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민병도 어머니는 칠십 평생 흙을 파며 사셨다 손에 흙이 묻어야 목에 밥이 넘어간다며 날마다 빈들을 깨워 온 몸으로 안았다 원하는 3할 치는 밥을 주고 꽃을 주던 세상과의 이별을 위해 어머니가 흙을 놓자 가만히 흙이 다가와 긴 노고를 감싸주었다 언제나 땀에 젖어 하나도 젖지 않은 누군가의 몸이었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흙이여 너의 몸에선 어머니의 살내가 난다 흙의 몸에서 맡는 어머니 살내 시인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조를 제법 많이 창작했다. 그가 묘사하는 대상인 어머니, 아버지는 개인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당시를 살았던 모든 부모의 전형성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이 시조를 다루기 앞서 먼저 만년의 아버지가 나오는「낭패」를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아들 손을 잡고 뒷간을 가던 아버지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오줌을 지린 뒤, 그 모습을 자식 앞에 보인 극에 달한 낭패감과 치욕의 표정, 그것을 알아차린 자식은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침묵의 순간”으로 얼어붙는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아버지의 심리다. “깨진 알이 흐르듯 신발에 고인 바다/드센 풍랑에도 바람 올올 무지개 걸던/아버지 섬으로 서서 내 손 가만 놓았다(「낭패」둘째 수)” “깨진 알이 흐르듯 신발에 고인 바다”는 묘사가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오줌 방울은 마치 구슬같이, 깨진 알 같이 빛나며 흘러 신발에 그득 고인다. 그걸 시인은 “신발에 고인 바다”라는 범상치 않은 구절로 표현한다. 그것은 바로 중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물결이 일렁이는 풍파의 세월에도 너끈히 해결했던 당신의 강단(“드센 풍랑에도 바람 올올 무지개 걸던”)을 표현하려는 전략이다.  그런 당신의 자존이 신발이라는 공간 안에 그 바다를 다 쏟아버릴 정도로 위축되었으니 그런 치욕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아버지는 이제 천애의 “섬으로 서서 내 손 가만 놓”고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정의 고갱이가 빛나는 미적 형식과 자존심 강한 이 땅 우리 아버지의 생, 그것을 지켜보는 자식의 마음이 트라이앵글로 어우러진 가작이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시편 중의 하나가 오늘 언급할 「흙」이다. 어머니의 일생을 다룬 민병도의 「흙」은 우리 시조가 성취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거느리고 있어 각별히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바로 바슐라르의 ‘지수화풍’ 4원소론에도 나오는 그 ‘흙’이며, 근원적으로는 가이아를 비롯한 대지모신大地母神으로 기능하는 ‘어머니 흙’의 형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둘째 수 종장을 기점으로 어머니와 흙의 역할이 바뀐다. “칠십 평생 흙을 파며 사”시고 “손에 흙이 묻어야 목에 밥이 넘어간다”시던 어머니는 외견상 억센 노동을 하는 농촌 아낙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첫째 수 종장 “날마다 빈들을 깨워 온 몸으로 안았다”에 이르면 어머니는 자상하고도 자애로운 ‘땅의 어머니 신’의 모습을 띤다. 어머니는 나날의 삶을 농사꾼으로서가 아니라 땅을 품어 안은 신의 품성과 자세로 살아오신 것이다.  둘째 수 “원하는 3할 치는 밥을 주고 꽃을 주던”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와 순리, 나아가 노동이 주는 일상적 양식(밥)과 소슬한 정신적 양식(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생을 다하고 어머니가 흙을 놓는 순간은 바로 죽음의 시간이며, 그것은 빈들을 깨웠던 어머니의 역할이 “가만히 다가와 긴 노고를 감싸주”는 흙, 대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셋째 수는 놀랍게도 어머니와 흙이 완전동체임을 보여준다. “언제나 땀에 젖어 하나도 젖지 않은”의 신비를 보라. 흙은 어머니이기에 땀에 젖어 있고, 대지모신이기에 젖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불이(不二)이다. 시인이 혜안은 “누군가의 몸이었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흙을 보고 냄새 맡는다.  그러면서 나직이 속삭인다. “흙이여 너의 몸에선 어머니의 살내가 난다”라고. 놀라워라.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 눈앞에 ‘흙’으로 살아계신 것이다. 민병도의 몇 편으로 한국 현대 시조단은 시조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을 많이 넓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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