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파                                                 손택수 양념을 하긴 했는데 양념이 저 혼자 잘난 척만 않도록 은근히 절제를 했다 ​맛과 맛 사이에 여백을 두어서 희미하게 단맛도 오고 쓴맛도 오고, 짠맛도 오고 당최 알 수 없는 맛까지 더한다 ​을밀대 평양냉면이나 원주 흥업묵집 묵밥은 어딘가 허전한 데가 있었지 부러 채우지 않고 비워놓은 자리가 있었지 ​수줍어하는 맛이라고 할까 개성을 감춘 맛이라고나 할까 심심파적이 아니라 각고의 궁리 끝에 심심 ​이것이 어떤 유파 같은 것은 아닌지 과연 아무나 심심한 게 아니로구나 여러 맛이 와서 놀아라 심심 무얼 고집 않고도 이미 자신인 너 심심파, ‘맛’ 이야기에서 ‘품’ 이야기로 시인은 “양념이 저 혼자 잘난 척만 않도록” 절제를 했다고 쓴다. 양념을 많이 하면 음식 고유의 맛이 없어진다. 심하면 음식 맛이 아니라 양념 맛이 되어버린다. 이 말은 그냥 양념을 담백하게 했다거나 심심하게 했다는 말보다 은근히 매력이 있다. 시인에 의하면 “​맛과 맛 사이에 여백”이 있는데 그 여백을 통해 “희미하게” 단맛도, 쓴맛도, 짠맛도, 심지어 “당최 알 수 없는 맛까지” 건너온단다. 그래서 “​을밀대 평양냉면이나/원주 흥업묵집 묵밥” 같은 음식 고수들의 맛집은 “부러 채우지 않고 비워놓은 자리가 있었”다 깨닫는다. 이런 “​수줍어하는 맛”,“개성을 감춘 맛”은 지루함을 때우기 위해 하는 “심심파적”이 아니라 “각고의 궁리 끝에 (도달한) 심심” 대교약졸(大巧若拙), 무르익은 ‘교’(巧)가 ‘부러’ 어수룩한 ‘졸’(拙)의 경지를 이룬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은 여기에서 한 수를 더 떠서 “이것이 어떤 유파” 같은 것이라 하여 ‘심심파’를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서정주가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질마재 마을 사람들을 ‘심미파’와 ‘유학파’라 명했을 때와는 다르게 눙치는 묘미가 있다. 말놀이의 유머를 은근슬쩍 깔아놓은 ‘심심파적’에서 ‘심심’으로, 다시 ‘심심파’로 건너뛰고 있는 이 시인이 그렇다면 이 시에서 ‘맛’ 이야기만 하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여러 맛이 와서 놀아라 심심/무얼 고집 않고도 이미/자신인 너”에 이르면 이건 사람의 ‘품’의 문제로 건너뛰고 있다. ‘심심’이 단맛과 쓴맛, 짠맛, 당최 알 수 없는 맛까지 받아들이듯이, 여유와 여백을 거느린 품은 일견 어수룩하고 개성이 없는 듯하지만 여러 맛과 속성을 가진 사람들을 “와서 놀아라”, 다 받아들인다. 이 사람 말도 옳다고 하고, 저 사람 말도 옳다 했던 황희 정승이 그랬듯이, “무얼 고집 않고도/이미 자신인” 이들은 수줍은 듯, 개성이 없는 듯 이런저런 인물도 개의치 않고 용납한다. 찬동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들은 깊고도 깊은 심심(深深)한 인물이다. 시집 『어떤 슬픔은 할께할 수 없다』에서 시인이 타자에게 보내는 시선은 한없이 포용적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는 공감의 언어를 잊지 않는다. 심심파! 이건 정작 손택수 시인에게 붙여줘야 할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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