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은 바로크 시대부터 낭만파 시대까지 약 300여년 동안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기악곡들을 말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새로 발명된 세속악기를 위한 곡들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구현되었고, 고전파 시대에는 이러한 형식들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한편, 낭만파 시대에는 고전파가 만든 엄격한 형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감정이 자유로이 분출되었다. 낭만주의의 징조는 프랑스혁명 전부터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먼저 나타났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만 보더라도 낭만파의 속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낭만파는 감정에 충실하다. 이러한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감정은 19세기 온 유럽을 풍미한 낭만주의 음악의 훌륭한 모티브가 되었다. 1810년에 즈음하여 유럽에는 19세기 낭만파 음악을 이끌어 갈 거장들이 줄줄이 탄생한다. 1803년 베를리오즈, 1809년 멘델스존, 1810년 쇼팽과 슈만, 1811년 리스트, 1813년 베르디와 바그너가 태어났고, 이들은 낭만주의 음악의 별이 되었다. 이러한 낭만파 열풍은 서유럽만의 일이 아니었다. 동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러시아까지 그들 특유의 낭만파 음악이 전개되었고, 이는 민족주의 음악과 궤를 함께 했다. 낭만파 시대에는 모차르트와 같은 멀티 플레이어가 출현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한 작곡가가 교향곡도 잘 쓰고, 오페라도 잘 쓰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분업화 경향은 프랑스혁명 이후 귀족 후원의 중단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경제력과 교양을 두루 갖춘 부르주아지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들 능력의 최고치를 작품에 쏟아부어야 했다. 따라서 자신에게 더 재능이 있는 분야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차이콥스키와 같은 다재다능한 사람은 예외다!) 19세기 공공연주회장의 주요 장르는 ‘교향곡’이었다. 고전파 시대에는 대략 30여명의 악단으로 교향곡을 연주했지만, 낭만파 시대가 진행될수록 악단 규모는 100명이 넘을 정도로 점점 커져 갔다. 따라서 이런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다스릴 전문 지휘자가 속속 등장했다. 또한 파가니니와 리스트와 같은 비르투오소 연주자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들이 협연하는 협주곡이 연주회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미있는 건, 낭만파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후대에도 연주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고전파 시대만 하더라고 자신의 작품은 당대에만 소비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낭만파 시대에 들어서 고전파 작곡가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이 여전히 연주되자 낭만파 작곡가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은 선배 작곡가들과 경쟁하랴, 까다로운 부르주아지의 입맛에 맞추랴, 후대에 남을 자신만의 명작을 구상하랴, 낭만파 작곡자들은 전에 없던 창작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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