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검지
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 번 한 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해학 속에 담긴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생각
시인 아버지의 책 읽으시는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분은 노련한 독서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독서속도도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서에 들인 그분의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지하고 살뜰하다. 검지를 꾹꾹 눌러가며 한 줄 한 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으신다.
그것을 시인은 눈이 윗줄을 읽는 동안 검지는 “밑줄을 긋듯” “점자 읽듯 다음 줄을 읽고 있었을 것”이기에,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책을 많이 읽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라고 농을 친다. 그것도 지문이 다 닳을 정도로 읽었으니 이 유머는 참 그럴듯하다.
더욱이,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에 이르면 와락, 웃음마저 쏟아진다. 다음 쪽을 넘기기 위해 검지에 침을 바르는 일인 줄 독자들은 이미 다 알기 때문이다. 첫줄 밑에서부터 시작한 검지의 독서행위는 그리하여 “검지는/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으로 받아넘기고, 다음 쪽을 넘기기 위해 천천히 혀에 침을 묻히는 검지의 동작은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으로 또 받아친다.
이렇게 책 읽기로 유식해진 검지에 더하여 시인은 짧게 한 줄을 더 한다. 가족이나 이웃에게 삿대질 한 번 한 적 없는 ‘참 유순한 검지’라고. 그런 아버지가 당신의 독서 습관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이 시를 어디선가 또다시 ‘검지’로 눌러 읽으시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시인은 딴지를 걸고 있지만, 우리는 다 안다. 이 작품은 결국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자식이 온몸으로 “아버지의 여백을 읽”는 시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