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는 역사적 자료의 준말로서 역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단서가 되는 모든 자료를 의미한다. 종이에 문자로 적어진 문헌이나, 고고학 상의 유구 · 유물 · 유적, 이미지 사료가 되는 회화, 사진, 구술 역사(oral history), 전승 등을 포함한다. 거기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났던 때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는가의 여부에 따라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된다.
1차 사료는 그 안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유물이나 쓰여진 저작물을 가리킨다. 2차 사료는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났던 시기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자료이다. 1차 사료에 대한 설명이나 판단, 견해, 의견 등이 담겨있는 자료가 2차 사료이다.
이곳 신선사 석굴 남면 바위 면에 새겨진 조상명기의 경우 1차 사료가 되겠다. 그러나 이끼 등이 두껍게 덮여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려워 전면적인 조사를 할 수 없었다. 그후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삼산오악조사단 황수영 등에 의해서 그 모습이 일부 밝혀지기는 했으나 마멸 등으로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에 있는 단석산신선사조상명기에 의하면 세로 20행, 매 행 19자로 되어 있다. 그중 2백여 자가 현재까지 판독되고 있다. 이에 사명(寺名)뿐 아니라 주존 불상의 존명을 알 수 있었다. 절 이름은 “인령허명신선사(因靈虛名神仙寺)”라고 명기되어 있고, 불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작미륵석상일구 고삼장 보살2구(作彌勒石像一軀 高三丈 菩薩二軀)”라 하여 절 이름은 신선사이고, 주실에 봉안된 불상이 미륵삼존으로서 고신라에서 조성된 최대의 불상군임을 알 수 있었다. 현재 판독되고 있는 명문에는 조성연대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신선사는 본래 자연적인 석굴을 이용하여 석굴법당을 만들고 불보살상을 봉안하였는데 이들 불상의 조성연대는 주존불의 둥근 동안(童顔)과 수인(手印)이 통인(通印)이고, 고졸한 조각기법과 통견대의(通肩大衣) 양식 등으로 보아 삼국 말 6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주존인 미륵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의 양식에서 고신라의 가장 초기작품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명문의 문체 등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석굴이 처음 조성된 것은 인도로 총 1200여 기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900여기가 불교 굴로 특히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이 유명하다. 인도 석굴은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와서 돈황석굴·용문석굴·운강석굴 등에서 그 진수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인도를 찾고 10여 차례에 걸쳐 중국 불교유적을 답사하면서 이들 석굴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패키지 여행이라 관광에 그쳐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언젠가 자유로이 이들 석굴을 찬찬히 둘러보고 싶지만 그럴 기회를 찾기 힘들 것 같다. 나이 탓?
우리나라에도 석굴을 조성하였으나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경주 남산 불곡과 같은 불감형식, 군위 삼존 석굴이나 골굴사 석굴처럼 인공이 가해진 석굴, 토함산 석굴암이나 충주 미륵대원 석굴 같은 축조 석굴 등이 있다. 신선사 석굴은 삼면이 암벽으로 지붕만 덮은 형식으로 앞의 세 가지 유형과는 차이가 있다. 답사를 마치고 하산하는 길 겨울 날씨답지 않게 햇살이 따습다.
알베르 까뮈가 이런 말을 했다. ‘햇살을 받으며 사는 사람의 삶은 실패하지 않는다.’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황수영은 6세기 말 또는 7세기 초, 문명대는 7세기 1/4분기, 김리나는 7세기 전반에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