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원성은 서면의 아화로부터 건천을 지나 효현을 거쳐 서천에 합류하는 대천의 동편으로, 북서에서 남동 방향, 해발 120m 내외의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 이 작원성의 남서쪽으로 흐르고 있는 대천과 접하는 곳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성을 축조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위는 4340척(약 1.3km)인 이 성에서 경주의 서쪽 관문에 해당하는 금척리 일대를 감시할 수 있다. 건천 평지 서쪽으로는 주사산의 산록에 형성되어 있는 부산성과 함께 서라벌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작원성(鵲院城)은 성(城)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성은 까치와 관련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경잡기』 「이문」편 ‘작원’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신라 제29대 무열왕 때 삼국의 힘겨루기가 한창이던 당시,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치려고 군사 5만을 인솔하여 왕성을 떠나 30리쯤 되는 이곳 성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 소식에 백제왕은 크게 걱정하였다. 근심에 잠긴 백제왕은 슬기롭고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공주 가선(佳仙)을 불러 의논하였다. 공주는 둔갑술에 능하여 몸을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아바마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백성들이 편히 지내고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갸륵합니다. 김유신이 제아무리 명장이라 할지라도 백제 땅으로는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가 어리석어 우리나라를 침범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저절로 적을 무찌르는 자용병기(自勇兵器)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 걱정이 되시면 제가 가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공주는 까치로 변하여 신라 진영으로 날아갔다. 그때 신라 진영에서는 김유신 장군이 휘하 장군들을 불러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까치로 변한 가선 공주는 성안에서 제일 높은 깃발인 대장기 끝에 앉아 성안의 동정을 살폈다. 신라 장병들은 까치가 요사스럽게 우는 소리를 듣고는 불길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김유신 장군은 매서운 눈으로 까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까치를 향해 겨누었다. 칼의 광채에 눈이 부신 까치는 깃대에 떨어져 사람으로 변했다.“너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이런 짓을 하느냐?” 김유신 장군의 호령에 가선공주는 그 앞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저는 본디 백제 공주이옵니다. 신라 진영을 엿보기 위해 까치로 변했던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김유신 장군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적의 사정을 알려고 한 것은 죄라 할 수 없으니 너를 살려주겠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신라의 장수와 군사들은 일치단결하여 한치의 흔들림도 없더라고 전하여라” 가선 공주는 다시 까치로 변하여 백제로 돌아가다가 힘이 빠져 도중에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후로 이 토성을 작성 혹은 작원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건천 재래시장 동편 작원4길 3에 김유신장군 기간지주가 있다. 골목길이 불규칙하여 찾기가 어렵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수많은 군사를 이곳 작원성에 주둔시킬 때 장군의 기(旗)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는 작은 석물, 즉 기간지주(旗竿支柱)가 있다. 원래는 이런 기둥이 둘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지주의 위쪽 안으로는 깃대를 잡아주는 간(杆)을 걸쳤던 홈이 있다. 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사다리꼴로 네 모서리에는 희미하나마 모죽임이 남아있다. 안내판 등에서는 당간지주와 같다고 되어 있으나 당간지주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작다. 사찰에서 법당 밖이나 야외에서 의식을 행할 때, 불화(佛畵)를 걸어 두는 괘불대(掛佛臺)와 비슷하다. 작원성과 관련된 기를 꽂았다면 왜 이 위치에 기간지주가 있을까? 작원성은 여기서 동쪽으로 약 500여m 떨어진 곳인데…… 기간지주 주위의 골목 주택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향가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유적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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