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의 글을 우연히 보다가 경주의 수많은 급제자 가운데 경주이씨 이종의(李從義)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종의는 증조부 이천주(李天柱), 조부 이복규(李復圭), 부친 이흥조(李興祖)의 가계를 이룬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고 다만 ‘토산에 살았고, 실화(失火)로 부부 모두 죽었다. 갑보(甲譜)에 수록되지 않았다(寓居兎山 失火夫婦俱歿 甲譜不錄).’라며 대동보 족보 외에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경주이씨는 신라의 6촌 중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이었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며, 그는 고려 충렬왕 때 1295년에 진사시에 급제한 이암(怡庵) 이관(李琯)의 후손이다. 화계 류의건은 경주인 이종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종의(李從義)는 경주사람으로 세종년간 영락(永樂) 21년 계묘년(1423)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금부터 328년이 된다. 홍패(紅牌)와 임금의 물음에 대답한 시권(試卷) 모두 남아있는데 국초(國初)의 옛 물건이다. 지금까지도 완연하여 옛사람을 앞에서 마주하는 듯하다. 다만 『동경지』 과목문(科目門)에 실리지 않았으니 아마도 자손이 미천하여 향당에 알려지지 않아 사라진 것이 아니겠는가? 애오라지 졸구(拙句)로 감회를 부치다(李從義慶州人 登世宗朝癸卯榜文科 卽永樂二十一年也 於今爲三百二十八年 紅牌及廷對試卷俱存 國初舊物 至今宛然 如對昔人面目 但不載東京志科目門 豈以子孫微賤 不爲鄕黨所知而泯沒歟 聊以拙句寓感).임금의 홍패에는 여전히 묵화(墨花)가 남아있고恩牌尙帶墨花凝급제한 시권(試卷)은 일찍이 임금께서 살펴보셨네 試卷曾經御覽登질박 정직하게 마주한 말씀은 꾸밈이 없고 質直對言無巧餙존엄한 성현의 가르침을 친히 받았다네 尊嚴聖策若親承당시의 과거급제를 지금에야 기록하니 當旹科甲今猶記선배의 문장이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先輩文章此足徵세속에 매몰된 지 오래되어 애석하고 可惜塵埃埋沒久모퉁이를 향해 눈물 흘리는 후손이 있다네 向隅呼泣有雲仍 합격증서인 홍패에는 아직도 먹의 빛깔이 여전하고, 급제한 시험의 시제는 책문(策問):천도감응지리(天道感應之理)였다. 세종 5년 계묘(1423) 3월 23일에 시관(試官)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이원(李原) 등이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두 번째 단계로 보는 회시(會試)에서 울산 교도(敎導:선생) 이종의 등 33인을 뽑았다. 하지만 『동경지』에 그의 급제 이력이 빠졌다고 이야기하니 그 이유에 대해 더욱 궁금증이 생긴다. 화계는 후손의 신분과 지위가 낮거나 하찮은 것을 이유로 글이 실리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면서도 명백히 그가 급제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에 대해 후손의 마음은 향우지탄(向隅之歎)처럼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해 한탄하였을 것이다. 드러난 공적의 행실은 드물지만, 세종 14년 1432년에 도덕적으로 어긋난 행동의 자손이 과거응시에 금지하는 것에 대해 상소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고, 인재를 얻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우선 선거(選擧)에 있는 것입니다. 조선에서도 삼대의 빈흥(賓興)의 도를 조술(祖述)하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과거 제도를 참작하여 과목(科目)을 설정(設定)해서 그 재예(才藝)를 시험하고, 삼관을 설립해서 그들의 마음과 행동과 가문(家門)의 계통을 조사하는 것은 한 시대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한 세대의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라며 신분의 정통성과 부녀자의 도리 그리고 부도덕한 가문의 후손은 응당 과거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주이씨 이종의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울산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실록에 그의 상소문이 남아있다. 300여년이 지나 내남의 선비 화계 류의건이 그에 대해 소회하였으니, 그 이유 역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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