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브람스는 요아힘의 추천장을 들고 슈만을 찾아간다. 그때 슈만은 정신착란증으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맡고 있던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역할도 수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슈만은 듬직한 이 독일 청년의 작품을 보고는 자신이 창간한 음악신보(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극찬을 아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브람스는 슈만이 보증하는 일류 음악가의 대열에 서게 된다. 슈만은 그 후 몇 달 지나 지휘자 직에서 물러난다. 정신병이 도진 것이다. 이듬해에는 라인강에 뛰어든다. 마침 강을 지나가던 어부 덕분에 구사일생했지만 온전한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슈만은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는 2년 후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브람스와 슈만의 인연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불과 3년을 함께 했을 뿐이다. 이 3년 동안 브람스는 정신병자 슈만과 그만을 사랑했던 클라라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오늘날 ‘슈만과 클라라’는 마치 고유명사 같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은 드라마틱했다. 슈만은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 비크(Johann Gottlob Friedrich Wieck/1785-1873)의 문하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클라라(Clara Josephine Wieck/1819-1896)를 만나게 된다. 당시 비크의 딸 클라라는 눈부신 외모를 가진 10대 소녀였다. 슈만은 특유의 언변으로 클라라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피아노밖에 몰랐던 클라라는 9살 연상의 슈만에게 점점 빠져들게 된다. 비크 교수는 슈만과 클라라의 교제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슈만이 애제자임에는 분명했지만, 금지옥엽 기른 외동딸을 주기에는 미덥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피아노연주를 하지 못하고, 대신 작곡과 평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할 슈만의 경제적 능력이 문제였다. 하지만 비크의 반대에도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은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슈만이 클라라와의 결혼을 요구하자 비크는 소송으로 딸을 지키려 했다. 법원은 슈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1840년 슈만과 클라라는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슈만이 서른 살, 클라라가 스물한 살 때다. 슈만과 비크는 소송으로 큰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화해를 한다. 이렇듯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랑을 한 슈만과 클라라 사이를 브람스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브람스와 클라라가 처음 조우했을 때, 브람스는 스무 살, 클라라는 서른네 살이었다. 열네 살 연상의 클라라에게 반한 브람스는 수줍은 사랑고백을 하지만, 클라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브람스는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독신으로 지낸다. 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죽은 1856년부터 40년 동안 슈만 부인으로 남아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1896년 클라라가 죽자 이듬해 브람스도 그녀를 따라간다. 이 정도면 ‘클라라와 브람스’를 또 다른 고유명사로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