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을 떠난 해외에서 살다 보면 모국에 대한 모든 것들이 그립고 또 아쉽다. 한국이 좋은 것도 있고 영국이 좋은 것이 있다. 그래서 오래 살다 보면 여기가 이제 나의 삶에 익숙한 내 거처인 듯싶다가 또 더러는 ‘아 역시 이곳은 타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태어난 고향에서 일생을 살면서 삶을 마감하는 평생지기 고향을 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학업, 부모의 이직, 결혼, 사업 등 여러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그래서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는 말을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향이니, 모국이니, 동향이니, 동문이니 하는 말들은 가만히 보면 공동체의 성향을 두고 구분하는 내적 결속이나 정서적 유대로 만들어진 말들이다. 즉 사람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서로 비슷한 어떤 것들이 매개체가 되어 정, 우정, 사랑,관심 등을 공유하는 정서인 것이다. 흔히 한국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 할 때 ‘정’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에 동갑네기 교포 지인 두 명이 필자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왔다. 저녁을 먹고 가볍게 반주도 한 잔 곁들인 식사 말미에 동석했다. 고등시절 수학여행, 두발 자율화, 학력고사, 체력장, 마지막 교복세대,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대의 아픔, 맥줏집 등 대부분 지난 시절 청춘 때 겪었던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현실적인 지금의 이야기 보다 오래전 추억담들을 꺼내어 이야기하는 게 더 재미있다.
그러다 갑자기 수학여행 이야기에서 경주가 화두에 올랐다. K씨, P씨 두 분은 서울 출신이었다. 그 당시 전국의 대부분 고등학교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오던 시절이라, 이 두 분도 당연히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것이다. 게다가 K씨는 신혼여행까지 경주로 왔으니 경주에 대한 추억담이 얼마나 많았을까. K씨는 경주로 수학여행 온 시기가 1981년, 고교 2학년 때였는데, 그때 나는 경주고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81년에 우리는 이미 몇 날을 경주 땅과 하늘 아래 같이 있었네요!” 하면서 이야기는 더 깊어졌다.
그런데 이분의 경주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던지, 경주 수학여행 당시 토함산 정상과 대왕암까지 갔던 추억들을 풀어 놓았다. 나는 대왕암과 감은사의 관계 등 문무대왕의 이야기를 해드렸다. K씨는 불국사에서 숙박한 것 같고, P씨는 경주시내에서 숙박했단다. 경주사람인 나는 마침 초등 6학년 때 향토사학자 윤경렬 선생님의 ‘향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 그때 배운 지식을 동원해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여기서 내가 주목을 하는 한 가지 사실은 K씨의 ‘토함산 과 대왕암’이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수학여행 온 고교 2년 전교생들을 데리고 ‘토함산’ 정상에 올라가고 ‘대왕암’까지 갔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어느 분이셨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역사관’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역사 도시 경주의 진가를 알고 계셨던 노교사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천년고도 경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고교 시절 접한 역사관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말이다. 아마도 당시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경주가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두 분과 나는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이다. 추억도 아날로그이고 정서도 아날로그이다. 아날로그의 특징은 울림이 깊고 파장이 길고 오래 간다는 것이다. 경주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정서를 가진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와 여자, 청춘시절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두어 자락 추억의 사진 속에 간직한 소중한 도시이다. 기차, 교복, 경주역, 관광버스, 박물관, 커다란 봉우리의 능들, 불국사, 친구들과의 수다, 우정, 사랑 그리고 여러 추억들…, 이 모든 것들을 아날로그적 보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결론은, P씨가 내년 봄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고교 친구 부부와 함께 경주를 다시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경주는 지금 어떨까요?” 나는 대답했다. “아마 그때보다 많이 세련되어서 더 편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추억을 바꿀 만한 것은 변치 않고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7080이 과연 음악에만 있을까? 경주는 우리 모두의 708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