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떠나기 전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George Herbert Leigh Mallory)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느냐?” “에베레스트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Because it is there).” 그의 이 대답은 산악인들에게 영원히 회자되는 명언이 되었다. 이후 그는 등반 중에 에베레스트 8500m의 북쪽 능선에서 사라졌다. 9년이 지나서 맬러리와 그의 동료 앤드루 어빙이 썼던 산소마스크 한 개와 피켈이 발견됐다. 그들이 정상을 밟고 내려오다 사망했는지, 아니면 올라가다 죽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내려오다 실종됐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에베레스트 초등(初登)의 영광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가 아닌 영국 사람 맬러리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필자는 산에 오르는 것을 퍽 좋아하는 편이다. 요즈음도 매주 수요일에는 후배들과 함께 산을 찾는다. 한때는 홀로 집에서 승용차로 중산리탐방안내소까지 가서 당일치기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거쳐 소청봉, 대청봉을 지나 설악동을 하루에 넘은 적도 있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산을 올랐다. 차원이 다른 산행이라 언급 자체가 불손하다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마음만은 산악인 맬러리였던 것이다. 이 단석산도 그동안 10여차례 올랐다. 그러나 오늘 산행은 그냥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르는 것’이 아니다. 단석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더듬고 또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단석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5코스가 있다. 우중골에서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거치는 길, 방내 천주암에서 오르는 길, 백석암에서 입암산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 OK그린 청소년 수련원에서 당고개 갈림길을 거쳐 오르는 길, 당고개 휴게소에서 당고개 갈림길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오늘은 신선사 마애불에 중점을 두고 산행을 해야 하고 또 가장 가깝게 정상으로 갈 수 있는 우중골 코스를 택했다. 우중골은 신라 때 위증이라는 당 태종의 신하가 이 골짜기에서 수도를 했다고 해서 ‘우중골’이라고 했다는데, 당 태종 때의 인물로는 위증이 아니고 위징(魏徵, 580-643년)이다. 그러나 위징이 신라로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위징’ 또는 ‘위증’이 왜 ‘우중’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되지 않고 있다. 위증이 아닌 위징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누군가가 ‘위증(僞證)’한 것이리라.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곳 골짜기가 깊어 자주 구름이 덮이고 어두워지면 곧잘 비가 내린다고 하여 ‘우징곡(雨徵谷)’, ‘우중곡(雨中谷)’, ‘우중골’, ‘우징동’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신선사 마애불을 향하는 등산길에는 어제 비가 내리고 오늘도 날씨가 잔뜩 찌푸리고 있으니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길을 넓히고 시멘트 포장을 하여 4WD 구동방식의 차량이라면 신선사 턱 밑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차량은 SUV 차량이지만 2WD이라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올라갔다. 동행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올랐겠지만 혼자 산행을 하다 보니 걸음이 빨라진다. 단석산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와 내남면 비지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석산이라는 기록이 처음 보이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 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곳 단석산에서 김유신이 수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김재식·김기문, 경주풍물지리지, 보우문화재단, 1991, p.352**중국 수나라 말기에 반란군인 이밀의 책사였던 위징이 무너지는 담장 아래 서지 않는다며 당태종인 이세민(李世民)의 휘하로 들어갔다. 위징은 태종에게 200여 차례에 걸쳐 간언하였는데, 그의 간언으로 당태종은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왕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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