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자크(A.Dvorak/1841-1904)는 프라하 인근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도축업자였다. 덕분에 드보르자크는 10대에 도축업 자격증을 따게 되는데, 아마 세계적인 음악가 중에서 가장 별난 자격증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당시 도축업자은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드보르자크는 이를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선택한다.
드보르자크는 20대 중반에 프라하 국립극장의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게 된다. 당시 이 극장의 지휘자는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성공시킨 스메타나였다. 스메타나는 재능 있는 동향 후배인 드보르자크에게 작곡을 권유한다. 30대에 들어선 드보르자크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레슨 제자인 요제피나 체르마코바였다. 하지만 마치 모차르트처럼, 결혼은 오제피나의 동생인 안나와 하게 된다. 1873년 32살 때의 일이다. 마냥 행복할 것만 같은 이 젊은 부부에게 크나큰 불행이 다가온다. 세 아이를 연이어 잃은 것이다. 이때 드보르자크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작곡한다.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슬픔을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했다. 이 작품은 1880년 초연되었는데, 이후 런던에서 주목받으면서 드보르자크가 국제적인 음악가로 도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877년 드보르자크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비평가 한슬리크(Eduard Hanslick/1825-1904)를 통해 보수음악의 지존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를 만나게 된다. 평소 드보르자크의 재능을 지켜보던 브람스는 그에게 유명 출판사인 짐로크(Simrock)를 소개시켜준다. 드보르자크는 짐로크와 전속계약을 맺고 이듬해에 슬라브무곡 1집을 출간한다. 스메타나가 리스트에게 출판사를 소개받은 후 승승장구 한 것처럼 드보르자크의 앞에도 꽃길이 열렸다. 드보르자크는 교향곡 7번(1885년)과 8번(1889년)을 연이어 성공시키고, 1891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보헤미아의 브람스로 불리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드보르자크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미국 뉴욕의 국립음악원에서 초대 원장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1892년 드보르자크는 매우 파격적인 연봉을 받고 가족과 함께 뉴욕을 향한다. 드보르자크는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불멸의 명곡들을 만들어 낸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1893년)를 비롯하여 현악4중주 12번 ‘아메리칸’(1893년), 첼로협주곡(1994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는 곡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