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새해가 되면 새 희망을 품고 동해의 일출을 보기위해 길을 나선다. 그 가운데 경주시 감포는 일출로 유명해 해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인파가 몰린다.
필자는 장항에서 옛 도로를 따라 전촌 솔밭을 지나며 비로소 동해바다가 가까워짐을 느낀다. 이곳에서 바닷가로 접어들면 장진항의 구멍바위 공암(孔巖)을 볼 수 있고, 내륙으로 들어서면 애써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감포읍 전촌리 328 호동마을의 효자 정려각이 나타난다. 작고 초라한 담장과 비각이 지난 세월의 무심함을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효도는 자식이 부모에게 공경하고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하며 예나지금이나 인간의 기본도리 가운데 먼저 행해야할 행실이다.
조정에서는 예조를 통해 효자(孝子)ㆍ순손(順孫)ㆍ절부(節婦) 등을 찾아내어 민심을 장려하였다. 이에 필자는 효도의 참된 의미를 통해 부모자식 간에 각박해진 현대인의 헝클어진 마음을 품어줄 경주지역에 전하는 그리 멀지 않은 효자이야기로 『경주의 조선스토리』를 시작하려 한다.
영일정씨 정돈익(鄭敦翼)은 포은 정몽주의 16세손으로 조선말의 인물이다. 『경주시지(慶州市誌)』에 실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남의 일을 잘 도왔고,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였다. 여름이면 부모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겨울이면 자기 몸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드렸다. 엄동설한에도 자신은 누더기 옷을 입어도 부모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는 등 효자였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갑자기 앓아눕자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밤이면 뜰 가운데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 혼수상태에 이르자 정돈익은 자신의 왼쪽 무명지를 깨물어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러 넣었고, 이로 인해 신기한 효험이 일어나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았다. 이에 아버지가 몇 달을 더 살다가 돌아가시니 정돈익은 피를 토하며 울었다.
이후 3년을 시묘하였고 무덤 옆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지어 상에 올렸고, 추운 겨울에도 홑 상복을 입고 묘소에 엎드려 곡하였다. 이때 산속의 호랑이가 나타나 무덤을 배회하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니 산신령도 감동하여 그리한 것이라 믿었다. 이에 소문이 전해져 1881년에 나라에서 곡식과 비단이 상으로 내려지고 그의 효행을 기려 표창하고 비각이 세워졌다”라 전한다.
여강이씨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1804∼1892)은 조부 설남(雪南) 이정익(李鼎翊,1734~1793), 부친 치암(恥庵) 이악상(李岳祥,1763~1829)의 가계를 이루며, 고종 8년(1871)에 특채로 선공감가감역에 제수되었다. 이후 1875년 용양위부호군, 돈녕부도정을 거쳐 용양위호군, 동지돈녕부사가 되었으며 말년에는 도산(陶山), 청량산(淸凉山), 병산(屛山), 하회(河回) 등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퇴계의 연원을 쫓았다. 그는 여러 정려의 이야기를 발굴해 기록으로 남겼고 그의 문집은 경주시 지역학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여 병을 낫게 하는 단지(斷指)의 행위는 팜으로 어려우면서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일화로 유명하다.
정효자정려비각(鄭孝子旌閭碑銘) - 내헌 이재영
효자는 성품이 빼어나지만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맹종(孟宗)의 죽순이 겨울철에 생겨나고, 채옹(蔡邕)의 시묘살이에 토끼가 길들여짐이 지극한 정성의 감응이 아니면 그러하겠는가? 고을의 동해현(東海縣) 전동리(典洞里)에 효자 정돈익(鄭敦翼)이 있으니 그는 포은 선생의 16세손이다.
성품이 효도에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비범하였는데 맛난 과일을 얻으면 먼저 먹지 않았다. 손수 농사를 지었고, 물고기 잡고 땔감 하는 일로 봉양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이바지하였는데 일찍이 모자라거나 끊어진 적이 없었다.
추울 때는 땔감으로 따뜻이 하고, 더울 때는 부채로 시원하게 해드렸다. 부모가 병들면 단지(斷指)하여 회춘하게 하여 몇 년을 강녕(康寧)하였고, 노환으로 병석에 오래 누우면 똥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니 타고난 수명도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이리와 호랑이가 울어대는 시묘살이에 낮밤으로 울고 곡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나무꾼도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였다. … 순종이 승하하자 시마복(緦麻服)을 3년 입었고, 헌종이 승하하자 스스로 토역(土役)을 짊어졌으니 충효가 일치하는 마음을 이에 볼만하다.
효자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고을사람이 그의 행실을 가상히 여겨 관아에 보고하였으니 거의 기묘년(1879) 일이었고, 그의 손자 정우용(鄭宇鎔)이 사실을 갖추어 세 차례 아뢰어 지금 고종 신사년(1881)에 특명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표창되어 부역이 면제되었으니 조정에서 효를 장려함 역시 이미 지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