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부친인 윤기중 선생이 얼마전 별세했다. 마지막으로 상당한 돈을 연세대에 기부하고 깨끗한 삶을 마쳤다. 그분의 이력을 살펴보니, 일본 히토쯔바시(一橋) 대학에서의 유학이 삶의 큰 전기가 된 것 같다. 나는 1989년 한국 법관 최초로 국비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의 최고재판소에 근무하면서 히토쯔바시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었으니, 그분의 히토쯔바시 대학 후배인 셈이다. 그분은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수혜자였다고 하고, 아마 나는 한국 국비로 일본 유학을 간 최초의 사람인지 모른다. 나 역시 보통의 한국인처럼 막연한 적개감을 안은 채 일본에 갔다. 귀국 후 히토쯔바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펴낸 ‘일본 땅 일본 바람’이란 책은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 책은 일본사회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한 한국 최초의 책으로 안다. 이 책에서 나는 한국 사법부 구성원들의 일탈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큰 파문을 일으키며 결국 내가 법관직을 떠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그러나 책 전반의 내용은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어떤 이는 이 책을 루쓰 베네딕트 여사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보다 뛰어나다고 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히토쯔바시 대학이라고 하면 우선 일본 제일의 명문 국립대학이다. 일본인을 만나서 내가 그쪽에서 공부를 했다고 말하면 거짓말 같지만 자세를 고쳐 앉는다. 명문답게 고색창연한 캠퍼스가 무척 아름답다. 매일 점심을 먹으러 연구실에서 나와 캠퍼스의 구석구석까지 산책했다. 지금 생각하면 눈물겹게 그리운 풍경들이다. 히토쯔바시 대학의 스기하라(衫原) 선생은 내 일본인 스승이다. 어떤 겨울날 그분의 연구실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건물 전체에 난방이 들어오지만 그 연구실은 난방을 일부러 꺼놓아 한기가 심했다. 선생은 태연히 커피포트에서 끓인 물로 차를 우려내어 나와 함께 한 잔씩 마시며 추위를 삭였다. 평생 일본과 한국, 중국 3국의 평화공존을 원하여 헌법학 분야에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셨다. 선생이 한 번은 일본에 오신 내 한국 은사 고 김철수 선생께, “신(申)상은 일본에 있으면 얼마든지 뻗어 나갈 사람인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니 무척 아쉽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그만큼 극진히 내 뒷받침이 되어주셨다. 귀국 후에도 히토쯔바시 대학에 자주 들렀다.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히토쯔바시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와있던 이화여대의 신인령 교수와 마침 그곳에 있던 최봉태 변호사와 함께 히토쯔바시 출신의 우사끼(右崎) 교수 댁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일본인은 거의 자기 집에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단 초대를 하면, 농담 삼아 하는 말로 ‘기둥뿌리를 뽑는 식’으로 융숭하게 접대한다. 그날도 음식은 끝없이 나왔다. 그런데 너무 더웠다. 달랑 그 집에 있는 선풍기 한 대로는 땀을 식히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선풍기마저 우리를 위하여 옆집에서 급히 빌린 것이었다. 심한 더위를 견디다 못해 나는 그만 복통을 일으키고 말았다. 고 윤기중 선생이나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윤 대통령 역시 나처럼 그쪽 인사들과 정성과 진심이 어린 인간관계를 맺으며 큰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의 대일정책 수립은 그 소년기의 경험, 그리고 부친의 일본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크게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 고 윤기중 선생과 대척점에 선 사람이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이다. 그는 운동권 세력이 주축이 된 지난 진보정권 하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운동권세력의 전형적 배일(排日)관에 투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일본에 유학 갔다 오면 모두 다 친일파’이고 “반민특위를 부활시켜 150만 친일파를 전부 단죄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는 또 대단한 반미주의자다. 어느 날 한국에 온 미국 여성학자의 면전에서 “나는 미국놈들이 싫다. 미국놈들은 악랄한 제국주의자들이다”라고 소리쳤다 한다. 그의 지독한 반미, 반일은 거의 광기 수준이다. 도대체 현기증 나는 그 광기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한일간의 사이에는 교착된 많은 앙금이 남아있다. 그것을 전제하며 한 마디로 말하자. 우리가 대일정책의 기본을 수립할 때 고 윤기중 선생이나 나의 구체적 경험 같은 것을 참고해야 할까 아니면 조정래 작가의 광기 어린 막연한 말 따위를 중시해야 할까?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