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사 석굴을 찾아 산을 내려왔다. 석굴이 있는 곳은 단석산의 8부 능선쯤 된다. 신선이라면 도교의 신선이 아닌가? 사찰에 산신각을 두고 산신령을 모시는 등 신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신선사라는 명칭에 이의가 있다는 생각은 필자의 편견이 될 수도 있겠다. 명칭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지 말고 전체를 찬찬히 둘러보아야 하겠다.
입구인 서쪽에서 안으로 들어서면 동, 남, 북 삼면의 깎아지른 바위에 압도된다. 김유신 장군이 신검으로 잘라낸 바위는 산 정상의 단석이 아니고 이곳이 단석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검으로 단번에 바위 면을 잘라낸 듯하다. 규모도 엄청나지만 삼면 벽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불·보살상, 공양자상, 조상명기 등이 새겨져 있다. 위를 덮는다면 동굴이 된다. 실제 주위에 흩어진 와편으로 미루어 지붕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는 투명체로 지붕을 덮었으나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면 바로 동굴이다. 동굴이라도 예사 동굴이 아니다.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 바위를 탱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사찰은 어디든지 신앙대상으로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뒤에 탱화(幀畵)가 걸려 있다. 여기 신선사 석굴 벽면에도 여러 불보살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어 탱화로 생각해서 탱바위라고 한 것은 아닐까? 이 석굴은 상인암(上人巖), 승상암(僧像巖)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보살을 모셨으니 일반 사람보다는 격이 높았다고 해서 상인암, 그리고 불보살상을 승상(僧像)이라 생각해서 승상암이라 했으리라.
이 유적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조와 『동경잡기』에 기록이 보이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조사가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내학자들에 의해 답사 및 연구가 진행되어 오다가 1969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 삼산오악조사단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삼면의 바위에 조성된 10구의 불상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학계에서는 이 불상들이 시차를 두고 제작되었을 가능성보다는 동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남면에 있는 조상명기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지 않고 불상의 조각기법만으로 시대 편년이 이루어져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당시 삼산오악조사단에서는 전후 10일간에 걸쳐 첫째 이곳 바위 면의 구조와 새겨진 불상, 둘째 석굴사원 존재의 확인, 셋째 암벽에 새겨진 마애석각 금석문의 판독 등에 중점을 두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석굴은 서쪽 면이 트여있고 동남북 3면이 ‘ㄷ’자형의 석실을 이루고 있다. 높이 약 18.2m, 폭 약 3m로 장방형을 이룬 석실 북쪽 면의 안쪽 독립된 큰 바위에는 전면 가득히 높이 약 7m의 여래입상을 양각하였다. 여래상을 중심으로 왼쪽과 앞쪽에 거구의 보살입상 각 1구를 조각하여 이 여래상과 더불어 삼존상을 이루었다. 그런데 가운데 주존을 모시고 좌우로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삼존상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쪽으로 개방된 이 천연의 석실은 지면의 고저와 불상의 배치방식 등에서 전후의 양실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즉, 전실은 후실에 봉안된 삼존에 대해 예배를 위한 곳이며 후실은 이 석굴의 주존인 1여래 2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이 석실 조사에서 가장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이들 4개의 바위를 덮었던 거대한 목조와즙옥개(木造瓦葺屋蓋)의 확인이다. 따라서 불상 조성과 동시에 이 자연석실을 그대로 불당으로 활용함으로써 석굴사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주위 특히 남쪽 바위 윗면에 삼국시대부터 통일기에 이르는 각종 기와와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불당을 조성한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보수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