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문성해
자루에서 검은콩을 덜다가 이것을 보내준 이를 생각한다 평생 호적에 누군가의 동거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과 그이의 검게 썩은 앞니와 기러기처럼 부드러운 옆구리를 생각한다
동거란 말에는 더운 살냄새가 난다 대문이 아니라 으슥한 셋방의 쪽문이 달린 이 말에는 누군가를 위해 양은 냄비 데우는 소리와 뒤축이 닳은 슬리퍼 소리도 난다 이 변두리 말에는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하는 야시장의 술렁임과 술꾼들 추파에도 아랑곳없이 남은 음식을 챙겨 돌아가는 치맛자락도 보인다
호젓한 이 말의 방안, 그이가 피붙이들에게 보낸 검은콩에는 울퉁불퉁한 상처가 많다 나는 이 콩들처럼 단단한 머리통의 아이들을 이제는 담을 수 없는 아랫배와 아직도 새벽이면 희뿌윰한 빛 속에 앉아 머리를 빗는 학처럼 가는 허리도 생각한다
더운 살냄새가 나는 말, 동거
아직도 대학가나 도시 변두리의 젊은이, 중년들 사이에서는 ‘동거’하는 남녀들이 제법 있다. 서로의 편의와 생활비의 절약이라는 이유 외에도 거기에는 얼마나 다채롭고 절실한 사연들이 깔려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거기엔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의 화살’들이 있다. 그것을 감내할 용기가 있어야 동거는 시작된다. 어디 이 사람들뿐일까? 이 말 속에는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삶’이라는 뜻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여기에 ‘인’이라는 말이 붙어 ‘동거인’이 되면 한집안의 주인으로서 가족을 거느리며 부양하는 일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있는 ‘호주’에 딸린 사람이라는 의미가 또 딸려나온다. 이런 의미가 다 깃들여져 있는 작품이 문성해 시인의 ‘동거’라는 시다.
시인은 “자루에서 검은콩을 덜다가 이것을 보내준 이”, “평생 호적에 누군가의 동거인으로 남아 있는”, “그이의 검게 썩은 앞니와 기러기처럼 부드러운 옆구리를”를 떠올린다. ‘그이’는 시인의 노모다. 그럼에도 시인이 그 말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것은, 여백의 미덕과 함께 이 땅의 수많은 동거인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 어머니의 삶을 맞물리게 하려는 의도도 들어 있다.
두 번째 연이 그렇다. 대부분의 동거는 “대문이 아니라 으슥한 셋방의 쪽문이 달린” 곳에서 시작된다. 거기에서 나는 “양은 냄비 데우는 소리와 뒤축이 닳은 슬리퍼 소리” 그 일상의 소소하고도 지극한 사랑의 삶을 시인은 “더운 살냄새”라 명명한다. 이 살냄새는 “희희낙락하는 야시장의 술렁임과 술꾼들 추파에도 아랑곳없이 남은 음식을 챙겨 돌아가는 치맛자락”으로 이어진다. 꼭 법적인 부부관계만이 이런 살냄새와 음식을 싼 치맛자락을 거느릴까?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면도 살을 맞대고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땅의 많은 ‘동거인’들은 저마다 절절한 사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검은 콩을 보며 다시 그이를 떠올린다. 이빨이 썩어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처지에 아직도 피붙이들 걱정이 되어, 척박한 땅에서 자랐음이 틀림없는 “울퉁불퉁한 상처가 많”은 검은콩을 보내는 그이. 옆구리는 부드러우나 “학처럼 가는 허리”라 했으니 그이의 몸은 살점 하나 없이 말랐겠다. 거기다 생산의 기능마저 끊긴, “이 콩들처럼 단단한 머리통의 아이들을 이제는 담을 수 없는” 몸으로도 “새벽이면 희뿌윰한 빛 속에 앉아 머리를 빗”고 하루를 시작하는, “얽은 자두를 먹”다가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치”를 치던(문성해, 「여름 끝물」) 바로 그 어미를 생각하는 딸! 세상에 이런 모녀도 존재한다.
이 시의 눈여겨 볼 부분 중의 하나는 말의 파문이다. 단어가 장소와 구체적인 삶, 정서를 거느리고 있다. “으슥한 셋방의 쪽문이 달린 이 말” “호젓한 이 말의 방안” “동거란 말에는 더운 살냄새가 난다” “이 변두리 말에는…… 치맛자락도 보인다” 같은 문장을 보라. 말 속에 들어앉은 쪽문과 방, 말이 풍기는 살냄새와 치맛자락. 예민한 독자라면 시인이 곰삭은 말을 넘어 말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내밀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