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도 북유럽은 늘 변방이었다. 정치도, 경제도 그렇고, 문화 역시 그랬다. 고전파 이래로 문화예술의 중심지는 독일권이었고, 북유럽의 예술유망주들에게는 독일유학이 필수코스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북유럽 예술가들이 이런 서방의 음악을 맹목적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들 고유의 소리를 작품에 담았고, 이를 민족주의 음악이라 불었다. 민족주의 음악 태동에는 프랑스 혁명 후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Napoléon I, 1769-1821)의 침략전쟁이 큰 몫을 했다. 민족 멸망의 위협을 느낀 변방의 약소국들은 민족주의라는 구호 아래 똘똘 뭉쳤다. 이는 당연히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의 거장 그리그의 음악에도, 핀란드의 영웅 시벨리우스에게도 말이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는 불과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외갓집에서 양육되었다. 열 살 때 삼촌이 선물한 바이올린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된다. 바이올린에 흥미를 느껴 즐겨 연주하던 그는 후에 법대에 입학했으나 곧 헬싱키 음악원(현,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으로 갈아탄다.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협주곡(1904년 초연)은 바이올린에 대한 오랜 연주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북유럽을 대표하는 클래식음악으로 자주 무대에 오른다. 1889년 헬싱키 음악원을 졸업한 시벨리우스는 불과 27세에 민족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를 모티브로 한 쿨레르보(Kullervo)교향곡(1892년)를 작곡한다. 칼레발라는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핀란드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대표적인 문학 작품인데, 쿨레르보 교향곡은 이 칼레발라를 가사로 하여 관현악에 독창과 합창을 버무린 대작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닮아 있어 당시 음악변방이었던 핀란드에서는 매우 쇼킹한 작품이었다. 이렇듯 핀란드의 떠오르는 음악신성은 그해 아름다운 여인 아이노 예르네펠트(Aino Järnefelt, 1871-1969)와 결혼에 골인한다. 시벨리우스는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핀란드의 대표음악가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특히 1899년(34세) 핀란드 애국주의를 표상하는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는 그를 핀란드의 영웅으로 만든다. 핀란디아는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구세주 같은 음악이었다. 연극 ‘역사적 정경’의 부수음악으로 작곡되어 이듬해(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핀란드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역사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벨리우스는 평생 일곱 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소나타 형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형식을 발전시켜 자신을 차별화시켰다. 마지막 7번 교향곡(1924년)은 단악장 형식으로 기존의 형식을 탈피했다. 아쉬운 점은 7번 교향곡을 작곡한 후 죽을 때까지 무려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8번 교향곡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국 독립(1917년) 이후 생활이 안정되어 창작욕구가 사라졌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준비하던 8번이 시대와 맞지 않아서 폐기해 버렸다는 설도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