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두고 교권이 무너졌다는 비판이 전국에 울려 퍼진 가운데 49재를 지나며 각종 추모행사와 ‘공교육 멈춤의 날’ 피켓 릴레이가 온오프라인을 수놓았다. 그 와중에 연이어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태가 일어나며 교권 회복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교사들의 위상이 과거처럼 높아지기는 어렵다. 교사들이 그걸 기대해도 안 되고 사회가 그걸 요구해도 안 된다. 안타깝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교사들이 대우받던 시기, 교사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사범대학을 나오거나 교육대학을 나와야 교사가 될 수 있었는데 그때는 대학 나오는 것이 지금 박사 되기보다 더 귀하고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교사들이 일반에 비해 우월적 지위였다는 말이다.
그 위상에 군사부일체라는 과도한 프리미엄까지 얹어 교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쉬쉬하며 넘겼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부 교사들의 지나친 폭력적 행태와 성폭력, 봉투문화가 사회문제가 된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고교 졸업생 70%가 대학을 나오는 시대다. 석박사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는 교사가 가르칠 수 없는 지식이 무제한으로 널려 있다. 이런 시대에 군사부일체는 허망한 기대다. 더구나 군, 임금은 사라진지 100년이 넘었고 아버지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꼰대 취급하는 시대다.
때문에 교사를 막연한 존경의 대상으로 여길 게 아니라 똑같은 하나의 직업으로 대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과한 사명을 주지도 말고 필요 이상 간섭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교사들보다 더 배우고 더 잘 났다고 믿는 비뚤어진 학부모들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고 제 잘난 맛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비뚤어진 갑’들의 한심한 행태일 뿐이다. 우습게도 서이초에 갑질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 근처 법조타운에 퍼져 사는 법조인들이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 법조인들 대부분은 교사들이 공부 잘하는 애들을 기 쓰고 등 떠밀어 만든 사람들이다. 그렇게 억지로 만들었으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기 막히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순환에서 보면 그들의 갑질도 곧 끝나게 되어 있다. 한 해 수 천 명의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영업전선을 헤쳐 나가야 할 단순한 직업인일 뿐이다.
더 엄격히 따지면 우리가 배우는 일상의 초중고 과정들에서 인성은 사라지고 지식만 공유된 결과가 교권이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이다. 위의 긴 순환과정에서 교사들은 지식전달과 성적서열에만 치중했고 인성교육은 뒷전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교육의 지표가 된 세태가 지속되면서 인성교육은 까마득히 뒤로 밀렸다. 그러니 교사를 존경할 이유도 없어졌고 교사가 학생들을 제자처럼 여길 일도 없어진 셈이다. 교사들의 위상은 교사들 스스로 낮추었다는 말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사는 왜 ‘선생님’이라는 신성한 신분의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놀라고 당혹했을 것이다. 잘 나고 힘 세 보이는 학부모들의 압박에 모멸감과 위협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 처연함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러나 극단적인 행동의 대부분은 지혜롭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 선생님이면 좋겠지만 ‘교사’인 시대다. 갑질한 학부모에게 부당함을 제시하고 정당히 싸웠어야 할 일을 스스로 자괴하고 비탄한 채 목숨을 끊어버린 것은 분하고 안타까운 정황과 상관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가르칠 교사의 직업윤리에서도 어긋난다.
갑질하는 비인격적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좋아진다는 것은 그런 갑들을 통제하고 배제하는 인식이 더 넓게 공유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 전반에서 그런 정당한 움직임이 큰 물결을 이루어가고 있다. 누군가 어떤 일로 갑질할지 몰라도 결국 이를 함께 견디고 이겨나가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그런 우리를 믿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죽음이 교단에서나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