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목백장(穆伯長)의 베갯속 기록과 소요부(邵堯夫)의 모란점(牡丹占)을 전하는 자들이 신묘하다고 말하지만 지금 세상에도 어찌 이런 일이 없겠는가?
경주의 진사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 1687~1760)이 항상 베는 목침이 하나 있었는데, 병을 앓을 때 그 목침을 잃어버렸다.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자, 그는 ‘나는 반드시 이 병으로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기록해 놓은 것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바로 목침을 만든 날에 목침의 사주(四柱)를 정하고 점을 친 내용이었다. 그 점괘에 ‘아무 해에 이 목침을 잃을 것이고, 목침을 잃으면 주인은 불길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과연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라며 운명을 예지한 이인(異人)으로 화계를 언급하였다.
소요부(邵堯夫)는 송나라 소옹(邵雍,1011~1077)을 말하는데 이지재(李之才,?~1045)에게 하도(河圖), 낙서(洛書), 복희(伏羲)의 팔괘육십사괘도상(八卦六十四卦圖像)을 배워 자득하였고, 이지재는 또 목수(穆脩,979~1032)에게 수학하였으며, 모두 역술이 뛰어났다. 실로 화계 선생 역시 주역에 능통하였다.
류운우(柳雲羽,1730~?)가 쓴 묘갈문을 보면, “일찍이 나무껍질로 만든 벼루집을 얻었는데 점을 쳐 새기기를, ‘경진년(1760)에 물건이 주인을 떠나니 장차 내 명이 다한다’라 하였고, 경진년 6월에 이르러 병이 나았다. 공이 이르기를 ‘옛날 정강성(鄭康成:정현)은 정묘년에 나서 경진년에 돌아갔는데, 내 비록 그보다는 못하지만 태어남은 이미 같고, 죽는 것마저 자못 같구나’라 하였다.
문인과 제자들을 불러놓고 남과 더불어 다투지 말 것을 훈계하고, 모퉁이에 앉아 운명하니 7월 19일로 74세였다.”라며 자신이 죽을 것을 예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계는 한(漢)의 정현(鄭玄,127~200)을 사숙(私淑)하고 같은 운명의 롤모델로 삼았다. 정현의 안빈수분(安貧守分)한 삶과 고문경설을 위주로 삼아 금문경설도 받아들이고 여러 경서에 주석을 달아 경학을 집대성한 인물의 됨됨이를 통해 자신도 그를 닮고자 하였다.
『화계집』서문을 지은 홍양호(洪良浩), 만사(輓詞)를 지은 안유항(安有恒)·최종겸(崔宗謙), 제문(祭文)을 지은 최종한(崔宗翰)·임일빈(任一鑌), 행장을 지은 남용만과 행적(行蹟)을 지은 이헌락(李憲洛) 그리고 묘갈문을 지은 류운우 그리고 후지(後識)의 이종상(李鍾祥) 등 12편의 글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병이 위독해지자, 소강절(邵康節)의 임종시 수 편을 낭송하고 뒷일을 처신하고 부축받아 일어나 자리에 바르게 앉아 죽었다.
일찍이 그는 “정현은 정묘년에 나서 경진년에 죽었다. 나의 학문이 어찌 감히 정현처럼 되길 바라겠는가? 곤궁하게 살며 가르친다면 아마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하물며 내가 산 세월과도 마침 같고, 마땅히 경진년에 죽었으니, 「적토설(赤兎說)」을 지어 그것을 기록한다”라 하였다.
“정현은 한 순제(順帝) 영건(永建)2년 정묘년에 태어나서, 헌제(獻帝) 건안(建安) 5년에 죽었다. … 옛날 정현(강성) 역시 이 토끼해(127,정묘)에 태어나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이 토끼해가 다시 돌아왔으니, 학문은 더욱 성장하고 행실도 더욱 닦아 해내(海內)의 선비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또 14년을 지나 백룡을 만나서 죽었다. 그 후 천여 년이 지나 내가 태어났는데, 이 토끼해를 만나 문학이 강성보다는 헤아리기에 부족하고 지금 이 토끼해가 다시 돌아왔으니 즉 강성과 한가지이다. 내 생각해보니 집안은 더욱 가난하고 생활은 더욱 궁하여 구학(溝壑)을 면치 못하고, 학문은 더욱 鹵莾(노망)하고 행실은 더욱 멸렬하여 강성을 뵙기가 매우 부끄럽다. … 그렇다면 14년 후 마땅히 안빈수분(安貧守分)하고 낙이망우(樂以忘憂)하여 … 나 역시 음양의 기운에 오르고, 이 토끼해와 더불어 태허지중(太虛之中)으로 함께 돌아간다면 아마도 강성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 이 「적토설」이 정묘년(1747)에 지어졌고 과연 강성과도 어긋나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다”
정현이 6월에 죽었고, 화계도 6월에 병이 나서, 7월에 죽었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위이자 친구인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이 그의 행장을 지었는데, “화계 처사 공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제자 가운데 소렴 때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를 머리에 처음으로 쓴 자가 30명이었고, 채색(彩色)으로 가선을 두르지 않은 문사 수백 명이 침실 문에서 곡하였다”라며 그의 빼어난 인품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