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고전파 작곡가로서 엄격한 음악 형식을 만들어 냈지만, 말기에는 그 형식을 스스로 깨고 낭만파로 가는 가교가 되었다. 5번 교향곡은 정해진 형식에 따라 음표들을 조합했을 뿐이다. ‘운명’이란 표제는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다. 반면, 6번 교향곡에는 전원에서 느낀 감정이 실려 있고, 9번 교향곡은 아예 4악장에 실러의 시를 넣고 성악을 실었다. 음악 외에는 어떠한 예술적 장르가 혼재되지 않은 음악을 절대음악이라고 부른다. 미술로 치면 ‘무제(untitled)’인 셈이다. 고전파 작품들은 대체로 절대음악이다. 오늘날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2악장)은 ‘엘비라 마디간’이란 영화 덕에 사랑을 노래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모차르트는 사랑을 표현하려고 이 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아름다운 곡일뿐이다. 반면 낭만파에서는 음악과 타 예술장르(또는 인간의 감정)의 혼합을 시도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는 제목 그대로 작곡가 본인의 환상체험이 녹아져 있다. 리스트가 창시했다고 알려진 교향시도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이다. 따라서 낭만파 작품에는 대체로 곡명이 있기 마련이다. 낭만파 음악을 표제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은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음악을 양분했다. 이는 베토벤의 양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베토벤 음악의 절대성과 표제성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전자는 멘델스존, 슈만, 한슬리크, 브람스 등 보수파가, 후자는 베를리오즈, 리스트, 브루크너, 바그너 등 진보파가 주요 인사다. 두 세력의 대표자는 브람스와 바그너였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대립하진 않았다. 브람스는 기악을, 바그너는 성악을 주로 다루어 장르 자체가 서로 다르고, 브람스는 20살 연상의 바그너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향곡 분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와 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가 정면충돌했다. 브람스는 4개의 교향곡을, 브루크너는 9개(0번, 00번을 포함하면 11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둘 다 나이 40이 넘어서야 1번 교향곡을 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도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었기에 베토벤을 계승하는 작품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바흐(Bach)와 베토벤(Beethoven)의 뒤를 있는 세 번째 B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브람스와 브루크너 모두 B로 시작되는 성을 갖고 있었기에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리스트의 사위이자 바그너의 제자로 진보파의 심장에 있다가 보수파로 전향한 한스 폰 뷜러(Hans von Bülow/1830-1894)는 브람스의 1번 교향곡을 베토벤 10번 교향곡이라고 했다. 브람스가 세 번째 B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 교향곡의 전형을 보여준 브루크너는 베토벤과 말러 사이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오페라 탄호이저에 감명 받아 바그너 빠로 입문하여 한슬리크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브루크너를, 바그너는 진정한 세 번째 B로 생각했을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결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세기 말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던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의 연이은 죽음으로 보수파와 진보파의 싸움은 음악사의 한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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