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는 베토벤과 말러 사이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보수파 진영의 ‘브람스’라는 걸출한 작곡가와 본의 아니게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당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다분히 보수 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이었는데, 이 속에서 브루크너는 보수언론의 무차별 공격을 받아내는 진보파의 방패가 되었다.
브루크너는 수도원의 교사로 봉직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나이가 거의 40이 되기까지는 종교음악에 치중했다. 그가 세속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그너의 음악극이었다. 브루크너는 1863년 오페라 탄호이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으면서 바그너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1868년부터는 빈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에게 붙은 ‘바그너’라는 꼬리표는 그를 늘 궁지로 몰았다. 전투력 강한 바그너보다는 ‘촌뜨기 교향곡 작곡가’가 훨씬 더 만만한 보수언론의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바그너에 대한 브루크너의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다. 브루크너는 3번 교향곡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이 곡은 사연이 많다. 보수파의 방해 속에 1877년에 가까스로 초연되었다. 7번 교향곡에는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바그너 튜바’라는 금관악기를 네 대씩이나 편성했다. 이후 9번 교향곡까지 계속 편성했다. 이 악기는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를 만들 때 고안한 것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는 4번과 7번이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4번에는 ‘낭만적인(romantisch)’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낭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분출시킨 작품이다. 7번은 초연(1884년)부터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1883년 서거한 바그너를 위한 추모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루크너도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그도 9번 교향곡을 3악장까지만 완성한 채 죽고 만다. 브루크너 교향곡에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다. 초기 교향곡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향곡은 안개 낀 듯 작은 음량으로 시작된다. 이를 ‘브루크너 오프닝’이라고 한다. 이는 베토벤의 9번 합창교향곡 1악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음악이 잘 흐르다가 갑자기 모든 악기가 일제히 쉬는 부분이 있다. 이를 ‘브루크너 휴지’라고 한다. 물론 휴지 다음에 바로 음악이 이어진다.
알다시피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은 매우 좋아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그가 바그너 추종자였다는 이유만으로 20세기 나치에 의해 애용되었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같은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후에 브루크너 음악이 전범음악으로 분류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명예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