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따른 대답은 초등학생다웠다. “늑대인간”이나 “상어가 제일 무서워요!”라는 폴과 니나의 답변을 보니 저학년 교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캐롤린은 “딜런이요” 라고 대답하길래 같은 반 친구가 왜 무서울까? 궁금해졌다. 자연스레 딜런이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죽음(inevitable death)으로 우릴 천천히 몰아가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행진(unstoppable marching of time)이요” 그렇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이고, 늑대나 상어가 무서울 나이에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그것도 건조하게 지적했던, 왠지 낯설은 초딩 딜런도 무섭긴 마찬가지다. 2022년이니까 벌써 작년의 일이다. 대표적인 사학자이자 종교인인 김동길 선생이 94세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코로나 확진 후 악화된 건강을 미처 회복하지 못해서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고인은 생전의 서약에 따라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누이가 총장을 지냈던 이화여대에 기증됐다. 혼탁한 사회를 향해 “이게 뭡니까!” 하던 그의 죽비소리는 멈췄지만, 거인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보다 몇 달 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엄마가 집에서 “밥 먹으러 들어와!” 하고 부르는 것’이 죽음이라고 그는 온몸으로 정의했다. 그 스스로 죽어가면서 지켜봤을 죽음은 그의 말마따나 ‘어둠이나 낭떠러지가 아니라 밝은 대낮의 고향’이었다. 참 선생다운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두 거인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고집스러운 전통과 작지만 큰 관점의 이동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보통 사회가 발전하는 만큼 죽음을 맞는 방식은 다양했다. 두서없이 나열해 보자면, 가령 구석기시대에는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들이 사는 동굴에 주검을 묻었다. 삶에서 죽음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죽음에 신분과 정치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에 와서다. 신분과 힘을 과시하려는 무덤의 형태가 발달하게 되었다. 사회 조직이 점차 시스템을 갖추니 죽음도 정치와 결탁되어 가는 모양새다. 통일신라시대는 불교의 화장(火葬) 문화가 확대되었다. 고려시대는 근간이었던 유교와 불교가 혼합된 장례 형태라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식 장례문화가 정착된다.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화장장이나 공동묘지가 건립되고, 오늘날은 화장 후 봉안 시설에 안치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쌍용그룹 사보(社報)에 30대 사원 백오십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더니, 본인의 시신 처리는 매장(14%)보다 화장(78%)을 선호하지만, 부모일 경우에는 화장(26%)보다 매장(66%)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매장 문화와 화장 문화와의 충돌이라기보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갖는 죽음에 대한 이중적 의식 구조로 이해된다. 죽음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나 새로운 해석을 가진 지도층의 솔선수범 없이는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딜레마라고나 할까. 그런 측면에서 가령 토지 매입비용과 묘지 설치 및 관리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화장한 뼛가루를 나무뿌리에 묻는 수목장(樹木葬)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와 달리 외국에서는 죽음 방식에 대한 다양하고 탄력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가령 미국에서는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거름용 흙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시도 중이다. 매장이나 화장 등 기존의 방식과 달리 자연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퇴비화 매장(Human Composting Burial)’ 방식은 매우 친환경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뭇조각이나 짚 등으로 채운 특수 용기에 시신을 넣고 한두 달 정도 분해 과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화학물질이나 온실가스를 배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또 장지(葬地)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토지 부족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더 파격적인 모델도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화장한 고인의 유해를 풍선에 담아 하늘로 올려보내는, 소위 풍선장(葬)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미 초고령화 단계에 진입한 일본은 사망자 수는 늘어나는데 고인을 추모할 사람도 없고 유골을 묻을 공간도 부족해지는 현 상황에서 기존에 없던 창의적 대안의 장례 모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자연의 원형적 모습인 사계절(四季節)의 인간 존재적 모형이 생로병사(生老病死)라면, 인간의 죽음도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제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오늘날, 우리에게 삶이 그러하듯 죽음이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지 머릴 맞대고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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