈을 애기하기도 한다.
주인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열려진 대청마루 바깥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새록새록 내리고 있다. 세월만큼 푸른 이끼가 자라있는 골기와를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더러는 분주하게 쫓겨 살아가는 삶이 잠시 정지된 공간에 앉아 있는 듯 했다. 멀리 내다뵈는 토함산 자락 위로 흰 구름들이 쉼 없이 오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가끔은 이런 곳에 와서 바쁜 일상의 시간을 잊고 자신을 찾아보는 곳으로는 그만이라는 생각에 정말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이 집 주인이 들려주는 시 한편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마당에 귀한 손 오셔서
함께 벌나비 어우러 놀다
비가 오니 비 먹고
밤이 와 잠들었다
아침에 해맞아
붉게 웃다가 웃다가
바람에 슬쩌기 신벗고
門을 나선다.
-계간지 "시"2001년 가을호<문열면 밝은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