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의 계절이다. 녹음이 가득했던 논밭은 황금빛 물결이 춤을 추고 있고, 드문드문 추수한 흔적은 하얀 마시멜로 덩어리로 남았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하고 중간중간 논을 가꾸고, 때가 되면 추수한다. 매년 보는 광경이지만 매년 새롭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자신의 가정을 일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낸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어른이 되어 사회의 일원이 될 것이고, 자신의 가정을 일구고 새로운 작은 사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엄마인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가끔 무서워진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들의 이야기는 온통 공부다. 아이의 놀이와 개성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영어, 수학이다. 놀이터에서든 커피숍이든, 엄마가 둘 이상 모이면 그들의 주제는 결국 공부다. 너무 늦었다. 영어는 어쩌고저쩌고, 수학은 어쩌고저쩌고. 엄마들 중에서 정보에 강하거나, 아이의 나이가 있어서 먼저 경험한 엄마들의 이야기는 큰 힘을 발휘한다. 그 엄마의 말에 다른 엄마들은 눈을 반짝이며 집중한다.
보다 못한 아줌마인 내가 과외 경력을 내걸어 몇 마디 첨부한 후, 내 제자들을 들먹이며, 서울대 졸업한 친구가 지방대 졸업한 친구보다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서울대 졸업한 사람이 몇 명이냐? 인서울 못하면 모두가 다 불행하냐? 이 아파트에 사는 모두가 불행한가?
조금은 서먹해진 순간이다.
그러나 아줌마는 말하고 싶다. 모든 아이가 서울대를, 인서울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건강하다. 그리고 올바르게 발전한다. 학문에 흥미를 갖는 친구, 몸을 써야 하는 친구, 탐구를 즐기는 친구, 끈질긴 친구, 엉뚱한 친구, 장난꾸러기, …
다양한 개성의 아이들을 모두 같은 기준에 맞춰서 억지로 끼워 맞춘다면 모두가 불행할 뿐이다. 그래, 아줌마도 안다. 엄마들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다는 것을. 그러나 매번 말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지하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엄마인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에서 엄마가 미리 짐작해서 준비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좋은 학벌, 좋은 직업?
시대가 변했다. 좋은 학벌은 이미 넘쳤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요즘 안 들리는 이유는, 용 난다는 의미가 예전에는 서울대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서울대에 입학하고 졸업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성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꼭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왔어도 좋은 직업을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될 세대에서는 평생직장도 없지만, 많은 직업군이 변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현존하는 직업의 80%가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군이 10~20%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직업의 숫자가 확 줄었다고 걱정이 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더 닦달하며, 그 10~20%를 위해서 준비시켜야 할까?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자. 우리는 결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열린 사고로 문제를 파헤치고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자. 아이가 넘어졌을 때,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도록, 엄마는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규칙을 이야기해주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일궈가야 함을, 많은 유혹의 손길이 사회에 있음을, 그걸 뿌리치거나, 빠지는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고 자신의 선택 결과는 언제나 자신이 책임져야 함을 이야기해주면 될 뿐이다.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위해 가르쳐줄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다.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자세다. 엄마의 삶의 철학은, 삶의 자세는 어떠한지 그것부터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