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
유종인
그 싸하던 탄산 방울 허공에 풀어준 뒤
하릴없는 건들거림 줄곧 모로 눕는 노숙,
무심코 집어든 순간
한 하늘이 당겨 든다
반을 뚝 잘라서는 송곳으로 물구멍 내고
상추는 모종 내고 산세베리아 옮겨 심고
환생이 벌 것이더냐
마음자리 흙을 바꾼
현생이 메마르면 물 댈 일이 호수 같은 것
투명한 화분 너머로 트여가는 잔발의 뿌리
눈 호강 푸르른 페트병
윤회 분盆이라 불러다오
생활에서 발견하는 윤회와 환생
필자는 누구보다도 한 뜸 한 뜸 공들여 시에 수놓은 ‘풍족한 어휘의 힘’의 자장으로 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유종인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순우리말, 고어, 한자어, 세련된 현대어, 명명과 조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그만의 시로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예컨대, “수저통에 투호投壺처럼 꽂아넣”은 수저를 “찬란의 비철 난초”(「비철非鐵 난초」)라 읽을 때 그 비유에서 오는 언어 맛과 조어 능력은 우리의 일상에 생기를 돌게 한다, ‘지표면 가까이에서 부는 바람과 비교적 높은 상공에서 부는 바람이 서로 방향이 달라 발생하는 기류현상’ 용오름을 “시커멓게 몰려오는 바다 위 활빈당活貧黨들”, “난바다에 훤칠한 거사擧事”(「용오름」)로 느닷없이 툭, 잡아 호기를 부리는 언어의 미감은 또 어떤가.
최근 들어 유종인이 가장 빈도 높게 사용하는 시어는 ‘속종’(마음 속에 품은 소견), ‘다솜’(애틋하게 사랑함), ‘궂기다’(죽다), ‘어령칙하다’(기억 형상이 긴가민가 하다), ’철럼하다’(넘치도록 그득하다), ‘뫔’(몸과 마음), ‘재장구치다’(두번째로 마주쳐 만나다), ‘비다듬다’(자꾸 만져 가다듬다) 등의 순우리말인데, 이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말은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시인이 채택하고 있는 ‘뫔’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유종인은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사물과 정신을 분리하지 않는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오늘은 「페트병」이라는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싸하던 탄산 방울 허공에 풀어준 뒤”의 초장에서 우리는 마지막 한 방울 탄산수를 캬아, 소리내어 들이키고는 페트병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어느 몰지각한 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다시 작은 바람에도 건들거리거나 모로 누워 노숙을 하기도 한다니! 이 감칠맛 나는 묘사와 말부림, 유머와 능청을 보라. 그런데 어느 선한 손길이 “무심코 집어든 순간” 페트병은 “한 하늘을 당겨”드는(종장)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환생이 벌 것이더냐/마음자리 흙을 바꾼” 도치의 문장을 툭 던진다. 마침내 페트병의 마음자리는 ‘허공’에서 ‘흙’으로 채워진다.
시인은 생활로 그를 그러안으면서 ‘환생’을 살게 한다. ‘환생’이라는 무거운 말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렇다. 메마른 현생은 호수같이 물을 대어주어야 하고(둘째 수 초장), 그러다 보면 “잔발의 뿌리”도 트여간다.
이 푸르른 페트병을 시인은 특유의 명명 어법으로 “윤회 분盆이라 불러다오”라고 한다, 불교의 윤회라는 쉽지 않은 말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순간이다. 시인이 밝은 눈으로 골라 쓰는 ‘뫔’이라는 말이 ‘환생’, ‘윤회’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떨어진 복권 종이로 죽은 지네를 떠내어/베란다 창을 열고 너른 데로 하관할 때/따라지 종잇조각에 삽과 관棺이 겹쳤네”(「어떤 역전」)에서 떨어진 복권 종이가 어떤 생명의 편안한 죽음으로 이끄는 ‘삽과 관棺이’ 되는 경지와 같은 이치다. 이는 보이는 사물에 얽매였다면 결코 발견할 수도 내면화할 수도 없는 경지인데, 시인은 일상 속에서 어깨 힘 빼고 자연스레 저 너머의 세계로 육화한다.
유종인 시에서 오롯이 발견하는 기쁨은 “오지랖 넓”은 난향기가 “소파 다리도 향이” 돌게 하는 (「어떤 역전」) 이런 생기 같은 것이다.
유종인 시인 덕분에 산책길, 낮은 주택가 유리창에 봄 햇살을 받고 한껏 드리운 윤회와 환생을 오롯이 즐기는 나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