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고 스산한 날씨가 길게 이어진다. 동짓날이 가까워지면 오후 네시에 해가 빠지고 아침 9시에 일출이 시작될 정도로 극단적으로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상황과 겹치면서 벽난로의 따듯함이 그리워진다. 영어로 fireside chat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노변담화(爐邊談話)는 ‘따뜻한 난롯가에서 허물없이 나누는 이야기’이다. 노변담화에 얽힌 어린날의 추억은 밤마다 고향집 사랑방에 화로가 놓이고 담배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께서 풍년초를 곰방대에 넣으시고 꼭꼭 눌러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에서 시작한다. 긴 겨울밤, 가마니를 짜다가 쉴 때면 가끔씩 화로에 올려진 고구마가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어머니가 다듬이로 옷을 다린 후 마지막으로 한복의 대님을 다리기 위해 인두를 올려 달구시기도 했던 추억으로 이어진다. 지난 4월 말, 약 10년간의 이른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청산하고 아일랜드로 건너온 필자에게 춥고 음습한 겨울을 잘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두 딸은 학업과 취업준비 중이고 아내는 직장에 다니는 사이,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자는 집에서 벽난로의 불을 지피는 일을 떠맡았다. 온돌이나 그 후의 자동 보일러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영화로나 보는 벽난로가 로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반면 벽난로 지피기가 별로 어렵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만만하게 여겼으나 금방 이 작업이 만만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불을 지펴 효과적으로 집안을 덥힐 수 있을 까 궁리하다 보니 몇 달 사이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말 할로윈 데이 연휴를 전후하여 필자 내외는 두 자녀만 남겨두고 약 일주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여행지에서 뜻하지 않게 큰딸의 음성메시지를 들었다. 내용인즉, 막상 날은 추워지고 불을 지피는 데 연기만 나고 겨우 불을 지펴놓았더니 곧 꺼져버리기 일쑤라며 비법을 전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장 하찮은 일로 여기던 벽난로 불 지피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딸들에게는 난제였던 것이다. 하로동선(夏爐冬扇) 즉 여름에 난로를 준비한다 했던가? 기실 필자의 겨울나기는 우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 6월부터 진행되었다. 나무(timber)를 판매하는 사람에게서 잘 잘라 쪼갠 나무를 사서 바람이 잘 드는 헛간(shed)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이후 수시로 문을 열어주어 여름 내내 말렸다. 나무만으로 부족하여 보조 연료 터프(Turf charcoal)을 병행해서 준비했다. 이 세 가지 연료를 적절히 섞어가며 온 집안을 덥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왜 아일랜드 노래, 문학작품에 ‘Keep the Fire Burning’이라는 표현이 일상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밤이 되면 온 가족이 벽난로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는다. 지난 10여년 간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가족과의 대화단절은 물론 늘 혼자 지내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벽난로가 가족 간의 거리를 좁혀주고 옛 추억을 반추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올 성탄절에는 오랜만에 소나무로 만든 천연 성탄절 트리도 예쁘게 장식하며 분위기를 내 보기로 했다. 우리 가족의 노변담화의 주제들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필자는 요즘 영국과 아일랜드 신문, 지역 라디오까지 모든 정보채널을 열어 두고 되도록 많은 이슈를 접하고 정리하는 중이다. 이보다 솔솔한 재미가 어디 있을까 싶은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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