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떠나셨다. 병원에서 마지막 한 숨까지 다 털어내시고 떠나셨다. 반백의 나이로 나이 많은 부모를 둔 막내딸로 나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처음 치매 판정을 받았을 때 심장이 “쿵”했고, 증세가 심해지셔서 요양원으로 옮기셔야 했을 때 또 “쿵”, 요양원에서는 더이상 감당이 안 된다며 요양병원으로 옮기셔야 했을 때 “쿠쿵”했다. 그것이 작년 5월이었고, 해를 넘기고 올해 1월, 아빠는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시고 떠나셨다.
1930년대에 가난한 집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아 군대도 못 들어가고, 1970년대부터 아버지는 군대미필자로 평생 차별을 받으셨다. 돈을 벌기 위해, 생계를 위해 육지로 나와 감자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을 때부터 평생 감자를 드시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감자채볶음을 성인이 되어 식당 반찬으로 처음 접했다.
아줌마가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어서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빠 키는 175로, 동년배들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아빠가 농담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결혼사진 속 아빠도 키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아빠와 엄마는 당시에 비하면 늦은 나이(이십 대 중후반)에 결혼을 하셨고, 아빠는 이십 대 초반이 지날 무렵에야, 한때는 너무 작아서 군용트럭도 못 올라갔다는 말을 도저히 믿기 힘든 키로 자란 것이다. 군대 이야기와 감자를 싫어하시는 아빠는 무일푼으로 결혼을 하셨지만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해주시지는 않았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셨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도 뛰어나셨던 아빠는, 자식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신다고 그러셨는지 온몸의 근육이 다 빠지고 마지막 한 호흡이 남는 순간까지 버티시다가 가셨다.
코로나 시국에 병문안이 쉽지 않았던 시절 유리 건너에서 본 아빠는, 막내딸은 잊었지만 손주들을 보고는 환하게 웃어주셨고, 휠체어를 타고 온 어떤 날 오랜만에 안아본 아빠의 체격은 뼈가 고스란히 드러났으며 눈동자의 활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본 아빠는 생기를 잃은 몸으로 가만히 침대에 누워 계셨다. 면회를 하는 날이면 언제나 “다시 올게,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 아빠 사랑해.”라고 말했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빠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아빠, 지금까지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무 힘들면 가도 돼. 꼭 내가 아는 인연으로 다시 와. 내 손주는 너무 오래 걸리니까, 내가 좋아하는 이웃이든, 지인이든 어디로든 빨리 와. 기다릴게, 사랑해”그리곤 아빠가 떠나셨다. 부고를 전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있었지만, 뒤늦게 연락한 친구가 있었다. 삼십 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 절친한 친구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남자사람친구’였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보낸 친구였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같잖은 위로를 했었다는 것을, 내 아버지를 보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반백이 되어 아빠를 보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 친구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 친구에게 연락한다는 것은 같잖은 위로를 보냈던 과거의 나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기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뒤늦은 사과를 전했다. 친구는 뒤늦은 사과에 “우리 둘 다 어렸잖아”라며 웃음으로 답한다. 참 멋진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과 이 녀석이 나보다 그릇이 크구나 싶었다.
아빠의 부고는 이렇게 부족했던 딸의 과거를 청산하게 했고 알고 있던 친구의 멋스러움도 알게 했다. 아빠가 부족한 막내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가르침일까?입관을 하고 화장을 하고 발인을 하고, 장지에 모시고… 입관을 하는 순간부터 입에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은 걱정했지만, 아줌마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래봤자 얼마나 가겠냐고, 배고프면 먹겠지 싶었다. 밥맛이 없는 게 아니라 배고픔이 없었다. 아빠는 돌아가셨지만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줌마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빠가 떠나셨는데 고작 오일장 치르고 집에 와서 일상을 살아간다. 아빠가 치매를 앓으신 이후, 매년 사진을 찍었던 것이 추억으로 남았다. 결혼 4년 만에 쌍둥이를 낳았을 때 아빠는 엄청 좋아하셨다. 3년 뒤에 막내를 가졌을 때 아빠는 “네가 올해 한 일 중에 제일 잘했다”고 하셨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드문드문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시간이 흘러야 하리라. 그러나 아줌마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된다고 눈물이 마를지언정 아빠의 부재가 덤덤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