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고명재
풍차를 소재로 시를 쓰는 시인들은 외국 생활을 오래 했거나 망명했거나 그네를 탄 채로 노을을 보는 걸 좋아했거나 외로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말이 가난할 땐 흐린 날의 새가 된다 모든 말이 무릎 밑을 스친다 엎어질 듯 아슬하게 표현되는 몸 스친 자리에는 더러 양귀비가 핀다
어느 나라에서는 남의 말을 시라고 한다 누가 혼잣말로 추워, 라고 말해도 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준다고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해질녘은 이민자들로 넘쳐날 테고 온갖 종류의 빵냄새와 인삿말이 섞이는 그런 아름답고 시끌벅적한 강변을 생각해
​어느 나라에서는 외국어를 시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주민등록증을 수거하고 우선 재운다 소수 언어를 잊는 데는 잠이 보약이라고 가끔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은 외국어를 넘어 새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문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유리라는 사람이 꾀꼬리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어느 독일인은 탈무드와 토라에 평생을 바쳤다 그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유리잔을 감싸쥐더니 미안해서요라고 답했다 창밖에는 느티나무가 햇살과 섞였다 어느 일본인들은 매달 모여서 윤동주를 읽는다고, 어느 한국인은 히로시마 피폭자의 피부를 보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울었다
​누가 울 때 그는 캄캄한 이국(異國)입니다
누가 울 때 살은 벗겨집니다
누가 울 때 그 사람은 꽃이 됩니다
꽃다발은 가슴에 안아야겠지요
어떤 기사는 풍차를 보고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돌진을 솔직이라고 한다 솔직한 눈 꼭 잡은 손 솔직히 말하면 첫눈을 핥고 당신과 강물에 속삭이는 거예요 어떤 이들은 그 풍경을 소중히 여겨서 강가의 조약돌이며 반짝임까지도 모두 모아서 도서관으로 보낸다
시 혹은 사랑의 다른 이름들
젊고 싱싱하고 파문처럼 번져나가는 시를 읽는 일은 즐겁고 유쾌하다. “색을 다 뺀 뒤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은 뒤 씹어삼킨다”(「수육」) 할 때 묘사는 얼마나 싱그러운가? 그의 시의 대상과 의미는 일대일로 비유되지 않는다. 대부분 가족사나 일상에서 시를 끌어내는 이 시인의 시는 한 대상의 추억을 오랫동안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이 익어갈 때를 기다려 사랑이라는 속성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시켜나가는 특징을 지닌다. 그 시의 파문들은 “의미를 씌우지 않고 잡지도 않으며 줄기마저 비우는 혁명의 형식”(「지붕」)을 통해서 나온다.
​“말이 가난할 땐 흐린 날의 새가” 된다. “어느 나라에서는 남의 말을 시라고 한다 누가 혼잣말로 추워, 라고 말해도 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준다”, “어느 나라에서는 외국어를 시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시는 공감, 시는 외국어, 시는 사랑에 빠지는 것, 시는 새소리. 그래서 “가끔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은 외국어를 넘어 새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문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유리라는 사람이 꾀꼬리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황조가」를 쓴 유리왕의 가슴 저리는 심사다. 또 시는 미안함과 염치를 아는 것. “어느 독일인은 탈무드와 토라에 평생을 바”치고, “어느 일본인들은 매달 모여서 윤동주를 읽는” 이유는 “미안해서”이다.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일원으로서 “미안해서요”를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이런 지향을 따라가면 시는 “누가 울 때 살은 벗겨”지는 걸 아는 일. 시는 또한 풍경을 보고 돌진하는 것, “첫눈을 핥고 강물에 속삭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강가의 조약돌이며 반짝임까지도” 마음의 도서관에 간직하는 사람을 사랑의 사도, 혹은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따뜻한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얼마나 잘 익을 것인가. 그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