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원성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힘이 든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는 아예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동경통지』에 1줄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경주시지』에는 단지 8줄이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기가 더러 보인다. 어떻게 하지……? 문득 칠곡 망월사 동진스님의 책 ‘행복한 사람’ 속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행복한 사람은…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하고,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건강하면 일을 할 수 있다고 좋아하고, 병이 들면 조용히 쉴 수 있다고 좋아한다.… 재난을 만나면 나를 단련시키고 마음을 비우게 해준 은덕에 고마워한다. 봉사할 일이 생기면 이웃을 돕고 기쁨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좋은 사람을 한 명 사귀면 만남의 길이 열렸다고 좋아한다. 이제부터 작원성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데 참고할 자료를 찾지 못해 막막하니 재난을 만난 셈이다. 그래도 이를 은덕으로 생각하고 나 자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옛 돌궐제국의 장군이였던 톤유쿠크의 비문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필자가 재직할 당시 교장 및 교감 자격연수 강의를 할 때, 그리고 경상북도교육혁신홍보대사를 하면서 교육혁신에 대해 강의할 때도 자주 인용하던 구절이다. 교육지도자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진취적인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동·서 돌궐은 당의 지배기를 포함하여 160여 년간 존속하다가 결국 멸망하여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성을 쌓고 적의 침입에 대비한 신라는 천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런 엉터리 인용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성을 쌓아 안으로 안정을 다지고 밖으로 나아간 신라 사람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신라는 서라벌 가까이에서만 명활산성, 선도산성, 서형산성, 주사산성, 남산성, 관문산성 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기에 천 년 가까이 역사를 이어왔다.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이야기에 의하면 바로 근처에 있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에 백제 병사 500명이 매복해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니 서라벌의 안전을 위하여 작원성을 쌓아 군사를 훈련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리라.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명활산성 등의 산성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작원성에 대해서는 그 자료가 거의 없다. 빈약하지만 문헌을 찾고 현장을 누비며 그 흔적을 더듬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필자가 퇴임 5년 후 지금까지 작원성이 있는 이곳 대곡에 160여 평의 밭을 마련하여 10여 년간 주 2-3회 이 지역을 드나들고 있어 주민들로부터 작원성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원고를 구상하고 있던 차에 평소 자주 만나던 주민과 작원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기대 이상으로 작원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성으로 가는 길은 자기가 건천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바로 통학로라고 했다. 그러고는 실제 성으로 안내를 하겠다며 앞장선다.
건포산업로에서 용명대곡 교차로로 내려와 대곡용명길을 따라 200여m 대곡 쪽으로 가면 용명에서 내려오는 개천 위에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1km쯤 가면 산을 절개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안내를 한 주민의 말을 들으면 옛날 이 길을 내면서 산을 잘랐는데 목재 등 성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성의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토석혼축성으로 냇돌과 논흙, 개천의 흙으로 쌓았다. 다시 한번 더 살펴보기 위해 수일 후 좁은 농수로를 따라 이곳을 찾다가 자칫 길옆 수로에 차가 빠질뻔했다. 승용차로 현지를 답사하고자 할 때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져 곳곳에 그 흔적만 관찰될 뿐 원래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릉의 남쪽 높은 지점을 따라 이은 성(城)의 형태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산의 정상부 가까이에는 성벽의 열을 따라 곳곳에 무너진 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냇돌이 있고 주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편들이 간혹 보인다는데 실제 확인을 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