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 관가정을 지나 능선을 타고 오르면 회재 선생이 머문 영귀정(詠歸亭)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아래로 내려서면 1602년에 지은 회재의 셋째 손자 설천정(雪川亭) 이의활(李宜活,1573~1627)의 설천정사(雪川精舍)에 이른다. 이의활은 회재의 양자인 부친 이응인(李應仁)과 모친 옥산장씨(玉山張氏)의 아들로 태어나 광해군 2년 성균관에 입학, 2년 뒤 진사시에 합격, 함경도사·고령현감·흥해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1626년에 통훈대부 행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흥해군수 시절 선정을 베풀어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 진휼(賑恤)에 노력한 공이 있었다. 갈암 이현일은 묘표(墓表)에서 “이의활 공은 1610년 태학(太學)에 들어가 상사생(上舍生)이 되었다. 천거로 능서랑(陵署郞)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고령현감이 되었다. 후에 또 개령(開寧), 용담(龍潭) 두 고을을 다스렸다. 무오년(161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함경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謝恩肅拜)한 뒤에 공경 재신들에게 두루 인사를 다닐 때 한 권세 있는 집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 즉시 통자(通刺:명함을 내놓고 면회를 요청하던 일)를 하지 않자 노하여 하인을 시켜 잡아다 패고는 결국 그 주인을 만나지 아니하고 돌아왔으니,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였다. 공은 광해군 시대를 만나 비록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맡고 항상 봉록이 적은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큰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양좌동(良佐洞) 집의 서쪽에 건물을 지어 ‘설천정사(雪川精舍)’라 편액을 걸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라 하였다. 정사(精舍)는 학문 연구에 중점을 둔 공간으로 학사(學舍)를 말한다. 연일현감을 지낸 대산 이상정은 금와(禁窩) 이헌국(李憲國,1703~1776)을 ‘설천정 주인’이라 칭하며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었다. 이헌국은 이의활의 5대손으로 고조부 참봉 이환(李皖), 증조부 동몽교환 이현(李垷), 조부 이덕순(李德純)의 가계를 이룬다. 부친은 이징중(李徵中), 모친은 전주최씨 최두령(崔斗齡)의 따님이며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 이정택(李鼎宅)은 가학을 이어 이름을 떨쳤고, 백불암 최흥원이 크게 칭송하였으며, 활산 남용만의 만사를 지었다. 둘째 이정우(李鼎宇)는 진사급제를, 셋째 설남(雪南) 이정익(李鼎翊)은 이헌선(李憲先)의 양자로 갔고, 넷째가 이정인(李鼎寅)이다. 훗날 막내 이정인이 부친의 묘갈명을 풍산유씨 임여재(臨汝齋) 유규(柳氵+奎 ,1730~1808)에게 부탁하였고,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1725~1789) 등 여러 문인이 제문 등을 지었다. 유규는 유성룡의 6대손으로 병산서원에 수학하며 과거를 멀리하고 하회에서 처사문인으로 살며 후학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1713~1782) 등과 교유하였고,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1763~1837) 등 이름난 후손이 있다. 설천정사는 이의활의 강학공간으로 대대로 계승되어 이헌국에 이르렀고, 문인들이 자주 찾기에 이른다. 양동마을의 설천정이 갖는 의미와 인물에 따른 상징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옛 자료발굴로 경주의 조선스토리가 풍성해지길 희망한다.금옹 이 공 묘갈명 병서(禁翁李公墓碣銘 幷序) - 임여재 유규 남쪽의 사우(士友)들이 동도에서 돌아와 모두 이 공의 어짊을 칭송하였다. 나 역시 덕스러운 기우(基宇)를 한번 보았지만 아쉽게도 재회하지는 못하였었다. 이에 공의 대를 이을 아들 이정인(李鼎寅) 군이 그의 조카 이일상(李馹祥,1724~1799)을 보내 나[유규]에게 묘갈문을 부탁하였다. … 이헌국 공은 자가 만포(萬甫), 본관은 여강(驪江)이다. 7세조 문원공 회재 선생 … 5세조 이의활은 잇달아 대소과에 합격하여 네 고을을 차례로 맡았지만, 광해군 년간 벼슬에 마음에 없어 설천(雪川) 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설천옹이라 하였다. 어려서 자질이 기이하였고 7세에 고아가 되어 백부에게 수학하였으며, 부모가 없는데도 더욱 독서하여 공부가 나날이 성취하였다. 장성해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경전(經傳)과 자서(子書) 그리고 선현이 남긴 문집을 구해 큰 뜻을 통달하였고, 따다 쓰는 것에 일삼지 않았다. 평소에 의관을 정돈하고 종일 단정히 앉았으며, 겉치레의 말과 잡다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 종족 백 여 집안이 한 마을에 살며 매번 문중 모임에서 선인의 가르침을 가르쳐 골육의 정을 이었다. 과실을 살피어 바로 잡지 않음이 없었고, 가혹하거나 심한 말을 하지 않고 이 말씀으로 시비를 논하였으며, 집안일의 거취 모두 공에게서 결정되었다.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 대산 이상정(1711~1781), 매헌(梅軒) 정욱(鄭煜,1708~1770)과 좋은 벗이었다. 운감(雲龕) 이명천(李命天)은 공의 예학이 고명하고 품성이 강직함을 크게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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