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大王巖)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본항에 있는 문무대왕(文武大王) 수중릉(水中陵)이다. 문화재 명칭으로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표기되며, ‘대왕암’, ‘대왕바위’로 불린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은 삼국시대를 종결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의 물속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하였다.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는 “산곡(山谷)은 변천하고 세상은 바뀌는 법이니 오왕(吳王) 북산(北山)의 무덤에서 어찌 금부(金鳧)의 광채를 보겠으며, 위주(魏主) 서릉(西陵)의 망견(望見)도 오직 동작대(銅雀臺)의 이름만 전할 뿐이다. 공연히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유혼(幽魂)을 제도하지는 못한다.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서 화장하도록 하라(文武王曰 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誰見金鳧之綵 魏主西陵之望 惟間銅雀之名 空勞人力 莫濟幽魂 火葬東海口大石上)”라며 문무왕의 유조(遺詔)를 조명하였다. 문무왕은 평소에도 지의법사에게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라 하였다.『삼국유사』「만파식적」을 보면,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김정명(金政明)이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681) 7월 7일 왕위에 오르자, 거룩하신 선대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 [사중기(寺中記)에 이르기를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비로소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지만, 끝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해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장골처(葬骨處)]이므로, 대왕암(大王岩)이라 부르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라며 감은사와 이견대 그리고 대왕암을 함께 언급하였다.
즉 『삼국유사』에는 대왕암을 장골(葬骨)의 장소로 표현하였다. 「문무왕릉비」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셨네”를 보면, 문무왕의 시신은 인도의 법도대로 불교식 화장(火葬)을 해서 바다에 뿌려졌다. 다만 문무왕을 장사지낸[葬骨] 곳 또는 화장해서 그 뼈를 뿌린[散骨] 곳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진위여부는 계속 오리무중이다. 조사결과와 무관하게 문헌적 조사와 지역의 전하는 이야기 등을 종합해보면 대왕암은 문무왕을 장사지내고 그의 정기가 서린 곳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임은 틀림이 없다.
이렇듯 신라의 여러 왕 가운데 문무왕과 관련된 경주의 동해바다 ‘대왕암’은 『삼국유사』 등 중요 문헌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로 인식되지만, 대왕암이란 명칭은 울산 동구 일산동 해안의 ‘대왕암공원’에서도 확인된다.
울산의 대왕암공원은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慈義王后)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용이 되어서 승천하여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2004년 대왕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경주의 ‘대왕암’과 울산의 ‘대왕암공원’이 명칭의 혼동을 야기한다. 그리고 2010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주관으로 ‘울산 대왕암 명승 지정’이 심의에 올라 주변의 자연경관과 문무왕의 왕비가 용이 되어 나타난 전설을 바탕으로 문화재위원 등 다양한 논의를 이끌었지만 심의결과 보류된 적이 있다. 경주시는 2021년 4월에 양북면을 문무대왕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신라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업적과 문화재의 중요성 등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된다. 1362년 가을에 초려(草廬) 김진양(金震陽,?~1392)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과 감은사를 지나 이견대에 올랐고, 배를 타고 대왕암을 둘러보았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경주를 유람하며 이견대 동헌(東軒)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고, 남쪽 포구에 바위가 뾰족뾰족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한 대왕암을 보며 “용이 이 바위 위에 나타나 신라왕과 서로 만났기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전하였다. 하지만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경주음사청금첩(慶州淫祀請禁牒)에서 “경주부의 형산당(兄山堂),천주사(天柱祠),이견대,대왕암,남산산사당(南山產祀堂) 등 한꺼번에 많이 몰려들어 음사(淫祀: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하는데, 제사를 지내는 것) 지내는 장소를 금지하는 청원을 올렸으니, 조선시대 당시에도 대왕암을 바라보며 기복(祈福) 의식이 성행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도 대왕암 주변에 기도하는 신도들이 연일 북새통을 이루니 시대가 변해도 대왕암의 인기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