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음악의 거장은 단연 노르웨이의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라 할 수 있다. 그는 스코틀랜드계 혈통으로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15살 때(1858년)에는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 명문인 독일의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게 된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던 해에 그리그는 클라라가 연주하는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피아노협주곡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너무 멋진 작품이었기에 어린 그리그에겐 그가 추구하려는 작품의 지향점이 되었고, 음악원 수학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훗날 그리그가 로마에서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를 만났을 때, 리스트는 그리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피아노협주곡을 써보도록 권유했다. 그래서 나온 곡이 1868년 오슬로에서 초연된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이다. 슈만과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은 묘하게 닮아 있다. 일단 그들의 유일한 피아노협주곡이다. 그리고 그들이 신혼 때 작곡했다. 슈만의 피아노협주곡(1845)은 클라라와 결혼(1840)한 후 5년 후에 나온 작품이고,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은 사촌동생인 니나와 결혼(1867)한 이듬해에 나온 작품이다. 조성(a단조)도 같고, 분위기도 비슷하여 두 작품은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다. 노르웨이 민속음악까지 수용한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은 대성공을 거둔다. 슈만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리그는 이를 독창적으로 소화한 것이다. 그리그에게 피아노협주곡을 권유했던 리스트는 이 작품을 ‘스칸디나비아의 혼’이라고 하면서 극찬했다. 오늘날 자주 무대에 오르는 피아노협주곡 중의 하나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리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페르 귄트(Peer Gynt)’다. 이 작품은 1874년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이 그의 희곡 ‘페르 귄트’에 들어갈 연주용 부수음악 작곡을 그리그에게 의뢰하면서 만들어 진 것이다. 희곡 내용은 이렇다.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며 놀기 좋아하는 페르 귄트는 솔베이지와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솔베이지를 버려둔 채 배타고 장사하러 떠나면서 고난을 겪는다. 결국 큰돈을 벌어서 배를 타고 귀향하려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쓸쓸히 집에 돌아온 페르 귄트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편하게 잠든다. 그리그의 부수음악이 곁들여지고, 노르웨이의 천재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포스터를 그려 참여한 대작 연극 ‘페르 귄트’는 대성공이었다. 그리그는 1876년 ‘페르 귄트’의 부수음악을 각각 4개의 곡으로 구성된 2개의 모음곡으로 만들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을 고르라면 두 번째 모음곡의 마지막 곡인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가 아닐까싶다. 북유럽의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리그는 1907년 고향 베르겐에서 사망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를 국장으로 예우했고, 그의 시신은 화장된 후 그가 그리워한 어느 피오르의 바위동굴에 안치되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그리그의 후손이다. 글렌 굴드의 외증조부의 사촌이 바로 그리그이다. 그리그가 노르웨이의 쇼팽이라 불린 만큼 피아노에 조예가 깊은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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