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代價)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黑點)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피안(彼岸)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遠視)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飛翔)만 보인다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에 이른 자들의 이야기
김중식의 이 시를 다시 읽는다. 거칠게 말하면 세상 모든 새는 두 종류의 새밖에 없다. 초인적인 의지로 자유를 위해 비상하는 새와 “발 밑의 벌레”라는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새이다.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代價)로” 아주 날렵한 몸을 가진 새는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 양태로 자신의 “몸을 쳐서 솟구”친다.
그 때 떨어지는 순결한 금부스르기는 햇살에 부딪힌 새의 외적인 정경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 그 대가로 치른 희생이 아깝지 않은 결실의 징표이다. 날개의 의지가 “가자는 대로” 최대치의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黑點)에서 클로즈업으로” 내려온 새는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이지만 이 순간도 잠시뿐, 그는 대부분의 평범한 새들이 그런 것처럼 일상에 묶여있지 않다. 하늘을 난다는 것의 기쁨과 무한의 자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둥지에서 머물며 자기가 생존을 위해 끌려가는 삶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게 사는 것이요, 살아서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그런 삶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이 “기진맥진”한 새를 바라보며 꿈을 품는 “아직 떠나지 않은 새”가 있다. 그에겐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遠視)의 배고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飛翔)만 보”이는 젊음은 아름답다. 앞선 자는 용감한 다음 세대를 부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리빙스턴은 이 새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천 년간 “물고기 머리나 쫓아다”닌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알아낸 것을 나누고, 저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수평선을 보여주”려 하지만 “갈매기 가족의 위엄과 전통을” 깨었다는 죄로 공동체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설리번과 챙이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이를 후대에 전수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추방했던 지긋하기도 할 법한 공동체로 돌아가서 꿈을 갈망하는 영혼들을 키우는 사랑과 너그러움을 보인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도 분명히 있는 법. 그 새를 전설로 만드는 위험성이다. 날아오를 때 바람 쪽으로 몇 걸음을 옮겼느냐, 눈이 무슨 색이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이 시는 당연히 알레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 시가 다루는 것은 새만이 아니며 비상만은 아니라는 것. 예술이나 과학을 포함하여 어떤 분야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고,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하는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아직 떠나지 않은”, “피안(彼岸)을 노려보는 눈”의 새가 이제는 당신에게 말한다. 자유는 존재의 본성이며 단 하나의 진실한 법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