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덕발행인 만난 사람]
황금들녘의 풍요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연말의 들뜬 마음을 더욱 바쁘게 재촉한다.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보람되게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추수가 끝난 가을들녘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요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천북면 화산리로 향했다. 화산리 입구에 위치한 경주학생예술체험관은 예전의 학교전경과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도 간 곳 없고 조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는 길이 꽤 멀지요”라며 반갑게 맞이하는 서각가 구봉(丘峯)김진석(57)선생의 순박한 미소에 잠시 그간의 여정과 공허한 마음도 잊게 되었다. “길은 좀 멀어도 조용하고 공기도 맑아 시내하고는 분위기 조금 다르고 생활하기에는 좋다.” “매일 다녀서 그런지 멀지는 않더라.”라며 이곳 생활을 들려주었다. 여기 경주학생예술체험학교에서 지도강사로 지내면서 왕성한 작업활동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조금은 생소한 서각가라는 길을 걸어 온지도 2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각의 깊이를 모르겠다.”며 너털웃음을 띄는 선생의 모습에서 그간 어렵게 지켜온 서각가의 길을 조금 이나마 짐작할 것 같았다. 서각이라는 것이 오래된 고찰이나 한옥의 입구에 새겨진 현판 정도로 알고 있는 게 일반의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각으로 표현하는 종류나 기법으로 나누더라도 그 분야가 다양하다고 한다. “서각은 단어 자체로 풀이하면 글을 새긴다는 뜻이지만 바위에 새기는 암각, 인장에 쓰인 전각, 그림을 새긴 화각 등 그 쓰임새나 표현하는 대상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데 총칭해서 서각이라고 합니다.” 라며 서각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선생은 옅은 미소로 설명해 주었다. “아주 오래전 선사시대 때부터 인류는 바위에 그들의 생활을 그림으로 남겨놓은 갑골문자나 암각화에서부터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의 팔만대장경, 조선시대의 사찰이나 고택의 현판, 주련 등에서 우리민족의 우수한 서각작품들을 보면 지금의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했다. 서각은 옛 성현의 글을 집자하여 수령이 오래된 나무에 새겨 채색하는 전통서각과 갑골문, 문양, 그림을 회화적으로 표현하여 합성수지, 종이, 나무에 유성・수성물감이나 금・은・동분을 섞어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현대서각으로 나뉘고 양각, 음각, 음평각, 음양각 등의 기법으로 표현한다. 가까이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과거부터 서각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높아 현재에는 대중적인 인기와 각광을 받지만, 국내에서는 과거 사대부로 대표되는 신분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 일제 강점기에 거의 사라졌다가 근래에 와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전이나 공모전에서 조차 서예의 한 부분으로 있다가 불과 4~5년 전부터 독립한 것을 보더라도 서각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이지 않다.” 서각을 20여 년 동안하면서도 작품이 총 300점도 안되는 것을 보면 선생의 고집스런 집념과 작가정신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증조부 때부터 석장동에서 터전을 잡으면서 지금껏 고향을 지키고 있는 구봉선생의 서각과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취미로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1970년 군제대후 입사한 철도청 근무시절 손재주가 좋아 취미로 나무를 만지면서 나무만이 가지고 있는 오묘한 빛깔과 무늬, 특유한 향에 매료되어 1980년에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서각을 전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서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전각으로 유명한 석촌 선생과 화전 윤병희(64)선생으로부터 서각과 서예의 기초를 배우고 서각에 대한 인식이나 이론적 정립이 안 된 것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각종 서각전시회나 서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배움에 끝이 없듯 모르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끈질기게 매달려서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한 당시의 열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직도 궁금하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렇지만 홀로 걸어온 길이 멀고 험하듯 한번 작품에 들어가면 식음을 전폐하고 몰입하지만 작품하나를 탄생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족하는 작품이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른 이에게 내놓을 만한 작품을 만든 것도 불과 6~7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겸손함도 잊지 않았다.
“백년 이상된 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다.”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를 찾거나 만드는 것도 작품의 과정이다.”는 선생의 말에서 예술가의 집념과 작품에 대한 남다른 경외심을 느끼신다는 말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작품으로 사용되는 나무는 기목나무, 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모두 작품의 소재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선생의 각고의 노력이 있어 대한민국 서화예술대전 최우수상, 국제 예술문화상, 중화민국 수목예술학회 감사장 등 다수의 수상경력과 대한민국 서화예술대전 운영위원, (사)한국서화협회 부회장, 경주서각가회회장 등 다양한 예술 활동. 그리고 한・중・일 교류전과 서각가협회 그룹전, 개인전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달마를 모티브로 한 달마도의 변천과정을 다양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실 한쪽에는 많은 습작의 흔적과 여기저기의 빈 소주병들로 고뇌의 흔적도 같이 볼 수 있었고 그간의 작업 중에 탄생한 아끼는 작품들도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매번 마음가짐도 새롭고 그때그때 만들어 지는 채색들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 같다.”고 금분, 은분, 동분으로 5색을 표현한다는 구봉선생 자신만의 비법도 자연에서부터 온 거라고 했다.
선생은 서각에 관한 활동뿐만 아니라 95년부터 법무부보호관찰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순간의 실수로 범죄가가 된 청소년들을 다시 사회와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우리사회가 좀더 관심을 갖고 같이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는 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강사생활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제 서각을 배우는 학생들의 소망, 행복, 사랑 등의 문구가 새겨진 작품들을 보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학이 되어서인지 요즘은 한가하지만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면 마음이 늘 맑아지는 것 같아 좋다.”며 작품의 소재를 찾는데도 아이들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아직은 대학에서 서각을 가르치는 정규과정이 없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대학에서도 서각과가 생기지 않을까. “지금 이 아이들 중에 교수도 나와 교단에서 가르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소망과 서각의 위상이 지금보다 한층 높아지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라며 선생의 제자사랑을 엿볼 수 있다.
주말이면 각처에서 30여명의 문하생들이 찾아와 며칠씩 기거하며 선생에게 사사 받고 있지만 좀더 끈기 있게 서각을 배우려는 젊은 제자들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도 서각에 대한 관심과 서각을 하는 작가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며 서예를 하는 작가들이 서예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이를 서각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 배우려는 이들이 많은 것은 서각의 미래를 밝게 한다.
선생은 부인 송원태(50)여사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부인은 ‘온방골순두부’를 경영하고 있는데 늘 부인에게 미안함이 앞선다고 했다. “호롱불 밑에서 지금의 집사람과 맞선을 보고 한 달 만에 장가를 간 것을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부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에도 못내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해 부인과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지만 한번도 ‘서각가의 길’을 후회해 보지는 않았다는 말에서 선생의 서각에 대한 고집과 예술가의 집념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에 충분했다.
돌아오는 동안 낮은 봉우리를 뜻하는 구봉(丘峯)이라는 선생의 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서 타인을 높이는 선생의 마음이 결코 낮은 봉우리가 아닌 우뚝선 높고 큰 봉우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학력 : 나원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로 중・고등을 졸업. 대구대학교 미술교육원 최고경영자1년 과정 수료
(정리 이종협 기자) 사진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