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1661~1717)은 영해(寧海) 원고리에서 부친 한계(閒溪) 남상주(南尙周,1626~1688), 모친 경주이씨 이진(李璡)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모친상을 당해 부친을 따라 대둔산(大芚山)으로 이거하였고,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처가가 있는 경주 불국사 근처로 이거하였고, 이후 33세에 식년시 병과에 합격해 권지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은 우암의 부친 묘갈명을 지었고, 우암의 묘지명에서 “신축년 3월 영해 원고리 집에서 태어나 늦은 나이에 월성으로 장가들어 스스로 ‘우암’이라 불렀다. 과천현감을 버리고 돌아와 영지 가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독서하고 학생을 가르쳤으며, 몸소 밭 갈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였다. 기해년 10월 25일 우암에서 죽었다(君以辛丑三月日 生于寧海元皋里第 晩家于月城 因自號寓庵 棄果川歸 結屋于影池之畔 讀書其中 訓學諸子 敎授生徒 力耕稼以自給 己亥十月二十五日 考終于寓庵).”라며 그의 생애를 짧게 기록하였다. 우암과 경주의 인연은 처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고, 불국사 방면 영지 못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자연과 동화되어 여생을 지냈다. 우암은 51세에 1711년 5월에 과천현감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영호(影湖) 서쪽에 ‘우암(寓庵)’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평소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제주 통판 등 요직을 역임하는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안타깝게도 59세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형상(李衡祥), 이익한(李翊漢), 조덕린(趙德鄰), 권이진(權以鎭) 등과 교유하였고, 사후에 조덕린이 「묘지명」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묘갈명」을, 이헌묵(李憲默)이 「묘갈명지(識)」 등을 지어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특히 1712년 제주 통판(通判)이 되었고, 1713년 대기근의 참상을 기록한 「흉년기사(凶年記事)」를 지어 진휼책을 제시하였고 진정(賑政:구휼에 관한 정사)을 펼친 공으로 통정대부에 가자(加資)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숙종 42년(1716) 11월에 제주의 진정(賑政)을 살피는 과정에서 파직과 가자를 삭탈 당하였다. 오히려 경주인 우암 남구명은 손자인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과 증손자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 등 경주의 우수한 선비의 연결고리로 더욱 회자(膾炙)된다. 우암은 농가의 정취를 담은 「전가즉사(田家卽事)」를 통해 경주 영호(影湖)에 돌아와 농가(農歌)를 들으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境僻稀逢識者過(경벽희봉식자과) 후미진 곳이라 간간이 아는 사람 지나가고 隔籬朝暮聽農歌(격리조모청농가) 아침저녁 울타리 사이로 농요가 들린다 閒扶竹杖看新稻(한부죽장간신도) 한가히 대지팡이 짚고 자라는 벼를 바라보니 畦外泉聲雨後多(휴외천성우후다) 비 온 뒤에 땅 너머로 물소리가 많아진다「영지조어(影池釣魚)」에서는 은자의 여유로운 시간과 자식의 사랑을 표현한다. 日暮肩竿下釣磯(일모견간하조기) 저녁에 낚싯대 어깨에 메고 강가로 내려가니 雨痕猶在綠蘿衣(우흔유재록나의) 은자(隱者)의 푸른 벽라의(薜蘿衣)에 빗방울 떨어지네 嬌兒迎出柴門語(교아영출시문어) 어린 자식이 사립문에 나와 인사하고 獵得金鱗幾許歸(엽득금린기허귀) 금빛 물고기 몇 마리 잡아서 돌아가네 우암이 머무는 작은 집은 협소한 공간이지만 영지의 넓은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 조화의 장소였다. 하지만 훗날 활산 남용만은 영호서당(影湖書堂)에서 묵으며 모기ㆍ날벌레에 시달려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자 그 고통을 시로 승화시켰는데 참으로 위트가 넘친다. 蚊聚成羣震若䨓(문취성군진약뢰) 모기가 떼 지어 우레처럼 진동하고 壁虫鋪席又生猜(벽충포석우생시) 벽의 벌레가 자리에 깔리니 원망이 생긴다 偏憐蝴蝶無尖吻(편련호접무첨문) 사랑스런 나비는 뾰족한 입이 없건만 達夜蘧蘧不敢來(달야거거불감래) 밤새도록 앵앵거려 잠이 오질 않네 *『활산집』권2우암 남구명의 생애 가운데 경주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해에서 경주로 이거한 이력과 경주로 오면서 맺어진 학맥의 연관성은 경주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가 머문 ‘우암’ 공간은 경주에 세거한 영양남씨의 가학 계승과 유림의 후학양성을 위한 곳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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