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류씨 광풍정파(光風亭派) 류윤렴(柳允濂)의 현손인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 1687~1760)은 17·18세기 경주의 큰 유학자로 경주부 남쪽 신계리에서 부친 오암공(鰲菴公) 류기서(柳起瑞), 모친 학성이씨 이정의(李廷義) 따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이 지은 「행적(行蹟)」을 보면, “1687년에 경주부 남쪽 신계리 집에서 태어났으며, 류태서(柳泰瑞) 공에게 입양되었다. 자질이 돈후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다. 5세에 독서의 경지를 알았고, 10세에 경사(經史)에 밝았다. 13세에 큰사람으로 우뚝이 성장하였고, 부모를 모시고 어른을 섬기며 공경함을 다 하였다. 지조 있게 자신에게 처하는 법도가 있었다. … 문장이 크게 떨치었고, 비록 공무를 따르더라도 마음에 개입하여 득실이 없었다. 1717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1732년에 부친상을 당해서 슬픔이 제도를 벗어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였다. 오히려 초상에 임해 스스로 힘으로 죽을 먹고 자리에 눕기를 3년을 하루 같이하였다. 병이 나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초상을 마친 후 해를 넘겨 두 눈이 다시 보였다”라 하였다.
이헌락의 부친 이신중(李愼中)은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에게 글을 배웠다. 이헌락은 김이안(金履安)·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하였고, 화계의 사위인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과 그의 아들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우암의 후손으로 혼반을 통해 약남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화계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1760년 경주부윤을 지낸 정존겸(鄭存謙.재임1759.09~1760.07)의 보고 덕분이었다. 그리고 화계는 『古易』 2권을 적어 괘효단상(卦爻彖象)의 뜻을 완상하고, 「讀易疑義卦變疑」 등을 저술하는 등 주역과 학문 깊이가 있었는데, 이는 화계의 고조부 류정기의 사위가 괴천(槐泉) 박창우(朴昌宇,1636~1702)로, 박창우는 주역에 능통하였고, 『괴천문집』 2권 1책과 『주역집해』 3권이 있으며, 그의 학문이 화계로 계승되었다.
화계는 양자로 가 있으면서 1713년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아우가 전염병으로 죽자 큰 슬픔에 빠졌고, 1717년 모친상을 당해 그 슬픔이 극대화된다. 1730년 44세에 비로소 화계서당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였고, 1732년 부친상을 당하며, 뜻을 이루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1735년 4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본래 그는 늙도록 과거장에 달려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늦은 나이에 급제 이후 부친의 권유로 사마소(司馬所)에서 들어가 결심을 내지 않고 매일 성품을 기르고 저술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하지만 가계는 점점 가난해지고 처자식이 매번 그것을 걱정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빈부는 명에 달렸거늘, 어찌 입과 배를 채우는 것으로 나의 즐거움을 바꾸겠는가? 옛사람도 군자삼락(君子三樂)과 거문고 연주로 스스로 이것을 즐거워하였거늘, 너희들 또한 본받아서 하나의 경서를 읽는 것으로 삼생(三牲:소·돼지·양)의 좋은 음식으로 봉양함을 바꾼다면 이는 우리들의 즐거움이거늘 어찌 근심으로 여기는가?”라 하였으니, 그가 가난에 대처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달프다.
중국의 정현(鄭玄,127~200)을 사숙(私淑)하고, 당나라 한유·두보의 학풍과 산수관의 풍류를 계승하였으며, 「괘변의의(卦變疑義)」등 심오한 학문과 저서 『화계집(花溪集)』을 남겼다. 그의 학문은 경주를 비롯한 여러 문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약산 오광운·송국재 이순상·시옹 임화세·훈수 정만양·병와 이형상·안재 이덕현·우와 이덕표·학고 이암·동고 이덕록 등 뛰어난 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였고, 목재 황곡 그리고 보문리의 활산 남용만·양동의 손사걸·남산동의 임만첨 등 사위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를 제자로 둔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는 내남면 화곡에 화계서당을 짓고 지역인재발굴에 힘썼으며, 평소대로 학행과 효행을 크게 드러내었다.
특히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며, 화곡의 아름다운 산수를 벗 삼아 고향에 머물며 유유자적 참된 선비의 길을 걸으신 처사문인의 한 선비였다. 지금도 그의 명성과 업적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으며, 내남면 고거산(高居山) 박달4리 윗고사리의 묘소에 오르면 공경을 일으키는 듯 여전히 파릇하다.
필자는 『화계집』을 번역해 가면서 그의 행적과 인물됨에 대해 종종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그가 남긴 시문학과 학문의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다녀왔는지? 등등 궁금점이 많아졌다. 그리 큰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경주 유림의 중심에 화계 선생이 있었고, 경주 선비의 학문적 계보를 그리다 보면 화계의 존재감이 놀랍도록 크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화계 류의건 선생을 들여다보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