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는 전설적인 록그룹 퀸의 대표곡이다. 여기서 보헤미아는 오늘날의 체코를 말한다. 과거 그 땅에 보헤미아 왕국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까지 유럽에는 ‘체코’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수 백 년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체르니, 스메타나, 드보르자크,말러가 오늘날 체코 음악가로 분류되지만, 살아생전 그들은 ‘보헤미안’이었을 뿐이다. 스메타나(Bedřich Smetana/1824-1884)의 인생 전환점은 22세 때인 1846년이었다. 이때 낭만파의 거장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리스트가 프라하를 방문했다. 스메타나는 리스트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보여주고, 독일 출판사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스트는 흔쾌히 청년 스메타나에게 출판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오늘날로 치면, 음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이 보헤미아의 청년은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스메타나는 리스트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리스트는 당시 엄청난 기교의 피아노 비르투오소이면서 ‘교향시’라는 다분히 낭만주의적 음악장르를 창시했다. 교향시는 다악장의 절대음악 교향곡과 달리 단악장의 관현악곡이고 제목이 있다. 스메타나는 교향시 작품들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하지만 체코에서의 반응은 서늘했다. 스메타나에게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스메타나에게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은 1866년 프라하 국립가극장에서 초연된 그의 두 번째 오페라 ‘팔려간 신부’였다.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수준급 오페라 부파였다. 팔려간 신부는 극 내용만큼이나 서곡도 매우 유명하다. 초연은 이전 작품들처럼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라 없는 암울한 상황에 희극이라는 코드가 부담이었고, 작품에 민족적인 선율이 인용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팔려간 신부는 100회 이상 공연되는 흥행작품이 되었다. 팔려간 신부의 흥행과 함께 스메타나는 프라하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리스트와 바그너를 흠모하여 어느덧 바그네리안의 반열에 오른 스메타나는 바그너처럼 큰 스케일을 가진 오페라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허용된 오케스트라 단원은 30명 정도에 불과였다. 바그너를 닮고자 했던 세 번째 오페라 ‘달리보르(Dalibor)’(1866년 초연)는 대실패였다. 어설픈 바그너 추종자라는 비난이 거셌다. 스메타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프라하의 탄생신화를 소재로 한 네 번째 오페라 ‘리부셰(Libuse)’(1872년 초연)를 발표하여 자신의 명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곧 비극이 일어난다. 스메타나가 리부셰 초연 후 베토벤처럼 청각을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스메타나도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귀가 들리지 않음에도 6부작으로 된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을 발표한다. 두 번째 곡 ‘몰다우(블타바)’가 오늘날 자주 무대에서 연주된다. 오늘날 우리가 스메타나를 기억하는 것도 대체로 이 곡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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